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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 여럿이 함께 숲으로 가는 길 ㅣ 서울대학교 관악초청강연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신영복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0년 12월
평점 :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충격, 그것은 바로 선생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은 후였다. 이 시대의 양심과 정의가 사라졌다고, 이제 남은 것은 저주의 굿판뿐이라고 생각했던 그 때. 선생님의 글은 충격과 전율 그 자체였다.
어떤 고난의 끝에서도 결코 숨길 수 없는 인간의 희망. 차디찬 감방에서 보낸 20년이란 세월은 인간 신영복을 ‘더불어 살아가는 숲’으로 변화시켰다. 그리고 그가 우리 곁에 돌아왔을 때, 우리들은 ‘손잡고 함께 가는 길’을 느끼게 되었다. 축복이었다.
책은 서울대학교의 ‘관악초청강연’에서 선생님의 말씀과 참가 패널들의 질문, 대학생들의 질의응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단순히 강연의 녹취를 푼 것에 지나지 않지만, 강사가 누구냐에 따라 이런 단순한 작업도 큰 여운을 남길 수 있음을 느꼈다.
다만 아쉬웠던 점은 패널로 참여한 서울대 교수들의 질문들이었다. 자신들의 지식과 교만을 하나라도 더 내세우고 싶어 안달난 사람들의 질문은 읽기 거북했다. 만약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참 한심했겠다 싶다. 하지만 덕분에 느낀 것도 있다. 바로 ‘우문현답’이다. 선생님은 역시 그들보다 더 넓은 분이셨다.
책을 읽기 전 선생님과 저녁 식사를 함께 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을 가졌다. 일하고 있는 잡지사의 편집위원장을 오래 맡아주셨는데, 본인께서는 정작 도와준 게 없다고 하시며 ‘한 턱’내신 자리였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뵙게 되어 영광”이라는 말을 정말 진심을 담아했던 것이 처음이지 않았나 싶을 정도였다. 정말 뵙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다. 선생님께서는 겸손함과 날카로움, 인자함과 배려를 모두 가지고 있는 분이었다. 연신 자신은 잘 모른다고, 젊은 후배들이 잘 가르쳐 달라 하시는 모습은 흔히 제 잘난 맛에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이들과 너무 비교되었다.
하지만 선생님의 말씀은 하나같이 소중한 것들이었다. 오랜 시간동안 성찰과 고뇌를 통해야만 얻을 수 있는 지혜가 담긴 말씀들이었다. 지난 과거에 대한 평가도, 현재의 진단도 또 미래에 대한 전망 역시 날카로움과 또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담겨있었다.
당신은 약주를 많이 안 하심에도 함께 한 이들을 위해 손수 술잔을 채워주시는 모습, 물론 나 역시 선생님이 따라주시는 술잔을 받는 호사를 누렸다. 그 모습은 평범한 이웃 할아버지와 다름없었다.
강연을 통해 선생님은 “변화를 숲의 의미로 받아들인다”고 하셨다. 나무가 숲속에 서듯이 변화는 숲을 이룸으로써 완성된다는 것이다. 낙락장송이나 명목이 나무의 최고 형태가 아니라 나무의 완성은 숲이라는 것. 개인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들의 관계 속에 설 때 비로소 개인이 완성되는 것이다.
선생님이 서명해주신 책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과연 난 어떤 나무가 되려 했는지 생각해본다. 더불어 함께 숲을 만들려 했는지, 천둥벌거숭이처럼 혼자 잘났다고 떠들고 다닌 것은 아닌지. 혹은 오만과 아집으로 숲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홀로 서 있었던 것은 아닌지.
세상엔 숲을 통째로 가지려는 이들은 많지만, 그 숲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가꾸려는 사람, 그 숲과 함께 햇살을 받으려는 이들은 적다. 저마다 나무가 되기도 전에, 숲을 꿈꾸거나 혹은 숲 자체를 없애려고만 한다.
이제 강원도지사를 비롯한 재보궐 선거가 치러진다. 유권자들이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은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바람의 표현일 것이다. 그러한 마땅하고 존중받아야 할 바람이 더러운 이들의 욕망에 이용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모든 것은 흐르게 되어 있다고. 아무리 거짓과 위선과 오만으로 가리려 해도, 막으려 해도, 모든 것은 흘러가게 되어있다. 엄기영 후보가 그 진리를 하루 빨리 깨닫기만을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