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세상의 아이들 - 세계화 시대의 야만, 어린이 노동
제레미 시브룩 지음, 김윤창 옮김 / 산눈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세계화 시대의 야만, 어린이 노동’이란 부제가 아프게 합니다. 희망차게 시작해야 할 새해 벽두부터 왜 이리 우울한 책을 읽느냐 물으면 솔직히 할 말이 없습니다. 오래전 사 놓은 책이지만, 여태껏 고이 숨겨두기만 했던 것을 왜 이제야 읽었는지도 사실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의 노동 그 자체로도 사실 너무나 복잡하고 심오한 논쟁들이 이어집니다. 노동 자체에 대한 정의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복잡해지고 어려워지는 것만 같습니다. 하물며 어린이의 노동은 어떨까요. 그동안 극히 일부분의 진실만을 가지고 분노해왔던 제게 책은 또 다른 눈을 심어 주었습니다.

 

저자는 성실함과 균형 잡힌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국제적 어린이 노동 착취를 연구해 왔습니다. 예전에 어린이 노동과 관련해 읽었던 책의 기억을 떠올리자면 낙타 경주를 위해 납치당하는 저개발 국가들의 4살~5살 아이들이 생각납니다. 무섭게 달리는 낙타에서 떨어져, 또 다른 낙타에게 밟혀 죽거나 영영 불구가 되어버리는 아이들. 단지 유흥과 도박을 위해 벌이는 어른들의 게임에 소모품으로 사용되는 아이들. 그 믿을 수 없는 비참함에 치를 떨었던 기억.

 

저자는 세계 최빈국으로 알려진 방글라데시를 심층적으로 조사함으로써 서구 세계, 국제사회의 건방지고도 무지한 주장을 깨뜨립니다. 즉 가난한 나라가 서구의 성장 개발 모델을 따라온다면 자연스럽게 어린이 착취나 노동, 성매매 등이 사라질 것이라는 믿음 말입니다. 저자는 자국인 영국의 산업 혁명기를 현재의 방글라데시와 비교합니다.

 

놀라울 정도입니다. 당시 영국 빈민가의 아이들이 당해야 했던 착취와 폭압적 노동, 그리고 어이없는 죽음이 바로 지금 방글라데시를 비롯한 제3세계 아이들에게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습니다. 아울러 선진국들의 오만방자한 논리와 충돌하고 있는 제3세계 국가들의 경제 성장 욕구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다른 세상의 아이들이라고 생각하는 그들은 정작 선진국이 이미 잊었거나 잊으려 애쓰는 바로 그들의 과거 아이들일 따름이라고. 지금의 서구 사회가 노예와 식민지와 어린이를 밟고 부를 축적한 것처럼, 오늘날 서구가 가진 풍요의 한쪽은 가난한 아이들의 어깨를 밟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라고 말합니다.

 

하루에 미화 20센트도 안 되는 돈을 가지고 기아 상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세계와 그 눈부신 부의 창출능력과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는 시장기능이 가진 수치스런 모습이다.

 

세계무역기구는 그 어느 국가도 어린이 노동과 죄수 노동, 예속 노동을 비롯하여 현대 세계에 잔존하는 노예제도의 교묘한 변형들 일체를 이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증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제3세계 정부들은 그런 움직임에 격렬히 반발했다. 그 안에서 서구의 사악한 보호주의-서구가 부의 수단으로 삼았던 그 다양한 인간학대를 그들은 이용하지 못하게 하려는 강대국들의 의도-를 보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협상은 신랄한 언사들이 오가는 가운데 결렬되었다.

 

중산층은 ‘인구’가 많다고 불평이지만, 빈민층 가족들이 과로와 영양불량, 질병으로 얼마나 쉽사리 격감하는지는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혈육의 재생과 그들의 노동 능력은 절대 빈곤에 맞서는 유일한 방어책이다. 인구가 많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빈민층의 목숨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사회보장이야말로 가족의 규모를 줄이는 대신 그 자녀들의 생존을 보증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임을 안다. 그러나 세계화라는 사전에는 사회보장이 시장 간섭이라고 적혀 있다.

 

러시아 농노들이 해방되고 미국 노예들이 자유를 얻었을 때보다 오늘날 오히려 세계적으로 더 많은 노예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부의 창출이 온 인류에게 자유를 가져다주리라는 믿음은 확실히 비현실적이고 근거 없는 희망사항이다.

 

가난의 지긋지긋한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일까요? 하루 종일 뼈가 부서지도록 일해야 겨우 밥을 먹을 수 있고, 늙고 병든 부모에게 얼마의 돈을 보낼 수 있습니다. 육체는 병들어가고 영혼은 침침해집니다. 이 모든 것을 그 나라가 가지고 있는 경제적 낙후, 무능력으로 돌릴 수 있을까요?

 

아니면 오직 교육이 살 길이라는 위선적인 이야기를 또 다시 꺼내야 할까요? 여기에 대해선 방글라데시의 한 어린이의 대답이 모든 것을 다 말해줍니다. “교육은 미래에 대한 약속이지만 빈민층에게 미래란 사치에 지나지 않는다. 당장 벌지 않고는 결코 그 미래에 다다를 수 없기 때문이다.”

 

제3세계 아이들의 노동 착취를 근절하겠다고, 거대 다국적기업을 압박해, 결국 그들이 아이들에게 더 이상 일자리를 제공해주지 않게 되었을 때, 때문에 더 많은 아이들이 가난으로, 범죄로, 굶주림으로 내몰렸지만, 소위 진보적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이들은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의 미래보다는 자신들의 과거를 떠오르게 하는 불편함을 없애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저자는 말합니다. 문화적 다원주의라는 이름으로 어린이에 대한 폭력과 착취를 인정해서도 안 되고, 서구적인 가치들을 보편화 하기위해 어린아이들이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을 근절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서도 안 된다고. 물론 그 균형을 맞추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 되겠지만 말이죠.

 

그 어떤 전쟁보다 무서운 시장 경제, 오직 돈만이 신이 될 수 있는 지금. 우리는 어떻게 아이들의 죽음 같은 노동을 멈추게 할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아니, 어쩌면 희미하게나마 그 답을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내가 가진 그 하찮은 무엇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루 종일 땡볕에 쭈그리고 앉아, 벽돌을 깨는 아이들. 그렇게 받는 돈 500원, 혹은 그 이하. 인간의 존엄을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이 있다면, 만약 그 인간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한다면. 우리는 보다 많은 생명을, 어린이들을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음과도 같은 계층 간 격차, 빈부의 까마득한 차이를 줄여나갈 수 있는 방법. 더 이상 모른 척 할 순 없습니다.

 

1820년대에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와 가장 가난한 국가의 생활수준 비율은 대략 3대 1이었다. 그러다가 1913년에는 10대 1로 뛰었고, 1950년대에는 35대 1에 달했다. 1990년대 말에 가장 부유한 G-7 국가들은 가장 가난한 사헬 지역(사하라 사막 남쪽 지역) 국가들보다 70배 이상 부유했다.

 

과연 지금은 몇 배일까요? 두렵고 죄스러운 세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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