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마을 소년들
황용희 지음 / 멘토프레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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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는 서서히 노을이 깃들고 있었다. 서편 하늘을 수놓은 형형색색의 낙조는 오직 자연만이 연출할 수 있는 장엄한 예술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슬프도록 아름답고 황홀한 석양빛은 너무나도 깊이 내 가슴 속에 새겨져 사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선연히 떠오르고 있다.”

 

사람들에게 고향은 어떤 의미일까요. 자신이 태어난 뿌리이자 언제나 돌아가고 싶은 그리움의 대상. 혹은 지난 추억들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기억의 보물창고. 고향이란 단어를 떠올리며 가슴이 벅차오르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책은 18년 동안, 섬마을 흑산도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냈던 저자가 고향에 바치는 아름다운 헌사입니다. 그 순수했지만 배고팠던 시절. 매서운 바닷바람을 맞아가며 조금씩 성장했던 섬마을 아이들과 바로 그 아이들을 위해 고된 노동을 감내해온 우리네 아버지, 어머니의 이야기입니다.

 

뜻밖의 행복이라는 것은 바로 이를 두고 말하는 것일까요. 무심코 꺼내든 이 책으로 저는 무한한 기쁨과 감동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어떤 명문장가가 쓴 글이라 해도 이처럼 벅찬 뭉클함을 줄 수 있을까요. 끝내 저를 울게 만든, 하지만 조금도 원망스럽지 않은 소중한 책입니다.

 

저에게 많은 울림을 준 부분은 바로 어머니들의 이야기였습니다. 거센 자연과 싸우고, 가난과 싸우며 자식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어머니. 그들의 눈물겨운 사랑이 없었다면 섬마을 아이들은 결코 바르게 자라지 못했을 것입니다.

 

“노동은 사람들을 힘들고 지치게 만들었지만 머리 위로는 무수한 별빛이 쏟아지고 반딧불이는 유령처럼 우리 곁을 날아다녔다. 우직 앞만 보고 일하는 어머니와 누나들은 별빛이나 반딧불을 불 겨를이 없었겠지만 나는 잠시 고개 들어 하늘을 쳐다보며 수억조, 항하사처럼 흐르는 별떼들과 소곤대기도 하고 반딧불이를 잡아 호박꽃 속에 넣어 형광을 만들기도 했다.

어머니와 누나들은 아침부터 오후까지 물질로 바닷속 미역을 베어내다 저녁에야 집에 온 다음 밤이 깊도록 쪼그리고 앉아 미역을 널어야 하니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이보다 더한 노동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새날이 밝으면 어김없이 바다로 나가야 했고 여느 때와 똑같은 작업을 반복하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여름철 바다 노동의 대부분을 감당하는 우리 동네 여자들은 희망의 아침 대신 고통의 새벽을 맞고 있었다.”

 

정직하고 숭고한 노동을 통해 가족의 생계를 이어나갔던 어머니. 그이들의 피와 땀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도 없었음은 물론입니다. 지긋지긋한 가난과 함께 평생을 고된 노동으로 보내신 우리 어머님들. 어찌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머나먼 섬 흑산도, 거기에서도 동지나해 쪽으로 30여 킬로미터를 더 가야 닿을 수 있는 섬 태도(苔島). 저자는 어린 시절을 1960년대의 보편적 현상이었던 가난의 질곡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지만, 맑고 평화로우며 경관이 수려한 고향을 둔 탓에 결핍상태가 영혼까지는 침범하지 못하고 겨우 엿이나 빵을 탐하는데 그치고 말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다표범’못지 않은 수영실력으로 자맥질하며,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보낸 유년시절을 눈물겹게 그리워합니다.

 

“옛날 외딴 섬마을이나 깊은 두메산골 아이들은 문화 혜택을 못 받아 여러모로 뒤떨어진 면이 있었겠지만 하늘과 바람과 구름, 쪽빛 바다, 가없는 수평선, 힘차게 솟아오르는 붉은 태양, 망망대해 떠가는 돛단배를 보며 밝고 맑게 자라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환경이든 완벽한 조건이란 있을 수 없고 공부를 우선시하는 도회지 부모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세상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잠시 잠깐도 아까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말합니다. 최초로 사물을 인식하기 시작한 유소년기에는 주입식 교육이나 혼자 하는 독서보다 들판과 언덕을 내달리며 산토끼도 쫓고 물고기도 잡아보는 거친 야성이 사람의 마음을 순박하게 하고 지구라는 이 땅덩어리에서 인간뿐 아니라 들짐승, 날짐승, 물고기 등 모든 생명체와 함께 살아야 한다는 큰 교육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백 번 지당한 말입니다.

 

문득 제 유년시절을 떠올립니다. 태어난 곳은 서울이었지만, 어린 시절 할머니가 계시는 수원 밤밭(율전동)에서 즐거운 추억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개구리도 잡고, 서리해온 콩을 구워먹다 얼굴을 새까맣게 만들기도 했고, 메뚜기, 방아깨비, 사마귀 잡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시간들. 그 비싼 장난감 대신 자연의 모든 것들이 마냥 신나는 장난감이자 놀이터였던 그 시절. 어떻게 그 시절을 잊을 수 있을까요.

 

그 시절의 기억이 지금의 저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은 물론입니다. 가능한 한 살상을 하지 않고, 나무 하나 풀 한 포기도 무심히 다루지 않는 마음. 제가 가지고 있는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입니다. 바로 이러한 성정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 만들어 준 것이지요.

 

책은 마냥 순수했던 그 시절의 아름다운 이야기만 담겨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다와 함께 살아가는 뱃사람들의 애환과 기구한 운명. 그리고 저자 자신의 가족사는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평생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고 지내온 저자의 아픔과 어머니가 감당해야 했던 그 숱한 고통과 인내의 세월들. 소식도 없이 집을 나갔다 오랜 세월 뒤에 돌아온 아버지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서러운 포옹조차 할 수 없었던 저자의 마음.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 책은 저자의 서럽고도 가슴 아팠던 유년시절이 함께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그 어떤 아름다운 기교나 화려한 수식어보다 더 큰 감동을 주는 글은 말 그대로 “솔직한” 글입니다. 아무런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자신의 삶을 담아낸 저자의 글은 때문에 아름답고 또 서럽습니다. 저자의 쉽지 않았을 용기로 인해 독자들은 아련한 추억과 함께 진한 감동을 함께 느낄 수 있습니다.

 

저자는 끝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다짐합니다. 자신의 어린 시절이 그대로 담겨 있는 섬마을로. 서러움, 배고픔, 무시와 천대가 남아있는, 하지만 벗들과의 즐거운 추억, 가족들의 뜨거운 사랑이 함께 있기도 한 그 고향으로.

 

저자의 소망이 끝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오랫동안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좋은 글로 저를 위로해 준 저자에게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합니다. 행복했습니다.

 

“나는 언젠가 섬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그곳에 회귀하여 밤바다에 낚싯대 드리우고 물고기 잡으며 커다란 만월도 잔 속에 담아봐야지요. 낮엔 연애소설을 읽거나 무위도식하며 밥을 축내다가 뒷산에 올라 고사리 뜯어먹으면 그만일 터. 그래서 나는 진실로 섬에 가려 합니다. 이 보잘것없는 글을 쓰면서 몇 번이고 다짐했던 것이 ‘귀거래’ 그 한 가지 약속이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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