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의 눈 - 서경식 에세이
서경식 지음, 한승동 옮김 / 한겨레출판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혹자는 그의 글이 너무 비관적이라 말하기도 한다. 또는 너무 회의적이라고. 너무 어둡다는 것이다. 진보적 미래를 위한 희망보다는, 과연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확신을 가져도 될 것인가 끊임없이 묻는 그에게 불편함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내가 선생의 글을 탐독하는 이유다. 사실, 그렇다. 나 역시 어느 순간부터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역사의 진보에 대해 어느 정도의 불신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끝난다면 그러나, 선생의 글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많은 이들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비관하지만, 절망 속에 침묵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를, 자신의 삶을,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한다. 단절과 불안의 시대에 ‘경계에 서 있는’자로써의 역할을 회피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의 글이 가지고 있는 힘이다.

 

책은 《한겨레》에 연재했던 글들을 모은 것이다. 최근 개인적으로 《한겨레》와 《경향신문》이 보여주는 행태에 적잖이 실망해, 유심히 읽지 않았던 터라, 그의 글만을 모은 책이 더욱 반가웠다. 가슴 아픈 일이다.

 

선생은 그동안 책들을 통해 끊임없이 인간성과 평화 그리고 공존에 대해 이야기했다. 전쟁과 폭력으로부터 상처받은 이들의 증언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를 줄기차게 해왔고, 그 덕분인가 어느새 우리들에게도 ‘디아스포라’라는 단어가 그리 낯설지 않게 되었다.

 

디아스포라는 잘 알려진 대로 ‘이산(離散)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지만 현재는 ‘어떤 외부의 힘에 의해 고향을 떠나 이리저리 흩어져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다. 선생과 같은 재일조선인도 식민 지배와 민족 분단이라는 외적인 힘에 의해 이산당한 백성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한 발 더 나가보자. 과연 우리는? 우리 역시 엄밀한 의미에 디아스포라가 아닐까. 분단과 전쟁이라는 참혹한 비극을 겪은 후,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 이미 갈 곳을 몰라 떠도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여기에 물질적 숭배와 무한경쟁만이 남은 지옥과 같은 세상을 꾸며놓고, 마치 그것이 본래부터 존재했던 삶터 인양 착각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우리가 감히 선생과 같은 재일조선인을, 탈북자를, 이주노동자와 외국인 신부들을 또 다른 타인으로 규정짓고 배척할 수 있을까. 그야말로 어리석은 짓이 아닐까.

 

아니다. 생각해보니, 서울과 지방의 기형적 차이, 서울에서도 강남과 강북을 가르는 무시무시한 편 가르기의 논리, 비싼 아파트와 임대 아파트 거주민을 가르는 차별과 무시의 논리.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가르는 비정한 ‘돈’의 논리. 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감싸고 있는 빌어먹을 ‘머조리티와 마이너리티’의 현실이 아닐까.

 

때문에 선생의 글을 다만 ‘우리’와 다른 ‘타자’의 글로써 인식하고 공감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공감과 소통이 아닐 것이다. 바로 우리 자신의 거울을 바라보고 있음을 느껴야 한다. 그것이 선생이 진정 원하는 바일 것이다.

 

선생을 통해 크게 깨우친 것 하나가 있다. 바로 ‘조국’을 바라보는 눈이다. 그동안 살아오며 끊임없이 버리고 버리려 했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찌꺼기가 바로 ‘국가’다. 권력으로서의 국가, 통제와 탄압의 수단으로서의 국가, 얄팍한 애국심을 선동해 기득권의 유지에 복무하는 국가의 개념 말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와 타자를 나누는 무시무시한 배제의 논리. 그 속엔 국가라는 괴물이 존재하고 있다. 국가가 시킨다면, 국가에 도움이 된다면, 국가를 위해…. 이렇게 우리는 형체도 없는 괴물을 위해 자신의 행복과 이웃과의 평화로운 공존을 유보한다.

 

선생은 “다수의 ‘국민’들이 공유하고 있는 듯한 애매한 혈연 공동체적 정서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공공적인 연계로서의 ‘조국’이라는 가능성”을 끊임없이 모색한다. 그리고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대화를 계속해감으로써 새로 만들어가는 사회, 그것이 나에게는 바람직한 ‘조국’”이라 말한다. 지극히 동감이다.

 

일본에선 신자유주의 경쟁 사회의 생존 경쟁에서 이긴 사람을 ‘가치구미(승리조)’라 하고 진 사람은 ‘마케구미(패배조)’라 표현한다고 한다. 우리 사회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누구나 가치구미가 되기 위해 이웃과 친구와 모든 사회 구성원들을 마케구미로 전락시키려 한다. 그렇게 만들고 있는 시스템이, 작동 원리가 무엇인지는 미처 생각할 겨를 없이.

 

선생은 끊임없이 ‘국민주의’에 저항해왔다. 국민과 비국민으로 갈리는 순간, 이미 그 속에 인권과 평화, 공존은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비국민의 ‘눈’으로 바라보는 이 사회의 현실은 반드시 이야기되어야 한다. 지독한 차별과 구분을 없애기 위함이다.

 

선생이 꿈꾸는 세상, 사회는 내가 생각하는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조금이나마 노력하는 것이 지구상의,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일 것이다. 꿈만 같은 그의 바람이 현실이 되는 그 날을 간절히 바라본다.

 

“2018년 4월 초의 어느 날, 나는 인천공항에 내렸다… 5년 전에 탄생한 현 정부는 에너지 정책의 극적인 전환을 호소해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다… 한국 정부는 에너지 절약을 강력하게 추진했고 그 결과 남은 에너지는 북한에 원조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10년 전에 50퍼센트를 넘었던 비정규직 비율은 한때 70퍼센트 가까이 올라갔으나 새 정부의 정책 덕에 30퍼센트까지 내려갔다… 징병제에서 지원병제로의 전환을 실행에 옮긴 정부는 장기적으로는 군대를 폐지해서 국경 경비나 재해 구조를 목적으로 한 경찰부대로 대체할 구상을 세워놓고 있었다… 재작년 국회에서 국가보안법이 마침내 폐지되고 형법상의 간통죄도 철폐됐다… 정주 외국인 노동자나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코리안 디아스포라들도 이 사회의 평등한 구성원으로 일상생활을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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