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와 우연의 역사 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자작나무 / 1996년 5월
평점 :
품절


2011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정말 빠르게 지나간 한 해였지만, 올해 유난히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분들에겐, 하루가 1년 같지는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모두들 어려운 시기에 너무 많이 고생하셨습니다.

 

어리바리한 제가 독서 목록을 처음 작성한 것은 1996년 12월이었습니다. 재수 끝에 대학입학이 확정된 직후, 어떤 계기였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문득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야말로 그 어떤 분들의 충고나 조언 없이, 아무런 기준과 생각 없이 이것저것 책을 잡았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고등학교 시절 까지 제가 과연 제대로 읽은 책이 몇 권이나 되었을까 생각하면 할 말을 잃어버립니다. 천둥벌거숭이마냥 제 하고픈 일에 매달렸고, 책을 읽는 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책을 읽긴 했겠지요. 하지만 독서목록 작성의 이전과 이후는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나름대로 기록을 남기며, 책 속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내려 했습니다. 엉뚱하게 제 수준과는 한참 동떨어진 책을 붙잡고 밤새 씨름하기도 했고, 또 어느 순간에는 기막힌 깨달음과 감동에 떨기도 했습니다.

 

1996년 12월 처음 기록한 ‘1호’책은 바로 조반니 모스카의 《나의 학교 나의 선생》이었습니다. ‘ABE’라는 문학 전집 시리즈의 1번 책이었는데요. 어찌나 재미있고, 감동적인지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바로, 슈테판 츠바이크의 《광기와 우연의 역사》는 4번으로 적혀 있습니다. 정확히 1997년 3월, 즉 제가 늦된 새내기가 되어 처음으로 캠퍼스를 밟을 그 시기였습니다.

 

정말, 그 시절이 언제 있었나 싶을 만큼 까마득합니다. 아마 기록을 보지 않았다면, 제 인생의 1997년은 여전히 기억과 혼동으로 어지러웠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 그때 이 책을 읽었고, 사랑을 했으며, 음악에 빠졌고, 우정에 환호하며, 젊음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올해가 저물어가는 지금, 문득 오래된 이 책을 발견했습니다. 저자에 대한 기본 지식이 전무 하던 시기, 무심코 잡은 이 책은 그야말로 역사에 대한 무궁한 흥미를 가져다주었습니다. 특히 고지식한 부하 그루쉬 장군 때문에 역사적인 전투였던 워털루에서 패배하고,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나폴레옹, 또 단 하룻밤 만에 프랑스의 국가를 작곡했지만, 정작 그 노래가 전 세계를 휩쓸 동안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무명의 작가 루제, 대서양에 해저 케이블을 설치한 ‘대담한 몽상가’ 사이러스 필드와 황금의 땅 엘도라도를 만든, 그러나 본인은 지독한 가난과 조롱 속에 죽어갔던 수터 등 인류 역사의 커다란 변화를 만든 이들의 사소한(!) 일화, 일생은 역사에 대한 제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저자 역시 충분히 알고 있었겠지만, 역사는 어느 위대한 한 영웅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이름 없는(이는 아주 잘못되었지만, 흔히들 쓰는 표현입니다. 이름 없는 이들은 없습니다.) 민중들이 이 지구상 곳곳에서 자신의 생명을 불같이 태워가며, 역사는 발전해 왔습니다. 때문에 어쩌면 이 책의 내용은 다소 과장이 아닌가 하는 의문과 비판을 받을 수도 있겠습니다. 어떤 특정 인물, 특정 사건이 향후 오랜 시간 동안 인류의 역사를 바꿨다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죠.

 

하지만, 분명 돌이켜보면 역사의 반전을 일으킨, 혹은 인류의 발전에 촉매제가 된 인물, 사건은 있어왔습니다. 꼭 책의 내용이 아니더라도 말이죠. 예를 들어 9·11 테러가 없었다면? 과연 후세인, 빈 라덴, 카다피 등이 그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았을까요? 물론 미국이 그들을 결국엔 제거하려 했겠지만, 아마 또 다른 명분을 찾느라 고생했을 겁니다.

 

또 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지 않았다면? 그렇다면 노무현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이 어쩌면 지금도 우리 곁에 머물고 있지 않을까요. 아, 이 생각을 하면 또 피가 거꾸로 솟구칠 것 같으니, 그만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2011년이 저물어 가는 이 시점, 우리는 또 하나의 거대한 사건과 만나게 됐습니다. 바로 북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입니다. 과거 1994년 김일성 주석의 사망 시, 어리석은 김영삼 정권의 잘못으로 우리는 커다한 위기를 맞아야만 했습니다. 그런 실수를 또 현 정권이 반복하지는 않을지 걱정입니다. 일단 이희호 여사와 현정은 회장이 조문길에 올랐으니 다행이지만, 앞으로 이 한반도의 격동기를 어떻게 슬기롭게 지나가야 할지, 많은 고민과 신중함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역사는 분명 수많은 민중들이 만들어 갑니다. 만약 모든 이들이 자신의 할 일을 멈추어 버린다면, 그것은 바로 역사의 중단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불태워 역사를 만들어 나가고, 그 역사는 다음 세대들에 의해 또 다시 가공되고, 신화화 될 것입니다. 여기에 우연과 광기가 겹친 사건 하나가, 한 인물 하나가 부각되고, 또 사라질 것입니다.

 

내 삶 자체가 역사의 일부분이라는 생각을 하면 허투루 사는 것이 녹록치 않습니다. 잉여 인간으로 살고픈 욕망에 살짝 금이 가게 됩니다. 내 안의 역사, 내 몸이 기록하고 증언하는 역사를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일생 고민할 문제입니다.

 

이 책은 당시 꽤 많은 인기를 누렸던 것 같습니다. 다른 저자가 이 책 제목을 빌어 2권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자가 인용했듯, 괴테는 역사를 ‘신비스러운 신의 작업장’으로 표했습니다. 이 말이 꼭 종교적 의미만을 가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5년 전, 이 책을 읽었을 때 ‘나’와, 지금 다시 페이지를 든 ‘나’는 과연 같은 하나의 인간일까요, 아님 전혀 다른 ‘나’일까요. 두렵고도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전 그동안 15년이란 세월을 온전히 내 역사로 만들어 왔을까요.

 

올해 마무리 잘 하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책과 함께 사색하고, 성찰할 수 있는 연말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운명은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에 대해서도 결코 지나치게 너그러움을 보여주지 않는 법이다. 신들은 아주 드물게만 한 인간에게 한 번 이상의 불멸의 행동을 허용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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