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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거품 오두막 ㅣ 미래인 청소년 걸작선 7
멕 로소프 지음, 박윤정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0년 2월
평점 :
품절
때때로 사람들이 나에게 ‘불편한 책을 잘도 읽는다’고 말하곤 한다. 그들이 말하는 불편한 책이 어떤 의미인지 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이웃들, 특히 더 힘들고 더 고통스러운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 썩을 대로 썩은 정치, 법조계, 권력 등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담긴 책, 그리고 이미 떠나간 이들을 기억하는 책 등이다. 하나같이 무덤덤하게 읽기 참 어려운 책임은 인정한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난 문학을 열심히 읽는 이들이 더 대단하게 보인다. 난 우선 아픈 것이 싫다. 참 싫다. 끝내 눈물을 떨구도록 만드는 이야기들은 날 참 약하게 만든다. 결국은 마지막 페이지까지 넘길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주저하게 되고 머뭇거린다.
차라리 현실이 그대로 보여주는 아픔에 더 무덤덤한 것일까. 현실은 말 그대로 현실인데. 그럼에도 이상하게 난 문학 작품이 전해주는 아련하고, 때론 싸한 아픔을 겁낸다. 마치 그것이 현실인 것 마냥 진하게 전해진다. 아프다.
성장소설의 대부분이 그렇듯, 《바다거품 오두막》역시 아프다. 그리고 진하다. ‘핀’을 향한 주인공의 사랑이 아팠고, 눈부시게 하얀, 깨끗한, 끝없는 바다와 해변이 아팠다. ‘리즈’의 집착이 서글펐고, 또 이별이 아팠다.
이 작품은 평범한(물론 평범한 성장소설은 없다. 모두가 다 특별하다.) 성장소설과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다.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문명에서 살짝 벗어난 삶을 살고 있는 핀과, 사회가 만들어 놓은 시스템에서 질식당하고 있던 주인공의 만남은 동성애적 우정, 사랑을 말하지만, 사실 주인공의 또 다른 자아들과의 만남이기도 하다.
‘나’가 이루지 못한 ‘나’와, 이루고 싶지 않은 ‘나’를 동시에 만나며, 헤어지고, 사랑하는 과정. 인간은 그렇게 성장한다.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지만, 결국 그것이 사랑이었고, 그것이 핀이었으며, 그것이 내 자신이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에, 지극히 위태롭게 서 있는 낡은 오두막에서 우리는 성장한다. 죽을 것만 같은 위험과 공포가 덮쳐도, 결국 아침엔 따뜻한 햇살이 쏟아진다.
작품은 백 살의 노인이 열여섯 살 처음 느꼈던 사랑을 추억하는 내용이다. 그 사랑은 순수했고, 무모했고, 무책임했다. 때문에 아름다웠다. 주인공은 핀을 통해 우정과 사랑과 배신과 공포와 나약함과 자립과 고독과 죽음을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삶의 덧없음과 유한함을 깨달았다. ‘무조건적 적응과 강력한 융합을 통한 전 시민의 개선에 혈안인 이 20세기 현대국가에서’주인공은 전혀 ‘현대’스럽지 않은 사랑을 만난다. 그리고 그 사랑을 통해, 먼 훗날 ‘아주 작은 것도 한 사람의 삶을 더 행복하게 또는 더 불행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하나의 사건 혹은 한 가지 생각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주인공이 기억하는 핀의 모습. ‘피곤할 때는 나른하고 우아하게 몸을 쭉 펴고, 그렇지 않을 때는 민첩하고 단호하게 움직이며, 말수가 적되 말을 할 때는 힘을 줘서 하고, 세상에 보답하는 식으로 미소를 짓’는 모습. 그런 핀을 사랑한 주인공은 이제 자신이 핀과 같은 모습임을 알고 있다.
유년 시절의 기억은 모자이크처럼 파편화 되어있다. 나에겐 그렇다. 하지만 굳이 그것을 억지로 끼워 맞출 생각은 없다. 살다가 문득 ‘딱’소리를 내며, 그 중 어느 것이 맞춰지는 순간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난 계속 성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성장하고 살아가는 것이 최선일까. 백세가 된 주인공은 어느 날 눈을 떠보면, 삶이 예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잔인한 속도로 달아나고 있으리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시간은 ‘우리 모두를 잠식한다’
“이런 생각을 하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 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만든 바다 속에 빠져들기 시작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의 목가(牧歌)는 이미 사라져버렸고, 우리는 미래를 향해 앞뒤 가리지 않고 돌진하는 데 에너지를 허비하고 있다. 그 때문에 이 불안정한 곳에서의 삶은 이미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지치고 망가져, 회한에 가득 차 어둠 속에서 나오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이제 나에게 다가왔던 첫사랑의 기억은 희미하다. 그 설렘도 무참하다. 하지만 저자처럼 나 역시 내가 ‘지구상에서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들과 우리 사이에 없었던 일들을 모두 기억하는 유일한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그때는?
모든 사라진 존재들에게, 모든 사라져가는 존재들에게, 아직 오지 않은 모든 존재들에게, 나 역시 감사의 마음을 전할 수밖에.
오래 기억될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