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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슬립 ㅣ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1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1월
평점 :
무심한 말투, 언제나 입에 물려있는 담배, 인정머리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듯한 얼굴 그리고 위스키 한잔이 어울리는 남자. 하드보일드 문체의 대가라 불리는 레이먼드 챈들러가 탄생시킨 사립 탐정 필립 말로입니다. 어떤 이는 그에게서 세상의 탐정 반이 태어났다고 표현했습니다.
《빅 슬립》은 필립 말로가 등장하는 첫 시리즈입니다. 이른 바 전설의 시작이죠. 비열한 거리, 삭막한 도시 캘리포니아를 무대로 거칠게 살아가는 탐정 필립 말로는 이후 모든 추리작가들의 로망이자 추리 마니아들의 우상이 되었습니다.
최근 추리소설이나 스릴러물의 고전을 찾아 읽고 있습니다. 당분간 이 분야에 대한 편식이 이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 필립 말로의 활약을 읽지 않고는 하드보일드 작품을 논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듣고 《빅 슬립》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레이먼드 챈들러는 나의 영웅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챈들러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가 중 하나인데요. 챈들러의 리얼리티에 감탄한 그는 자신의 작품 《양을 둘러싼 모험》을 쓸 때 의도적으로 챈들러의 문체를 빌려왔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의 문체를 모방하기는 쉽지만, ‘시점’을 모방하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미국 대중문화의 상징적 존재라고 불리는 챈들러. 추리소설이라는 장르의 틀을 깨고 일반 문학에서도 인정을 받는 위대한 작가 챈들러. 그가 창조해낸 필립 말로는 중절모를 깊이 눌러쓰고, 트렌치코트의 깃을 높이 세운 채 한 손에 권총을 든 남자. 바로 미국 대중문화를 대표하는 느와르의 이미지이자, 하드보일드 탐정의 이미지라 할 수 있습니다.
살아 숨쉬는 듯한 묘사 그리고 주관적 해설과 감성이 느껴지는 특유의 문체로 챈들러는 미국 대중문화의 독보적 존재가 되었습니다. 필립 말로의 까칠함은 또 다른 매력으로 다가오고, 인생에 대해 무심한 듯한 그의 행동 역시 비열하고 차가운 도시의 이미지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집니다.
그녀는 날카롭게 말했다.
“그리고 난 당신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요.”
“나라고 그쪽 태도가 미치도록 좋은 건 아니오. 내가 그쪽을 보자고 청한 것도 아니고. 그쪽이 나를 불렀지. 그쪽이 나한테 공주처럼 굴든, 점심으로 스카치 위스키 한 병을 다 마시든 내가 상관할 바도 아니오. 나한테 다리를 자랑해도 상관없어요. 끝내주는 다리이기는 하니 알게 되어 즐겁군요. 그쪽이 내 태도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도 상관없소. 내 태도는 아주 나쁘니까. 나도 내 태도 때문에 마음 아파하면서 긴긴 겨울밤을 보낸다오. 그렇지만 나를 속속들이 캐보려고 당신 시간을 헛되이 쓰지는 마시오.”
정말 기막히다고 할 수밖에 없는 문장들이 넘쳐납니다. 이를테면 “무엇을 기다리는지 알지 못했지만, 무언가 기다려야 한다는 느낌이 왔다. 또 시간이 느릿느릿 행진하는 군대처럼 흘러갔다”라든지, “죽은 사람은 상처받은 마음보다도 무겁다”라든지, “말로입니다. 나를 기억하죠? 한 백 년 전쯤 만나지 않았습니까, 아니 어제였나요?”“세상은 흠뻑 젖은 공허 그 자체였다”“내가 고드름이라도 된다고 생각하지는 마오. 나는 장님도 아니고 감각이 마비된 것도 아니오. 내게도 다른 남자처럼 더운 피가 흐르지. 하지만 당신은 너무 쉬워. 빌어먹게도 너무 쉽단 말이야.”등등처럼 말이죠. 일일이 밑줄을 그어두어야만 할 것 같은 문장들이 넘쳤습니다. 왜 하루키가 그렇게 열광했는지 이해가 될 것 같았습니다.
잊지 못할 사연을 가득 담고 있는 것만 같은 고독한 남자. 그가 살아가는 세상은 따뜻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합니다. 때론 그것이 더럽고 혐오스러운 일일 지라도 말이죠. 살인과 폭력은 물론입니다.
글쓰기의 모범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은 분명 치명적 매력이 가득합니다. 처음엔 약간 어색하고 산만해 보일 수 있는 그의 문장도 점점 빠져나올 수 없는 늪처럼 당신을 유혹할 것입니다.
필립 말로의 활약은 총 6편입니다. 이 모든 작품들과 만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비정한 도시 속에 한 줄기 담배 연기를 뿜으며 걸어가는 고독한 남자의 이야기. 스산한 가을, 그와 함께 고독을 즐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합니다.
“일단 죽으면 어디에 묻혀 있는지가 중요할까? 더러운 구정물 웅덩이든, 높은 언덕 꼭대기의 대리석 탑이든 그게 중요한 문제일까? 당신이 죽어 깊은 잠에 들게 되었을 때, 그러한 일에는 신경쓰지 않게 된다. 기름과 물은 당신에게 있어 바람이나 공기와 같다. 죽어버린 방식이나 쓰러진 곳의 비천함에는 신경쓰지 않고 당신은 깊은 잠에 들게 되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