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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 두고 온 수술가방 - 의사 오인동의 북한 방문기
오인동 지음 / 창비 / 2010년 9월
평점 :
재미통일운동가 오인동 박사. 그는 인공고관절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잘 알려져 있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정형외과 조교수와 MIT 생체공학 강사를 역임했고, 인공고관절과 관련한 미국 발명특허를 무려 11종이나 가지고 있는 최고 전문가이다.
1970년 선진 의학을 배우겠다는 생각으로 미국 유학길에 오른 그는 25년 간 정형외과의사로서 인공관절기 고안 연구와 수술법 개발에 몰두해 그 분야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분단된 조국에 눈을 돌릴 겨를은 솔직히 없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북과 특별한 인연을 맺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거창한 이념도 사상도 아닌, ‘같은 동포’라는 마음 하나 때문이었다. 같은 피를 나눈 동포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분야에서 할 수 있는 만큼 도움을 주고 싶다는 지극히 소박한 마음뿐이었다.
오 박사를 두 번이나 뵐 수 있는 영광이 있었다. 지난 해 말 이 책의 출판기념회를 위해 서울을 찾은 그를 처음 만났고, 최근 한겨레통일문화재단에서 수여하는 ‘한겨레통일문화상’을 받게 되어 서울을 찾은 그를 다시 만났다. 칠순이 넘은 연세에도 언제나 활기 넘치시는 오 박사는 한참 어린 나에게도 겸손함을 잃지 않으셨다. 진심으로 존경 받을 만한 분이란 생각을 뵐 때마다 할 수밖에 없었다.
1992년 재미한인의사회 방문단의 일원으로 평양을 처음 찾은 오 박사는 난생 처음 밟은 북녘 땅에 큰 설렘과 함께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그동안 알고 있던 북과 너무도 다른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들을 만난 것이다. ‘아, 여기도 평범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구나, 우리 동포들이 살고 있는 우리 땅이구나.’
이런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충격으로 받아들일 만큼 남쪽에서의 세뇌교육은 강력했다. 머리에 뿔 달린 빨간 괴물들이 살줄만 알았던 북녘 땅. 하지만 그곳 사람들은 지극히 순박했고, 때 묻지 않은 예전 우리들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 후 다시 민족사와 조국의 근대사, 한반도 분단의 역사를 공부하게 된 그는 자신이 지금껏 알고 있던 사실들이 얼마나 파편적이고 때로 왜곡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미국에 살고 있는 동포라는, 어쩌면 유리할 수도 있는 입장을 충분히 살려 조국의 평화와 통일에 기여하자는 결심을 하게 된다. 지극히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미국 동포사회에서 쉽지 않은 결심이었다.
이후 오 박사는 ‘Korea-2000’이라는 학술단체를 만들어 1998년 한반도 양쪽의 새로운 지도자가 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총비서에게 각각 통일정책건의서를 전달하게 된다. 물론 두 사람을 직접 만나 전달할 순 없었지만, 오 박사는 동포들의 진심어린 고언을 전달하기 위해 직접 남북을 오가며 열심히 노력했다.
이런 그의 노력 때문이었을까. 2000년 드디어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지고, 6·15공동선언이 발표된다. 마침내 통일을 향한 한반도 형제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오 박사는 멀리 이국에서나마 뜨거운 눈물과 함께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김대중·노무현 두 정부의 10년 세월동안 소중히 지켜온 남북의 화해와 협력 무드는 무지막지한 이명박 정부에 의해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다시 북녘의 동포들은 머리에 뿔 달린 괴물로 각색되고 꾸며지고 있다.
이대로 무너질 순 없었다. 오 박사는 다시 평양을 찾았다. 이번엔 재미한인의사회 일원도 ‘Korea-2000’의 일원도 아닌 ‘동포 의사’로서 찾아갔다. 그리고 북녘의 의사들과 함께 인공고관절 수술을 하며, 선진 의학을 전수해주기 시작했다.
고가의 인공관절기를 최대한 기증받아 여행 가방 가득 채우고 떠나는 그의 평양행, 하지만 돌아올 때 그의 가방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북녘 동포들에 대한 사랑과 신뢰 그리고 뜨거운 우정을 대신 담고 돌아왔다.
이렇게 2009년부터 평양을 방문해 인공고관절 수술을 가르쳐 온 오 박사는 자신의 수술가방을 평양에 두고 돌아온다. ‘곧 다시 만나자’는, ‘꼭 다시 와 달라’는 북녘 친구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다.
사실 아무리 숨기고 왜곡하고 거짓말로 꾸미려 한다 해도, 진실은 숨길 수 없다. 우리가 북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사실들이 과연 사실인지,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지만 단언컨대 우리가 알고 있는 북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에서 오랫동안 살며 오 박사가 절감한 것은 바로 이런 잘못된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역겨울 정도로 사대주의에 빠져있는 남쪽 고위 인사들의 한심함. 그는 구역질나는 장면을 여러 번 목격하고, 동시에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자주성과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북녘 동포들을 떠올렸다.
처음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오 박사에게 힘들고 어려운 모습을 감추었던 그들. 하지만 몇 번의 만남이 이어지자 그들 역시 마음을 열게 된다. 처음부터 그들이 감추고 싶은 부분만을 드러내려 하는, 그래서 상처를 주고 자존심을 짓밟으려는 이들이 바로 현 정권이었다. 비핵·개방·3000은 말 그대로 북이 발가벗고 항복하면 3000불 주겠다는 소리였다.
최근 정부의 정상회담 비밀 접촉 과정을 봐도 이러한 천박한 대북인식은 그대로 드러난다. 국민들에겐 정상회담을 위해 대가를 지불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더니, 뒤에선 몰래 돈으로 정상회담을 사려 했다. 전 정권들을 그렇게 매도하더니, 자신들이 하는 짓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생각이다. 그게 한나라당이고, 그게 이명박 정권이고, 그게 이 시대 한반도를 잡고 있는 보수 세력들의 수준이다. 천박하고 반민족적이고 사대주의에 빠져있는 한심한 먼지들 말이다.
이런 권력, 사람들이 남북관계를 파탄 내는 과정에도 오인동 박사와 같은 이들은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고 있었다. 북녘 사람들과 속 깊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남과 북의 오해를 풀려 노력했고, 서로가 더욱 가까워지도록 힘썼다.
사람은 딱 아는 만큼만 생각하게 된다. 물론 기형적 자본주의 시대에 사는 우리들은 억지로 생각을 주입받으며 살면서도, 그것이 마치 자기의 생각인양 착각하고 산다. 더럽고 짜증나는 정치 이야기는 관심도 없다며 손사래 치지만, 정작 대선이나 총선이 오면 알아서 보수를 찍는 사람들. 투표로 나라를 망치는 이들이다.
오 박사의 삶을 보면 존경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스스로 역사를 깨우치고, 민족의 미래를 고민하고, 동포들의 아픔에 눈감지 않았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헤어진 동포들이 다시 만나야 한다는 우리 민족의 지상과제를 오 박사는 단 한 시도 잊지 않았다.
최근 이명박 대통령은 통일이 도둑처럼 올 것이라 말했다. 좋은 말을 이렇게 나쁜 뜻으로 인용해도 되는가 싶다. 분노가 솟구친다. 그가 말하는 도둑처럼 오는 통일은 아마도 북의 붕괴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을 가리키는 것일 테다. 그럼 과연 현 정부는 그처럼 떠드는 흡수통일에 자신이 있나? 또 다시 죽어라 서민들에게 세금만 걷어내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오인동 박사의 평양 방문기는 한반도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라면 누구나 한 번씩은 읽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방북기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 역사와 북의 현재, 그리고 한반도의 미래까지 조심스레 담고 있기 때문이다. 꼭 읽어볼 것을 권한다. 필요한 사람들은 한 권씩 사주고 싶을 정도다.
오 박사는 다시 평양으로 떠날 것이다. 북녘 의사들에게 전달할 인공관절기를 구하는 대로 다시 떠날 것이다. 항상 건강하셔서 오래 오래 북녘 의사들과의 우정을 나누시길 바란다.
“남북관계가 극도로 나빠진 현 상태로는 정부가 교류·협력 사업이라도 다시 하려면 훨씬 크게 ‘더 퍼주어야 할’ 처지가 되었다고 봅니다. 이미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비밀접촉에서 그렇게 제안했다는 얘기도 들리더군요. 그러니 이대로 나가다가는 ‘잃어버린 10년’이라는 구호와 더불어 대북압박정책 3년여에 ‘중국에 잃어버린 북 5년’이 될 처지입니다. ‘화해협력 7년’으로 북과 동행하게 되었는데, ‘강압대결 3년여’에 한 푼 못 건지고 다 잃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G-20, 핵안보정상회의 등 ‘허장성세 행사 5년은 북 잃은 5년’이 될까 두렵습니다. ‘한미찰떡공조’와 ‘한중 갈등고조’를 잘 조율해야 할 일이며, 관계 단절로 ‘한반도의 섬 아닌 섬’ 남쪽의 대륙 진출 활로도 찾아야 합니다. ‘천안함 폭침 맞고 스텔스 무기 사고’ ‘연평도 쑥밭 되어 미사일 방어체계’하고, ‘국방개혁 307’해서 국방비 늘인다고 합니다. 65만 국군에 300억 달러 쓰고도 110만 인민군에 50억 달러 쓰는 북을 제어 못한다는데, 500억 달러를 쓰면 할 수 있을까요? 핵과 미사일의 비대칭 군사력에 대항해 ‘남핵 해야 한다’는 소리도 들리는데, 혈맹 미국이 들어 주려는지요? 가장 확실한 안보는 군비확충이 아니고 평화체제 구축입니다.”
아,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다. 이번 6·15공동선언 11주년에 한 보수단체가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벌인 웃지 못 할 퍼포먼스가 떠오른다. 분명 어디에서 ‘구입했거나 얻었을 미제 군복’을 입은 채, ‘6·15공동선언 폐기’를 주장하며, 그들은 선언문을 인쇄한 현수막을 찢고 불태웠다. 그들은 오인동 박사와 같은 연배로 보였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한다. 그것이 증오이든, 사랑이든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다 같을 것이다. 모두 존중하자. 모두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하나 더, 오인동 박사의 마지막 당부 역시 함께 가슴에 담자. 일단 그거면 됐다.
“남과 북, 모두 병든 다리를 갖고 있습니다. 다리 치료하는 이 정형외과의사의 말입니다. 한 발로 서자니 불안정하고 자신이 없습니다. 남과 북이 한 발씩 균형을 이루어서면 모국의 앞날이 창창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