경제민주화를 말하다
노엄 촘스키 & 조지프 스티글리츠 외 지음, 바네사 베어드 & 데이비드 랜섬 엮음, 김시경 / 위너스북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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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열 마리가 거대한 당근을 깎아 만든 배를 타고 바다에서 길을 잃었다고 가정해보자. 배의 원료인 당근이 유일한 식량으로 남게 되자, 모든 토끼들이 그것을 계속 갉아먹고 있다. 배는 빠른 속도로 물속에 가라앉는 중이다. 그러나 아무도 배를 갉아먹는 일을 먼저 중단할 마음이 없다. 그렇게 한다면 가장 먼저 굶주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토끼가 배를 갉아먹는 일을 멈추지 않는 한, 그들 중 몇몇이 그 일을 멈춘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단 한 마리의 토끼라도 계속해서 배를 갉아먹는다면 배는 결국 가라앉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책의 글쓴이 중 하나인 기후변화 관련 활동가 대니 치버스가, 지금의 세계 기후위기 상황을 빗대어 표현한 대목이다. 하지만 그의 적절한 비유가 오직 기후변화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사실상 자본주의 시스템, 시장경제 체계 전체에 바칠 수 있는 찬사가 아닐까.

 

 

경제민주화라는 화두가 느닷없이 이번 대선을 통해 화려하게 등장한 것은 물론 아니다. 우리가 그동안 유심히 살펴보지 않았을 뿐이지, 1987년 개정된 현행헌법 제119조 2항은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제안해서 ‘김종인 조항’이라 불린다고도 하는데, 그것은 아무리 봐도 ‘오버’다.

 

 

대선과정에서 박근혜 당시 후보는 야당보다 한 발 앞서 경제민주화를 강조했다. 아울러 분배를 통한 복지까지 먼저 접수했다. 경제민주화와 분배, 복지는 모두 진보 진영이 주로 ‘아는 척’하는 이슈다. 진보라 하기에도 매우 민망하지만, 야당인 민주당은 새누리당에게 빼앗길 것은 다 빼앗기고, 새누리당의 것은 하나도 얻지 못했다. 국민들이 그렇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음에도 패배한 것은 지극한 이유가 있다.

 

 

새누리당 그리고 박근혜와 경제민주화. 얼핏 봐도 어울리지 않고 자세히 보면 더 어색한 조합이다. 줄푸세를 그야말로 줄기차게 주장해온 이들 아닌가. 그동안 신나게 MB를 신봉하다, 이제는 죽이기로 자연스레 갈아타는 분위기지만, MB나 박근혜나 큰 틀에서 바라보는 경제는 비슷하다. 개발, 수출, 규제완화, 파이 키우기 정도? 더 많이 알고 있는지는 미지수. 하지만 일단 신뢰를 주무기로 장착하고 원칙을 보조무기로 활용해 집권에 성공했으니, 경제민주화를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물론 예상대로 당선 이후 박 대통령은 경제민주화에서 점점 더 멀어져가고 있지만 말이다.

 

 

책은 노암 촘스키를 비롯해 조지프 스티글리츠 등 세계적인 학자들과 작가, 사상가, 활동가들의 글을 모았다. 저마다 미세하게 관심, 활동 분야가 다르기는 하지만 공통적으로 현 자본주의의 문제점, 시장경제의 한계 그리고 극심한 양극화 현상에 대한 우려와 전망, 해법을 담았다. 세계적 차원의 조세 정의 확립, 환경 변화에 대한 전 지구적 대응, 신자유주의의 내적 붕괴 등 현재 세계 경제 위기의 원인과 현황 등을 살펴본다.

 

 

경제민주화란 단어. 헌법에도 존재하는 말이지만, 여전히 무식한 우리에겐 어색하고 애매해 보인다. 왜 대담하게도 ‘나’가 아닌‘우리’가 무식하다고 했을까? 그동안 우리는 경제민주화란 말 자체도 제대로 생각해보지 못했을 정도로 천박한 경제시스템에 적응해 살아왔기 때문이다.

 

 

양극화 문제나 이로 인한 극심한 사회 분열, 없는 자의 대물림과 가진 자의 세습이 당연시되는 지금 분위기에서 경제민주화는 여전히 닿을 수 없는 유토피아처럼 보인다. 하지만 오스카 와일드가 말했듯 “세계지도에 유토피아라는 나라가 없다면, 세계지도를 들여다볼 가치가 없”지 않은가.

 

 

당근으로 만든 배에 탄 채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는 우리. 언론이나 법의 정의 등 방향을 가리켜야 할 나침반은 이미 맛이 가버린 지 오래. 게다가 오랜 경험과 지혜를 바탕으로 앞길을 인도해줄 어른다운 어른도 찾기 어렵다. 그 와중에 실컷 혼자 모은 재물을 얼싸안은 채(먹을 수도 없다. 돈을 먹을 수 있을까?) 신나게 당근을 갉아먹고 있는 무뇌아들이 곳곳에 포진 중이다. 뭐, 진퇴양난이다.

 

 

하지만 문제의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는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 시작조차 버거워하거나 귀찮아하거나, 누군가 하겠지 하는 무임승차 정신으로 외면한다면? 답은 없다. 계속 그렇게 살다 가는 수밖에.

 

 

책은 해법까지 친절히 소개하고 있지는 않다. 물론 적절한 영감을 주는 글들은 적지 않지만, 우리에게 정확한 매뉴얼을 제공하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무엇이 문제이고, 왜 지금 이 세상이 이렇게 엿같이 굴러가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을 충분히 제공하고 있다. 우린 다시 여기에서 시작하면 된다.

 

 

이제 그만 징징대고, 다시 눈을 부라리시길. 부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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