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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 인문학의 눈으로 본 신자유주의의 맨 얼굴
엄기호 지음 / 낮은산 / 2009년 5월
평점 :
지난 10월 10일 쌍용자동차 희망퇴직자 김모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홀어머니 아래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그는 군에 입대했다가 직업훈련원을 거쳐 2000년 쌍용차에 입사했다. 외아들을 홀로 키워내신 어머니는 ‘최고의 직장’에 들어간 아들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 없었다.
그는 10년 동안 쌍용차 조립 공정 등에서 일하며 동료들과 어울리며 더 착하고 더 명랑한 사람이 되어갔다. 월급날이면 동료들에게 삼겹살에 소주 한잔을 사던 그는 그렇게 우리가 아는, 동네에서, 직장에서 마주칠 수 있는 보통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어머니를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나야만 했다. 2009년 여름, 77일에 걸친 정리해고 반대 파업에 참여한 것이 그의 유일한 ‘잘못’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노조 활동을 그렇게 열심히 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50여 일을 동료들과 함께 공장에서 먹고 자다가, 경찰의 강제진압이 있기 전날 공장에서 나왔을 뿐이었다. 때문에 그가 참여한 날은 76일이다.
그는 지체 없이 희망퇴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그는 다시 동료들을 보고 싶었다. 말만 희망퇴직일 뿐 그가 10년을 일했던 그 일터에서 그 동료들과 함께 일하고 싶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것은 불가능했다.
재취업이 이뤄지지 않았다. ‘쌍차 출신’이라는 족쇄가 그를 오도 가도 못하게 했다. 쌍용차에서 협력업체를 압박해 인근 지역에서는 취업이 안 된다는 소문만 무성했다. 이력서에 “쌍용차 이력을 지우라”는 충고도 들려왔다. 성실히 일한 10년이 오히려 그에게 족쇄가 됐다.
스스로 목숨을 버리거나, 돌연히 세상을 떠난 동료들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강제 진압의 끔찍했던 날의 기억, 그 기억은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모든 것을 뒤바꿔버렸다. 2009년 여름 이후 지금까지 김씨와 같은 길을 떠난, 쌍차 노동자, 가족들은 17명에 달한다.
세상에 이런 무관심이 있을까. 전염병이 돌아 전국에서 17명이 죽었다고 해도 이렇게 무관심할까. 이렇게 나 몰라라 할 수 있을까. 자본과 기업의 악랄한 탄압, 신자유주의의 거센 물결 속에 장장 77일 동안 ‘위대한’투쟁했던 그들에게, 고작 지독한 가난과 외로움, 배제와 무관심 그리고 죽음이란 선물을 줘야만 했을까.
얼마 전 부산에서 열린 국제영화제 기간 동안 부산시는 ‘희망버스’를 자제해달라고 요청했다. 국제적인 행사에 ‘창피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 헛소리에 당연히 희망버스는 출발했고, 경찰은 물대포를 쏘아가며, 무차별 연행해갔다.
김진숙 동지가 크레인 위에서 외로운 투쟁을 한 지 얼마나 지났는지, 아는가? 그녀가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그리고 이젠 다가가온 매서운 추위 속에서, 도대체 얼마나 더 싸워야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 비로소 ‘상식’이 될 수 있을까. 국민들은 김진숙 동지가 심심해서 그 높은 크레인 위에서 생명을 걸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지금 MB가 미국 가서 펜타곤 방문한 게 더 중요한가, 나경원의 외모가 더 중요한가.
《닥쳐라, 세계화!》를 통해 신자유주의의 전 지구적 공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던 저자가, 이번에도 신자유주의의 확산과 정착 그리고 그 해법을 고민한다. 사는 게 더 이상 사는 게 아닌 세상. 오직 한 사람만 살아남을 때까지, 죽어라 탈락자를 양산해내는 지옥의 서바이벌 게임. 그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다.
저자는 “현실은 이미 나의 문제로 바싹 다가와 있는데도 신자유주의는 우리로 하여금 여전히 ‘나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교묘하게 자신을 속이도록 만들고 있다. 이 착각에 말려 버리면 우리는 세상을 보는 눈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경고한다. 금융자본주의라는 희대의 괴물을 탄생시킨 신자유주의는 이제,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오직 고객으로만 계산한다. 때문에 고객이 될 수 있는 경제력이 없으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사람도 그 무엇도 아니다.
태어날 때부터 인간에게 주어지는 존엄성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다. 오직 자신의 더 높은 금액에 팔기 위해, 처절한 경쟁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자신이 태어난 가정이 어떤 경제적 위치를 확보하고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결정된다. 우리는 과거 신분제도가 사라졌다고 믿지만, 정작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인도의 카스트제도에 버금가는 돈의 신분제가 버젓이 살아있다.
성형수술을 제일 많이 하는 이들이 실업고 여학생들이라는 비참한 현실. 더 예뻐지겠다는 허영심, 사치가 아니라, “살기 위해”성형을 해야 하는 아이들. 그리고 그 돈을 벌기위해 원조교제까지 해야 하는 아이들. 가진 게 없으면 네 육체라도 팔라고 강요하는 사회.
예외가 규범이 되고, 규범이 예외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남을 돌볼 수 없다. 신자유주의는 남을 돌보지 말라고 충고한다. 오직 너의 소비자로서의 가치만 키우면 된다고 선언한다. 정부 역시 필요 없다. 정부가 괜시리 소비자의 세금을 뜯어내 비소비자들의 복지를 책임질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모든 것은 위대한 시장이 알아서 하모니를 맞출 것이다. 다만 정부는 강한 경찰력, 군사력으로 내외의 적을 탄압하기만 하면 된다. 사회의 불만을 가지고 있는 세력들을 응징하기 위함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알콩달콩 살아가는 소시민적 삶마저 허용하지 않는 사회, 사랑도, 섹스도 사치가 되어버린 사회. 위로마저 돈으로 환산하는 사회. 실업이 규범이고, 취업이 예외가 되어버린 사회. 신자유주의가 강요하는 공포로 인해 타인의 고통을 외면할 수밖에 없는 사회. 더 이상 희망이 있을까. 아니 희망이란 것이 존재하기는 했을까.
“기업이 주도하는 세계화 시대에 가난은 범죄이고, 더 가난해지는 데 항의하는 것은 테러”가 되어버린 사회, 신자유주의적 개발의 희생자가 “희생자로 남기를 거부할 때 그들은 곧 테러리스트”가 되어버리는 사회.
정부, 경찰특공대(경찰이 군대화 됐음을 의미한다. 경찰은 시민의 안전을 위해 있는 것이지, ‘작전’을 통해 진압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집단이 될 수 없다)에 의해 학살당한 용산 철거민들은 더 이상 희생자이길 거부했고, 그 대가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죽어서도 ‘도심 테러리스트’란 누명을 써야만 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신자유주의는 오로지 개인의 자유, 소유에 대한 자유로부터 출발한 근대 자유 개념의 극한이다. 때문에 그것이 틀렸다는 인정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자유는 개인이 소유하는 대상이 아니라 관계 안에서 발생하는 존재라는 점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개인의 사변과 이념으로 고립되지 않고 세상으로 나오려는 치열한 협력적 운동. 사유의 운동을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임을, 내 가족과 친구들의 일임을, 그래서 단순히 방관자의 위치에서 머물지 말고, 함께 생각하고 함께 행동으로 옮기라는 것. 그것이 저자의 마음이다.
이제 서울시장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다. 평생 혼자만 잘 살아온 이와 30년 동안 남들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한 이의 대결이다. 말을 그럴듯하게 하지는 못하더라도, 전국을 누비며, 함께 살아가는 법을 공부하고 그것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길을 찾아온 사람. 그리고 그냥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 좋은 학벌을 가지고, 유창하게 언변을 구사하지만 거대한 사학재단의 그늘에서 자기들만 잘 사는 것에 익숙한 사람. 답은 나와 있다.
쌍용자동차는 17명의 노동자와 그 가족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지만, 아무 문제없다는 듯, 차 팔기에만 전념한다. “바로 서고, 함께 서고, 다시 서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말이다. 함께 선다는 것은 노동자와 국민이 아닌 자본과 권력, 신자유주의임을 말하고 있다.
선거가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끊임없는 관심과 참여가 우선이다. 왜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와야만 하는지, 왜 물대포를 맞아가며 싸워야 하는지, 알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 물대포는 더 큰 재앙이 되어 우리를 겨눌 것이다. 지금의 물대포를 두려워하지 말고, 내 양심의 부패와 내 정신의 썩어감과 내 존재의 가치 상실을 먼저 두려워해야 한다.
“태양을 한번 본 자는 눈이 멀겠지만, 그렇게 보지 않는 이상 태양은 그저 꿈꿀 수밖에 없는 대상일 뿐이다”
눈이 멀더라도 태양을 직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