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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먼저다 - 좌파는 어떻게 세상을 바꾸려 하는가?
장 뤽 멜랑숑 지음, 강주헌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지난 5년은 그야말로 ‘불통’으로 점철된 시간들이었다. 대통령이, 또한 정부가 하는 행동에 대해 국민들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었다. 국민의 동의나 최소한의 논의를 거치지 않은 일방적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납득 수준이 아니라 환호한 극소수도 있었음은 기억해야 하겠지만.
그런데 이런 전 정권의 잘못을 반성삼아 국민대통합을 열겠다는 새 정부가 인수위 시절부터 수상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박 당선인은 유례없는 ‘방콕정치’를 선보이며, 총리 인준 등 첫 인사부터 참혹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불통’이 아닌 ‘밀봉’의 5년이 오는 게 아니냐는 우려는 그래서 생기고 있다.
이번 대선의 핵심 키워드는 여야를 막론하고 단연 ‘복지’였다. 특히 박근혜 후보는 야당 못지않은 강력한 복지 공약을 내세웠고, 상당 부분 그것이 유효했다. 실현가능성은 제쳐두고라도 말이다. 박 후보의 당선에 큰 역할을 한 50대의 경우도 이념이나 보수성을 중요시 한 것만큼 양극화와 복지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이들 역시 30대 못지않게 사는 게 불안했던 것이다.
아무튼 이제 국민들은 공평한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는 ‘묻지마 성장’을 거부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경제 10위권이라는데, 여전히 살기 팍팍한 이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 그 현실을 바탕으로 지극히 당연한 자각과 분노가 일어나고 있는 중이다. 분명 말하건대, 현재진행형이다.
그 덕분에, 그러니까 국민의 자각 때문에, 과거에 비해 지역주의, 지연, 학연, 혈연 등으로 오염되었던 정치판이 그나마 조금씩 정화되고 있다고 느끼는 건, 나 혼자 만일까? 아울러 이번 대선을 통해 또 하나 절실히 와 닿은 점은, 국민들이, 유권자들이, 이 땅의 주인들이 정치권력을 쥐고자 하는 이들의 비전과 정책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자신이 지지하거나, 혹은 반대하는 후보의 정책적 차별성은 무엇이며, 어느 후보의 공약을 지지하는 것이 내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지 판단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대통령은 어찌 되었든 5년마다 한 명씩 바뀐다. 박정희 같은 돌연변이는 이제 탄생 불가하다. 하지만 국민 개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5년 단위로 정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때문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대선 후보 및 정치인들의 공약을 꼼꼼히 살피는 것, 그리고 결정한 후보를 적극 지지하는 것이다.
책은 2011년 프랑스 대선 당시 돌풍을 일으켰던 좌파전선 연대후보 장 뤽 멜랑숑의 공약집이다. 이를 B급 경제학자 우석훈이 이해하기 쉽게 풀어 설명했고, 프랑스와 우리의 다른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 소개하고 있다.
선거운동 당시 지금은 대통령이 된 올랑드의 파리 유세가 8만 명을 끌어 모은 데 반해, 멜랑숑의 연설을 듣기 위해 바스티유 광장에 모인 인파는 무려 12만 명에 달했다고 하니, 가히 그의 인기와 함께 좌파전선의 공약에 대한 프랑스 국민들의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과거 정치적 공약은 말 그대로 공(空)약이 되기 일쑤였다. 현 대통령인 이명박 역시 자신의 공약을 당선 후 호떡 뒤집듯 엎어버렸다. 그리곤 당차게 말씀하시었다. “선거 때 당선되기 위해서 무슨 말을 못해!”라고. 우린 참 솔직담백한 대통령을 선출했다.
하지만 MB와 같은 경우라도 자신의 공약에 100% 무심할 수는 없다. 아무리 철면피이고 개념이 달나라에 가신 분이라도, 그건 아주 위험한 정치적 도박이다. 바로 그 때문이다. 정치인들의 공약에 주의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그리고 당선된 이후 그 공약을 얼마나 철저히 지키는지 매섭게 감시해야 한다. 그게 나라의 주인인 국민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멜랑숑의 공약집은 오래된 프랑스의 경기침체를 극복하지 못한 주류 정치권에 대항해 ‘인간이 먼저’인 사회에 대한 희망과 비전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은 놀라우리만치 우리의 희망과 비전, 바로 그것과 유사하다.
주 35시간 노동 기준으로 월 최저임금 240만 원 보장, 공공분야 80만 비정규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 건강 지출 비용의 100% 상환, 5년 간 연 20만 임대주택 건설, 기업의 금융 소득 세금 부과 등. 모두 부의 공정한 분배, 사회적 불안과 불평등을 해소하는 구체적인 정책들이다.
‘인간이 먼저’라는 지극히 당연한 명제를 캐치프레이즈로 들고 나올 만큼 지금 이 세계는 신자유주의에 포위된 상황이다. 물론 신자유주의가 몰락하고 있다고 기쁨에 차 외치는 이들도 있지만, 아직 그 아성은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변종 신자유주의의 출현도 우려되는 상황이다.
좌파전선이 내세운 정책은 우리의 기준으로 봤을 때는 매우 파격적일 수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취지는 크게 다르지 않다. 모든 인간의 삶이 온전해질 수 있도록, 무지막지한 상품화와 성장의 논리 대신 인간을 먼저 생각하자는 것이다. 멜랑숑이 신자유주의 20년의 폐해라고 지적한 ‘생태적 재앙, 불평등·불안정·빈곤의 폭발, 반복되는 민주주의의 침해, 연대와 협력에 근거한 인간관계의 추락’등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힘. 그것은 바로 대통령이, 정부가, 기업이 아닌 ‘국민’이 스스로 움직이고 행동하는 것뿐이다.
멜랑숑은 결론에 이르러 “전제 군주에게 최고의 방어벽은 국민의 무기력함”이라는 마키아벨리의 말을 인용한다. 그리고 외친다. 시장의 횡포에서 벗어나려면 국민이 움직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이런 변화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선택에서 시작된다고.
자, 이제 51%의 국민적 지지를 얻은 새 정부가 들어선다. 양극화의 심화와 경기침체의 어두운 터널을 뚫고 가기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국민들은 어떠한 자세로 새 정부를 바라봐야 하는가. 이제 그 시작이 곧 눈앞에 나타날 것이다.
개인적으로, 적어도 프랑스 국민들의 열정과 관심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멜랑숑의 공약집은 프랑스 전역에서 30만 부 이상 팔려나갔다. 만약 우리 정치판에서 통합진보당이나 진보정의당은커녕 민주통합당의 공약집이라도 이 정도로 관심을 받을 수 있다면, 분명 지금과는 다른 희망이 생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민주통합당이 좌파전선과 같은 공약집을 낼 능력이 있다는 소리는 절대 아니다. 지금 모습으로만 보면 민주통합당은 차라리 해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추하다.
정치인의 공약에 대해, 그리고 우리의 권리에 대해 조금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민주주의는 공짜로 얻을 수도 없지만, 공짜로 유지·발전되지도 않는다. 위대한 MB의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