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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돌베개 / 2011년 6월
평점 :
자고로 ‘부러우면 지는 것’인데, 이 책을 읽고 결국 부러움의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라는 국가에 대해 그다지 부러움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나로써는 참 굴욕(!)적인 순간이었다.
‘꼰대’라는 말을 젊은이들은 자주 사용한다. 일단 나이가 많은 이들은 대화가 통하지 않는 고지식한 부류로 치부해버린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보수와 수구를 구별하지 못한 채, 이 나라를 악의 구렁텅이로 내몰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거기엔 일정한 타당함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분명 이 사회에 꼰대들은 존재하고, 또 그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 욕망, 해묵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후세들에게 치명적인 일들을 마구잡이로 벌였다는 사실. 분명히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소중한 이들도 분명 존재하고 있다. 세대 차이와 나이라는 무시할 수 없는 벽을 뚫고 분명, 이 사회와 구성원들의 진정한 행복과 진보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바람직한 ‘꼰대’역시 존재하고 있다. 한없이 소중하고 감사한 분들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의 저자는 1917년 출생의 노투사다. 반나치 레지스탕스 운동가였고, 세계 인권선언문 초안 작업에 참여하기도 한 그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젊은 세대들에게 말한다. “정당한 분노를 표출하라”고.
이 책은 저자의 조국인 프랑스 사회에 보내는 그의 공개 유언장이다.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느낀 그는 죽기 전 후세들에게 간절히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의미심장하다. 또한 우리 대한민국의 젊은 세대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어쩌면 더 그 느낌이 강하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다.
“그렇다. 이러한 위협은 아주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호소하는 것이다.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오로지 대량 소비, 약자에 대한 멸시, 문화에 대한 경시, 일반화된 망각증, 만인의 만인에 대한 지나친 경쟁만을 앞날의 지평으로 제시하는 대중 언론매체에 맞서는 진정한 평화적 봉기’를.
21세기를 만들어갈 당신들에게 우리는 애정을 다해 말한다.
‘창조, 그것은 저항이며
저항, 그것은 창조다‘라고.”
저자는 “인간의 권리에 대해서만큼은 타협의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 그는 폭력보다는 희망을, 비폭력의 희망을 택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인권을 침해하는 주체에 대해서는 누구를 막론하고 분노를 촉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라고 말한다.
사실 우리 국민들처럼 ‘적당한 것’을 좋아하는 민족도 드물다. 중용이라는 멋진 말을 제멋대로 오용하며, 기회주의를 감춘다. 남들이 뭐라 하든, 남들이 그 어떤 고통과 억압을 당하든 일단 나에게 피해가 오지 않으면 상관이 없다. 지독한 이기주의를 당연시하며 오직 나만 잘살면 된다는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런 인간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민족, 국가에 미래란 당연히 없다. 극도의 이기주의는 결국 파국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마치 인간의 이기주의와 욕망으로 망쳐버린 자연이 결국 인간을 멸종시킬 것임과 마찬가지다.
현재 우리나라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참혹한 상황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 그 상황은 최악을 향해 치닫고 있다. 경제, 남북관계, 외교관계, 민생, 사회, 문화, 예술 모든 분야에서 우리는 휘청거리며 절벽 끝으로 향하고 있다. 답이 보이지 않고, 오직 공멸의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결국 희망은 없어 보인다.
이러한 재앙을 막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면서 중요한 것이 바로 분노하는 힘을 키우는 것이다. 의로운 분노, 이는 사적인 화가 아닌 나와 내 이웃, 공동체,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는 분노이다. 조국 교수는 화의 뿌리가 사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인 것일 때는 그 공적인 원인을 해결할 때만 화가 사라진다고 말했다.
나만 아무 일 없이 잘 살수 있다고, 행복할 수는 없다. 당장 자기 집 앞길만 쓸어놓고 만족하거나 길 넓히는 데만 골몰하는 동안 울타리 바로 너머에 어떠한 재앙이 기다리고 있는지 똑똑히 봐야 한다. 그리고 그 재앙의 화근에 분노하라는 것이 저자의 간곡한 바람이다.
짧은 소책자 하나가 전해주는 묵직한 울림. 내 자신에 대한 무력감과 반성 그리고 이어지는 공분의 의미가 다가온다. 진정 분노할 줄 아는 자가 이 세상을 사랑하고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이들을 사랑할 수 있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또 한 번 느낀다.
맥도널드 빅맥 세트조차 사먹을 수 없는 OECD 최저 수준의 한국 최저 임금 시급 4,320원. 재벌의 사금고가 되어가는 은행, 민주공화국인지 삼성왕국인지 헷갈리는 현실, 죽을 때까지 돈 걱정하다 죽으라고 협박하는 대출업체와 상조업체의 무차별 광고 습격, 국가에 비판적인 모든 이들을 감옥에 쳐넣겠다고 발악하는 검찰의 ‘과잉범죄화’의 칼. 지금의 대한민국이다.
자, 가만히 앉아서 ‘세상이 다 그런거지’‘내가 할 수 있는 게 뭐 있겠어’‘돈 생기면 기부나 하면 되는 거지’ 따위의 생각을 집어치우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분노의 표출’이 무엇인지, 내가 진정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해보자. 국민이 숨죽여 있으면 정부는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결국 국민들을 억압하고 착취할 뿐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러고 있다.
분노는 나쁜 것이 아니다. 그 대상에 따라, 그 이유에 따라 말이다. 10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진보를 향해 달려가는 노투사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그의 말을 가슴 깊이 새긴다.
“나는 언제나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 편에 서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