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체르노빌의 아이들 (양장) - 히로세 다카시 반핵평화소설, 개역개정판
히로세 다카시 지음, 육후연 옮김 / 프로메테우스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1986년 4월 26일 새벽 1시 30분. 우크라이나 체르노빌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그리고 그 진실은 끝내 모두 밝혀졌을까. 청정 무공해 에너지라 칭송해마지않는 원자력. 과연 원자력은 인류에게 구원인가, 재앙인가.
우리는 얼마 전 일본에서 벌어진 사상 최악의 재앙을 목격했다. 센다이 지방을 강타한 쓰나미와 후쿠오카 원전 누출 사고는 인류가 만들어낸 핵에너지가 어떠한 재앙을 가져오는지를 똑똑히 보여줬다.
1인 대안언론이라고 불리는 히로세 다카시는 20년 전부터 이러한 원자력이 가져올 재앙을 경고해왔다. 반핵평화소설의 상징이라 불리는 이 책은 바로 그러한 히로세의 경고 메시지에 다름 아니다.
평화롭던 체르노빌에서 어느 날 갑자기 밀어닥친 재앙. 이반의 가족이 겪은 비극은 비단 남의 이야기가 될 수 없다. 좁디좁은 한반도에 얼마나 많은 원자력 발전소가 있고, 또 얼마나 많은 핵이 존재하고 있는지 깨닫는다면 말이다.
히로세 다카시는 정부가 주장하는 원자력 발전소 추진책이 세간에서 흔히 선전하는 에너지 부족의 문제가 아니라, 독점 자본의 이익과 결부된 문제라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굳이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서라도 인류의 지혜를 모은다면 충분히 대체 가능한 에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사실 정부는 원자력 발전소의 위험률이 상당히 낮다고 선전해왔다. 발전소 1기당 사고의 위험성은 2만 년에 한 번이라고 선전한다. 하지만 전 세계의 발전소가 2천기가 넘는다면? 그것은 계산상 10년에 한 번 꼴로 사고가 일어나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는 소리다. 그리고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전 세계엔 무수히 많은 원자력 발전소가 세워져 있다. 우리나라에도 21기의 원자력 발전소가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전 세계 어는 나라를 봐도 원자력이 청정에너지라거나, 친환경적이라 떠드는 나라는 없다. 다만 한국뿐이다. 원자력은 그 엄청난 위험성으로 인해 점차 그 수를 줄여나가야 하는 입장에 놓여있다. 하지만 역시 우리나라는 해가 갈수록 그 숫자를 늘려나간다는 방침이다. 물론 후쿠오카 원전 사태로 인해 잠시 주춤거리는 모습을 보이지만, 원자력 발전소와 관련된 무수히 많은 이익집단들이 호락호락하게 자신들의 이권을 포기할 것 같지는 않다.
재난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일들이 이웃나라에서 현실로 나타났다. 원자력 발전은 인간이 누려야 할 것들을 넘어서 누리기 시작했을 때 어떠한 결과가 나타날 수 있는지를 현실로 보여주는 ‘살아있는 핵폭탄’과 같다. 철저한 조사와 사후대책을 마련해 둔다 해도 100% 안전을 담보할 수 없는 물질이다. 그것은 자연이 만들어낸 것이 아닌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오만함은 결국 그에 따른 대가를 가져오게 된다. 우리는 언제나 겸손하고 또한 성찰하는 자세를 잊어서는 안 된다. 자연을 이기려는 오만함은 결국 재앙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지금도 체르노빌의 구체적 피해는 집계되지 않고 있다. 후쿠오카의 재앙 역시 복구와 원상태 회복에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물론 한반도에 끼치는 영향도 100% 안전하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
저자는 책을 통해 어른들이 무책임하게 만들어놓은 재앙을 거부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반대하라고 말한다. 안전하다는, 청정한 에너지라는 거짓말에 속지 말고, 스스로의 생존과 안전을 위해 나서라 말하고 있다. 사실 어른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어린 친구들이 ‘잘 모를 것’이라는 것이다. 모르긴!
이 책은 단순한 소설로 볼 수 없다. 실재 일어난 비극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엔 그 어떤 꾸밈이나 과장도 없다. 다만 이 비극이 왜 일어나야 하고, 왜 죄 없는 이들이 죽어야 하는지 생각게 할 뿐이다.
두말하면 입이 아프지만, 자연은 소중하고 지구는 재활용이 되지 않는다. 정신 차리지 않고 나댄다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권리는 결국 ‘죽을 수 있는 권리’만 남을 것이다. 그것도 크다 큰 고통을 겪으면서 말이다. 여기엔 부자와 가난한 자, 권력이 있는 자와 없는 자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조금의 시간차는 있을지 몰라도 말이다.
체르노빌의 아이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 더 이상 반복되어선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