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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분 인생 - 진짜 나답게 살기 위한 우석훈의 액션大로망
우석훈 지음 / 상상너머 / 2012년 2월
평점 :
품절
스스로 C급 경제학자라 말하는 우석훈 선생. 그의 글로 그동안 배운 게 참 많은 나 역시 C급 기자인 것인가!^^ 뭐, 전혀 억울한 마음은 없다. 지금과 같은 후안무치의 시대의 과연 A급을 자처하는 ‘1등급 인간들’에게 그리 배울 것이나 존경할 만한 점들이 없기 때문이다.
책은 에세이다. 그가 살아온 과정, 느껴온 과정, 사랑해온 것들, 싫어하는 것들 그리고 생각하고 추구했던 신념과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스스로 말도 잘 하지 못하고, 글도 재미있게 쓰지 못한다고 겸손을 떠셨는데, 내가 보기엔 겸손도 지나치면 재수 없다. 그는 말도 잘하고 글도 재미지게 쓴다.
그는 경제학자다. 경제학자는 세상을 돈을 중심으로 바라본다. 그 역시 마찬가지라 말한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세상이 돈만으로 구성된 것도 아니고, 사람들의 일상성을 구성하는 많은 동기들이 꼭 돈이나 경제적 이유인 것만은 아니라고 믿고 산다. 아울러 선진국이 되면, 사람들의 행위의 절반 정도는 돈이 설명하지만 나머지 절반 혹은 그 이상은 돈과는 상관없는, 보람이나 가치 혹은 미학적이거나 예술적 이유로 더 많이 설명된다고 믿는다. 동감이다.
그는 소위 남들이 보기에 잘나가는 위치에 올랐을 때 가장 불행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인물들이 하나같이 이른 바 높은 자리에 있는 이들일 때 가장 외로웠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가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내려놓은 채, 평범하지만 열심히 정직하게 땀흘리며 살아가는 이들과 함께 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한다. 당연하지. 그걸 꼭 마흔이 넘어서야 아셨나.
그의 표현대로라면 우리 가카 - ‘이 희한한 사나이는 반도에 사는 우리 모두를, 좌파든 우파든, 진보든 보수든, 좀 너저분하게 만들어버렸다 - 덕분에, 우리 모두가 조금은 정신줄을 놓았고, 또 놓고 살고 있다. 그가 상징하는 대한민국의 모든 추악한 욕망이 그대로 바로 우리들 자신이었음을 알아차렸을 때의 그 낭패감. 우리는 모두 그런 낭패감 속에 5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는 유쾌하다. 정말 유쾌할 수 없는 세상에도 그 유쾌함을 놓지 말자고 말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고, 누군가를 돕기 위해 노력하자고 말한다. 그러면 비로소 정말 행복해진다고.
내가 보기에 그는 상당히 까칠한 사람이다. 글 마다 동감되는 부분이 적지 않은 것을 보면 분명 그렇다. 그는 매우 까칠한 양반일 것이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천사와 같은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의 등에 칼을 내리꽂는 인간들이 미쳐 날뛰는 세상에서, 까칠하지만 강자를 위해 굴종하지 않고, 이웃들과 함께 상식을 믿으며, 불의와 몰상식에 짜증을 내는 이들은 아름답다. 암암.
돈이 모든 것의 우선이 되면 세상은 정말 간단하다. 하지만 그만큼 정말 재미없을 것이다. 말이 재미없는 것이지, 지옥과 같은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이 점점 천국과 멀어져 보이는 이유다. 지옥에서 도덕과 가치와 상식과 아름다움은 개에게도 주지 않을 것 아닌가.
이 모든 일들이 오직 위대한 가카 때문이라고 핑계댈 수는 없다. 우리 모두가 MB와 같은 유전자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조금 더 대놓고 본능을 발산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을 뿐이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 치열하게 고민하고 성찰할 필요가 있다. 과연 우리는 왜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인지.
그의 글들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발랄하다. 확실히 어린 친구들과 어울리고, 예술을 사랑하시다보니 글까지 젊다. 부럽다. 난 내 글이 어이없게 늙었다고 생각할 때가 많은데. 하지만 재기발랄함 속에 감추어진 날카로움, 해박한 지식, 유연한 발상과 확고한 신념, 똑바로 땅에 뿌리박은 철학은 숨길 수 없다. 역시 그동안 그가 고민해온 시간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세상에 공짜가 어딨나.
그의 글은 솔직하다. 욕먹을 인간들은 욕하고, 반대는 칭찬한다. 자신도 잘난 게 없음을 밝힌다. 잘난 척 할 때는 좀 하는 것 같다만.^^ 하지만 전혀 거부감이 없다. 무엇보다 키득거리며 읽다가도 고개를 끄덕이게 되고, 때론 ‘아, 쪽팔려…. 나도 이런 적이 있지’하며 반성까지 유도한다.
오랜만에 아주 즐겁게 책장을 넘긴 것 같다. 특히 이런 에세이를 경건함이 아닌 발랄함으로 읽는 것은 참 오랜만이다. 유쾌한 독서는 언제나 감사할 따름.
최근 한미FTA에 대한 책을 낸 것으로 안다. 참 부지런한 양반인 것은 인정해야 겠다. 《나는 꼽사리다》하랴, 강연하랴, 글쓰랴. 역시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C급 경제학자가 살아가기는 힘든 것인가.
앞으로도 그를 응원한다. 지인 중 그를 개인적으로 몇 번 알게 되었다는 이는, “글과 그 사람의 행동이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라며 약간의 비판을 가했지만, 뭐 상관없다. 윤리 교과서 쓴 양반들이 하나같이 윤리적이고, 종교서적 쓰는 양반들이 모두 성자는 절대! 아니니까. 다만 그의 글을 통해 내가 반성하고 내가 웃고 내가 즐거우면 된다. 그 사람이 정말 몰지각하고 불의한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들통나겠지. 뭐,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그는 고양이를 사랑한다. 매우. 그리고 고양이의 야성을 사랑한다. 그 길들여지지 않음을 사랑한다. 그가 지식인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신념 역시 고양이와 같다. 길들여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 지식인들이 ‘한 조각씩 던져주는 고기조각에 길들어져 사는 강아지보다는 언제나 야성으로 남는 고양이에게 배워야 한다’는 주장엔 100% 공감이다.
책을 덮으며 생각해본다. 난 고양이였나, 강아지였나. 고기 조각 하나에 가슴 설레는 멍청한 강아지는 아니었을까.(물론 애완동물로써 강아지를 절대 무시하거나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나도 강아지 귀엽다!) 지식인까지는 아니더라도 절대 바보로 살고 싶지는 않은, 나는 정말 바보로 살고 있지는 않나.
그의 글을 가끔은 벼락같이 명심하며 살아야겠다. ‘Eye of The Tiger’까지는 안 되더라도, 야성을 잃지는 말자~! 잘 읽었다.
“성대를 끊고, 손발톱을 다 끊어도 고기조각만 때맞춰 던져주면 꼬리를 살랑살랑거리는 강아지를 바라보면 나는 화가 난다. 속에서 불같은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고양이는 길드는 것을 거부한다. 나는 그런 고양이가 좋다. 강아지 같이 살기 보다는 다소 모자라고, 때론 불쌍한 고양이 편이 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