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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살인자 ㅣ 밀리언셀러 클럽 108
로베르트 반 홀릭 지음, 신혜연 옮김 / 황금가지 / 2010년 5월
평점 :
최근 추리소설에 다시 빠져들고 있습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을 시작으로 다시금 바람이 들었나 봅니다.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이후 계속 추리소설을 읽고 있습니다.
《황금 살인자》는 우연찮게 발견한 작품입니다. 사실 저자나 ‘명판관 디 공 시리즈’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네덜란드 출신으로 중국을 비롯한 동양의 문화, 문학에 많은 관심이 있었던 외교관이었습니다. 그러다 중국 전통 추리담의 영웅으로 알려진 디런지에에 대한 자료를 접하게 되었고, 이를 번역 소개하다, 결국엔 그를 주인공으로 한 추리물을 발표하게 됩니다.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학문적 연구와 번역의 영역에서 창작이라는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별 어려움 없이 건너뛸 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노력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가 중국에 머문 시간은 몇 번의 짧은 방문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몇 년 간 근무한 것이 전부였다고 하니 대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짧은 중국 체류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제국 중국의 생활상을 비교적 정확히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실제 책을 읽으면서 느끼게 되었지만, 당·청나라의 모습을 실감나게 그리고 있습니다. 아울러 중국인들의 유교 사대부적인 생활상, 사고방식 등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디런지에라는 인물은 실존인물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7세기 당나라 시대라고 하는데, 적인걸이라는 이름으로 명성을 떨쳤던 재상이었다고 합니다. 전설적인 수사방법, 정도를 벗어나지 않는 바른 품행, 초인적 통찰력으로 상징되는 그는 예전 TV드라마 ‘판관 포청천’처럼 명판관으로서 영웅적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도 나온 바 있습니다.
중국의 전통추리소설은 대부분 수령이 주인공이라고 합니다. 포청천을 기억하는 분들이라면 이해가 되실 것 같습니다. 도시에서 일어나는 기괴한 살인사건이나 끔찍한 죽음에 대해 수령은 자신의 직분과 통찰력을 이용해 공정한 심판을 내립니다. 마치 CSI처럼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을 하나하나 꿰맞춰가며 결국 통쾌하게 해결합니다.
《황금 살인자》는 디 공의 데뷔작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소설의 배경은 663년, 디 공이 처음 지방 수령으로 발령받은 시기의 첫 사건입니다. 이른 바 ‘디 공 시리즈’에서 그를 보필하는 충실한 두 부하 마중과 차오타이를 처음 만나게 되는 과정이 소개되고, 첫 수령의 임무를 맡아 다소 서툴지만 열정적으로 사건에 집중하는 초보 판관 디 공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밀실에서 독살당한 전임 수령의 살해 사건. 뒤이어 벌어지는 실종사건과 관아에서 나타나는 전임 수령의 유령. 또 다시 벌어지는 살인사건. 고구려에서 끌려온 의문의 여인 ‘유수’. 과연 작은 항구도시 펑라이에선 어떤 음모가 꾸며지고 있는 것일까요.
디런지에 시리즈는 모든 사건들이 실제 중국에 내려오던 사건 기록과 판결 등을 참고로 만들어졌습니다. 때문에 중국 역사 속의 각종 문화와 전통이 그대로 담겨있습니다. 아울러 저자는 직접 소설의 내용과 관련된 중국풍의 삽화를 그려 넣었고, 소설의 배경이 된 지역의 지도, 사건이 일어난 곳의 도면이나 사건 해결과 관련된 암호문 등을 함께 담았습니다. 덕분에 더욱 실감나게 작품에 몰입할 수 있습니다.
국내에 소개된 디 공의 활약상은 네 작품입니다. 살짝 제목이 촌스럽기는 하지만 《쇠종 살인자》《쇠못 살인자》《황금 살인자》《호수 살인자》등입니다. 56세의 나이로 저자가 사망할 때까지 디 공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을 15편이나 썼다고 하니 그의 디 공에 대한 애정을 짐작하게 합니다.
포청천과 함께 중국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디런지에의 활약을 담은 ‘중국판 셜록 홈즈’디 공 시리즈. 다소 초현실적인 장면들도 나와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오히려 중국이라는 나라의 신비함과 더해 작품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습니다. 정통 추리소설이라고 하기엔 살짝 다른 면이 있지만, 재미에 있어서만큼은 부족하지 않은 디 공 시리즈. 앞으로도 디 공의 활약을 계속 지켜보고 싶습니다. 사실 벌써 《호수 살인자》를 집어 들긴 했습니다만.
아, 한 가지 아쉬운 부분. 《황금 살인자》에는 전쟁에서 패배한 고구려에서 끌려온 포로, 노예들의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고구려 여인 유수가 창녀로 등장하고, 고구려인들이 범죄에 가담하는, 다소 불편한 장면들이 등장합니다. 고구려가 당나라에게 패배해 결국 멸망하기는 했지만, 결코 맥없이 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언급돼 그나마 위안이 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당나라 역시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얼마 못가 무너졌다는 사실. 저자도 인정하고 있었겠지요. 일독을 권합니다.
“고구려는 아름다운 나라지. 지난 전쟁 때 가 본 적이 있어.”
차오타이가 여자의 허리를 팔로 감싸 안으며 말했다.
여자가 차오타이를 밀쳐내며 경멸하는 눈으로 쏘아보았다.
차오타이는 자신이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닫고는 황급히 말했다.
“고구려인들은 정말 훌륭한 전사들이야. 할 만큼 했지만, 우리 군이 워낙 수적으로 우세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