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 후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7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윤상인 옮김 / 민음사 / 2003년 9월
평점 :
그동안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 중 《도련님》과 《마음》을 읽었습니다. 《그 후》는 《산시로》로 시작해 《문》으로 끝나는 ‘나쓰메 전기 3부작’ 중 가운데 해당하는 작품입니다.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을 상당히 지루하거나, 혹은 쓸데없이 장황스럽다고 느끼는 이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너무 세세하게 이야기를 진행시킨다는 것이지요. 뭐랄까, 아무튼 그의 작품이 현대적 감각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제가 지금까지 읽는 세 편의 작품 중 지루하거나, 장황스럽다고 느낀 것은 단 한 작품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감탄과 감탄의 연속이었다고 하면 너무 뻔한 이야기일까요? 인물의 심리 상태에 대한 묘사는 그야말로 탁월하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나쓰메 소세키는 일본의 수박 겉핥기식의 근대화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 입장을 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근대화야말로 ‘근대 일본의 비극’이라는 것이지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걸어온 길을 보면 그의 판단이 크게 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잘못된 일본의 근대화가 가져온 파장은 비단 일본 한 국가로 끝나지 않았죠. 수많은 동아시아 구성원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영국 유학시절 검은 연기를 마구 뿜어내는 공장 굴뚝의 연기를 바라보며 나쓰메는 ‘근대’의 모순 그리고 어둠을 느끼게 됩니다. 그 느낌이 《그 후》의 주인공 다이스케에서 반복되는 것은 어쩜 당연한 것일 수 있겠습니다. 근대적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이는 단순한 과정이 근대화가 아니라 그것이 가져다 줄 정신적 변화에 주목하고 진지하게 성찰할 수 있는 경지. 나쓰메는 바로 그것을 원한 것은 아닐까요.
나쓰메의 소설은 또한 인간의 원죄의식을 집요하게 탐구합니다. 지금 우리가 보기엔 심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철저한 금욕주의가 엿보입니다. 젊은 시절 친구의 여인을 가로챘다는 죄책감에 결국 유서를 쓰고 자살하고 마는 《마음》은 그 대표적 경우입니다. 《그 후》 역시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친구의 부인을 사랑하는 주인공의 심적 괴로움과 고통이 절절히 느껴집니다. 결국 친구와 절교를 각오하고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순간, 파국은 예고된 것일지 모릅니다.
저자가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쓰메의 작품은, 특히 《마음》과 같은 것은 일본 근대 문학사의 최대 정전으로 평가되며 각급 교육 현장에서 읽히고 있다고 하니, 일본의 국가주의에 한 몫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금욕적 정신주의가 서양의 퇴폐적 문화와 다른 일본의 문화라는 이데올로기적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이죠. 과연 나쓰메가 그것을 바랐을까 궁금하긴 합니다.
일본이 나쓰메의 작품을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이용하고 있는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작품들이 저평가될 필요는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저자의 진정한 의도를 찾아가는 여정이 더욱 즐거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나쓰메의 작품들은 하나하나 모두 충분히 다양한 사고와 평가를 가능하게 합니다. 그게 바로 그의 작품의 매력일 것입니다.
아직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읽지 못했습니다. 이제 3권의 작품을 읽은 입장에서 그의 작품세계나 주제, 의식을 평가할 깜냥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 ‘지루하다’는 딱지를 붙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문학 작품을 좋아하고 혹은 직접 소설을 쓰고자 하는 이들에게 나쓰메는 충분히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그의 책들을 많은 기대를 가지고 읽어나갈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