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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이야기
김종광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아, 이건 뭐. 울 수도 없고 웃을 수도 없고.”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느낀 감정이었다. 나 역시 책의 주인공 ‘소판범’과 마찬가지로 돈도 빽도 없었기에, 당연히 현역으로 군대에 다녀왔다. 평소 삐쩍 말라 주위 사람들로부터 “넌 조금만 더 살을 빼면 체중 미달로 군 면제일 꺼다. 알아서 빼라”는 충고를 들어왔던 나였지만, 웬걸. 국방부는 나에게 자랑스럽게도 신체등급 1급을 선사했다. 오호라, 드디어 국가가 나를 알아보는 것인가.
내가 입대할 때는 IMF의 직격탄을 전 국가적으로 받아내고 있었던 시기였다. 아니, 조금은 그 환란에 적응하고 있을 때였다고 해야 하나. 1998년 12월 14일, 논산으로 향하는 내 마음은 그냥 어중간 했던 것 같다.
어떻게 하다 보니, 여자 친구를 비롯한 친구들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훈련소로 갔다. 들어가기 전 먹었던 설렁탕 비슷한 그 무엇은 정말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머리칼은 미리 자르고 갔기에, 밥만 먹고 바로 들어가면 되는 거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습지만, 여친도 나도 약간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훈련소에서 여친이 울면 100% 고무신을 반대방향으로 신는다는 속설도 있었지만, 실상은 둘 다 그 순간까지도 실감을 하지 못한 것이다.
먼 훗날 친구들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여친도 어머니도 돌아오는 기차에서 울었다고 한다. 참나, 그냥 내 앞에서 울면 되지 뭘. 암튼 난 아무런 감정 없이 조교들의 쏟아지는 욕설을 들으며 입소대대에 들어갔다.
어딜 가나 마찬가지겠지만, 적응의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다 살만 한 법이다. 논산의 6주는 더디게 흘러갔지만, 점차 나와 내 동기들은 찌질이에서 각잡힌 군바리가 되어갔고, 책의 주인공처럼 ‘거지처럼’밥에 환장했다. 설날에 나온 떡이 내무실 바닥에 떨어졌는데, 그걸 주워 먹는 인간들도 있었다. 물론 나 역시 타이밍이 맞았으면 주워 먹었을 것이다. 내 생애 그렇게 먹는 것에 탐욕적이던 때는 그 전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다.
난 양심적인 병역거부를 찬성한다. 동시에 군가산점 제도에 반대한다. 군가산점 제도는 엉뚱하게 예비역과 여성, 그리고 예비역과 군에 가지 못한 이들을 이간질시키고, 갈등하게 만든다. 우스운 짓이다. 예비역들은 국가에 짜증을 내야하고, 국가에 요구를 해야 한다. 여성들에게 찌질이처럼 굴 일은 전혀 아니다.
그래서 내 군 생활을 아름답고 숭고하고 온갖 소중한 추억이 난무하는 기억들로 치장할 마음은 전혀 없다. 그냥 지극히 평범한 대한민국의 남성처럼 군대에 다녀왔을 뿐이다. 해병대처럼 무지하게 빡세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메이드 인 당나라 부대도 아니었다. 아주 평범해서 책으로 쓴다면 단박에 망할 스토리다.
하지만 그럼에도 책을 읽으며 내가 군대에서 보낸 2년 6개월의 시간들이 새록새록 다시 떠올랐다. 힘들고 짜증나고 어느 땐 고통스러웠지만, 100% 나빴다고 결론지을 수는 없었다. 그 시절에도 분명 좋은 일들, 추억들이 있었다.
저자는 정말 놀랄 만한 기억력으로 자신의 군 생활을 들려준다. 난 그 정도의 자신은 없다. 물론 저자 역시 이후 여러 가지 자료들을 찾아 기억을 보완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단하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훈련소에 따라와 준 여친은 눈물을 보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병장을 달고 나온 휴가 때 이별을 통보했다. 그 자리에선 상당히 쿨하게 “잘 살아라”를 외치고 나왔지만, 무고한 친구 녀석을 붙잡고 밤새 징징거리며 술을 펐던 기억이 난다.
제대 후에도 난 찌질한 짓거리를 또 했다. 꼭 맨 정신이 아니고 술에 취해 전화를 걸어 다시 만나주면 안 되겠냐는 눈물어린 호소를 했다. 결과는 뭐, 예상대로다. 제대로 될 리가 있나. 취해서 떠드는 놈을 누가 좋아하겠나. 그 정도로 당시엔 그 친구를 정말 좋아했던 것 같다. 뭐 억울한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기껏 병장까지 기다려주고, 이게 뭔가. 자세 안 나오게.
이후 세월이 흘러 난 결혼을 했고, 그 친구도 결혼을 해서 잘 살고 있다고 한다. 다행이다. 뭐 나 같은 녀석과 사귀어 봤으니 더 훌륭하고 멋진 남자를 만나 잘 살 수 있겠지. 위로해본다.
대통령이나 장차관, 대기업 간부 등등을 아버지나 어머니로 두지 않은 대한민국 청년들은 누구나 군대에 간다. 그리고 개고생을 한다. 어떤 단어든 앞에 ‘개’를 붙이면 곱하기 100을 생각하면 된다. 향토사단이든 해병대든 암튼 부대 안에 들어가면 누구나 고생이다. 오늘도 이 조국의 안녕을 위해 자신들의 안녕을 잠시나마 유보하는 이들. 국군장병 아저씨에서 이제 그냥 동생들 조카들이 됐지만, 세월이 아무리 좋아져도 군대는 힘들다.
하지만 분명 군대는 남자를 변화시킨다. 군대 가야 철든다는 개소리는 아니다. 그건 정말 개소리다. 대신 남자는 군대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어차피 대한민국 사회는 군대화된 사회였다. 직장이나 학교나 군대식 서열의식은 살아 숨 쉬고 있다. 다만 군대는 그것을 다시 한 번 제대로 확인시켜줄 뿐이다.
남자가 변한다는 것은 더 현실적인 사람이 된다거나, 더 현명한 사람이 된다는 뜻이 아니다. 자신 안에 숨겨져 있는 비굴함과 잔인함, 동정심과 적개심을 동시다발적으로 느낄 수 있다는 소리다. 그리고 판단할 수 있다. 자신이 원한다면. 그것은 내가 어떤 녀석인 것을 알았으니,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선택할 수 있다는 소리다. 그냥 군대식으로 사회에 나와서도 그렇게 살아갈지, 아니면 잘못된, 모순된 부분들을 최대한 고쳐나가며 살 것인지.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즐거운 군대의 추억들과 기억하기 싫은 부분까지 동시다발적으로 일깨워준 책이다. 눈물 찔끔 나게 공감되는 부분도 있었고, 키득거리며 웃어넘긴 부분도 있었다. 그리고 부모님을 생각하며 울컥했던 기억들까지.
예비역을 비롯한 아직 군대에 가지 않은 동생들, 그리고 군대에 남친을 보내놓고 고무신의 착용 방향을 심각하게 고민 중인 아가씨들의 일독을 권한다. 물론 누구나 읽어도, 재미있다.
통장 계좌번호, 카드 번호는 잊어도. 왜 나는 아직 군번을 잊지 못하는 것일까. 책을 읽으며 그냥 다시 생각난 것일까. 아무튼. 난 대한민국 군바리였다. 자랑스럽지도, 부끄럽지도 않다.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