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릴의 탄생 - 일본 서스펜스 단편집
사카치 안고 외 지음, 이진의.임상민 옮김 / 시간여행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최근 언젠가부터 일본 추리소설, 미스터리 소설이 국내에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미 어느 정도의 마니아층도 확보하고 있는 것 같고, 꽤 유명한 작품들은 베스트셀러 대열에 합류하곤 합니다.

 

저 역시 추리소설, 미스터리 소설을 즐겨 읽습니다. 물론 직업과 관련해 읽어야 할 책들이 적지 않아 자주 읽지는 못하지만, 충분히 그 매력을 알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홈즈와 뤼팽, 에르큘 포와로와 미스 마플과 친숙했으니까요.

 

《스릴의 탄생》은 현재 많이 소개되고 있는 일본 추리·미스터리 소설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일본 초기 추리·미스터리 전성시대의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모르는 작가들도 있고, 유메노 큐사쿠와 같은 유명한 작가의 작품도 함께 즐길 수 있습니다. 현재와 비교하면 다소 어설프거나 혹은 미스터리라고 부르기 애매한 작품들도 있지만, 초기 일본 추리문학의 전형을 느낄 수 있다는 매력이 있습니다.

 

우리의 근대화 과정을 심각하게 기형화시킨 일본. 하지만 정작 그들은 스스로 서구의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다양한 문화를 일찍 접했습니다. 여전히 국내 추리소설, 미스터리 분야가 협소한 상황인 것에 반해 일본은 이미 1984년에 추리·미스터리 소설 출판‘하루 한 권’시대를 열었다고 하니 부럽기도 합니다.

 

당연히 탄탄한 작가군과 독자층을 확보하며 지금의 추리 문학 분야의 저변을 다져왔겠죠. 그리고 그 결과 지금처럼 다양하고 수준높은 작품들이 많이 나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문학계는 여전히 ‘폼 잡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당최 알 수 없는 ‘순수문학’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추리나 판타지, 미스터리물은 경시하는 풍토가 있죠. 엄연한 문학의 한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물론 일본의 강점기를 거치고, 전쟁까지 겪으며 제대로 된 근대화 과정을 이행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전히 폼 잡으며 양반이 어쩌고 상놈이 어쩌고 하는 이들이 존재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하지만 문학을 비롯한 예술은 다양성이 상실되는 순간 그 존재 가치를 동시에 잃어버리는 것이 아닐까요. 순수문학이라는 이름으로 타 장르의 문학을 경시하는 어처구니없는 풍토는 이제 사라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1920~30년대 작품들이 주로 수록된 이 책은 일본 추리·미스터리 문학의 태동과 발전 과정을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아울러 근대화를 거치며 ‘공포’‘스릴’이 탄생하는 과정을 느끼게 해줍니다. 과거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을 구별하며 느꼈던 두려움과 공포에서, 이제는 같은 인간 사이에서 ‘나’와 ‘남’을 구별하며 느끼는 두려움과 공포. 바로 거기에서 스릴은 탄생하고 있습니다.

 

마을공동체를 영위하며 이웃들과 더불어 살아가던 시절엔 외부인, 혹은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인간이 아닌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철저히 개인화가 되어버린 지금은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타인들에 대한 공포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죠. 개인의 탄생과 함께 시작된 스릴의 탄생. 미스터리, 공포 소설들은 바로 거기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 구전에도 자주 등장하는 ‘인육 먹기’를 주제로 한 하야마 요시키의 〈시체를 먹는 남자〉, 판타지적 요소가 다분한 히사오 주란의 〈곤충도〉, 인간 내면의 악마성에 주목한 유메노 큐사쿠의 〈쇠망치〉,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의 미스터리 버전처럼 느껴지는 고가 사부로의 〈함정에 빠진 인간〉, 한 여인을 둘러싼 형제의 애증을 그린 와타나베 온의 〈승부〉, 정교한 트릭을 작품에 대입시키며 추리소설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사카구치 안고의 〈가면의 비밀〉과 오사카 케이키치의 〈등대귀〉에 이르기까지. 각 작품마다 가지고 있는 개성이 색다른 재미를 선사해 줍니다.

 

태어날 때부터 타인에 의존하고 타인의 그 무엇을 빼앗아야만 생존할 수 있는 인간. 때문에 인간은 본성 자체가 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근원적 물음에 앞서 다만 문학의 한 장르로, 가벼운 즐길거리로 추리·미스터리 문학은 상당한 매력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그 즐거움을 포기하기엔 아직은 이른 것 같습니다. 국내 미스터리 문학의 발전을 기원합니다. 아, 그런 의미로 계간 《미스터리》를 구입했다는.^^

 

“운명이야. 운명이라는 놈은 언제든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어. 그것이 인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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