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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트의 정치학
손민정 지음 / 음악세계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가수 태진아의 〈옥경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미국 이민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태진아가 처음 선보인 재기곡이었죠. 그 노래가 한창 유행할 때 저는 초등학생이었습니다. 당시 박남정과 소방차 등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습니다만, 전 이상하게 이 노래가 좋았습니다. 그래서 학교 행사를 맞아 버스를 타고 놀러 갈 때면, 전 자의 반 타의 반 버스 앞에 나와 율동을 곁들여 이 노래를 부르곤 했답니다. 나이도 어린놈이 감히 트로트를 뭘 안다고 말이죠.
그렇습니다. 제가 로큰롤을 좋아하고 헤비메틀에 열광한 ‘락앤롤 정키’였지만, 트로트 역시 즐겨 부르던 장르 중 하나였다는 말이죠. 수많은 명곡들이 있지만, 전 나훈아, 조용필 등을 좋아했고, 옛 노래들. 그러니까 김정구 선생님이나 현인 선생님의 노래들도 좋아했습니다. 완전 애 늙은이였죠?
신형원 님의 ‘서울에서 평양까지’는 특히 좋아했던 노래입니다. 가사도 정말 예술이었고, 멜로디 역시 흥겨우면서도 왠지 비장함이 묻어있었습니다. 분단된 이 땅을 마음껏 돌아보고픈 마음이 절실히 담겨있는 노래입니다.
책은 흔히 우리가 ‘뽕짝’이라고 폄하하는 트로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일제시대 이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트로트가 어떻게 발전해왔고, 트로트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지, 특히 서민들에게 트로트는 무엇이었는지 친절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음악인류학을 공부하는 분입니다. 때문에 어설픈 가치 판단이나 독단적 규정이 낄 자리가 없습니다. 가장 큰 미덕이자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트로트를 일본 엔카의 아류쯤으로 여기곤 합니다. 하지만, 책을 통해 분명 트로트는 우리만의 정서를 가지고 있는 우리의 음악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비록 엔카의 특징과 겹치는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해도 우리는 그저 엔카를 흉내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음악으로 다시 만들어낸 것이죠. 아울러 엔카의 유래 역시 따지고 보면 우리와 그리 관계는 없어 보입니다. 트로트는 우리의 음악이라고 자부해도 될 듯합니다.
가요무대, 전국노래자랑 같은 장수한 프로들을 보면 여지없이 트로트가 등장합니다. 아울러 어느 정도 나이를 먹었다고 스스로 느끼게 된 이들은 트로트 한 두 곡쯤은 레퍼토리에 반드시 들어갑니다. 술에 적당히 취해 사람들과 쳐들어간 노래방에서 역시나 흥을 돋우는 것은 신나는 트로트 한 자락입니다. 사람들은 노래에 취하고 눈물에 취합니다.
우리네 서민들과 함께 해 온 트로트. 가난과 설움의 시절을 함께 해 온 트로트. 전 그런 트로트를 한 번도 폄하한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역시 저도 별수 없었나요. 트로트가 한 물 간 장르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건방지죠. 사실 트로트는 단 한 번도 우리 곁을 떠난 적이 없었는데요. 책을 읽다 인상적인 문장들이 여럿 나왔습니다. “트로트는 흘러간 노래가 아니라 함께 흘러온 노래”라는 이야기. 그런 것 같습니다. 선술집이나 포장마차에서 슬그머니 취한 어느 나그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트로트 한 가락. 그 속에는 그이의 지나온 팍팍했던 삶이 묻어나옵니다.
저자는 수많은 현장 연구를 통해 글을 튼실하게 만들어나갔습니다. 많은 트로트 음악 종사자들을 만나고, 트로트에 여전히 애정을 가지고 있는 많은 팬들을 만납니다. 그 중 한 무명 트로트 가수의 이야기가 감동적입니다. 왜 트로트 가수는 ‘반짝이’ 옷을 입고 나와야만 하는가에 대한 대답이었습니다.
“반짝이 의상을 입지 않으면 안 되나요?”
“이런 의상은 내가 좋고 싫은 것과는 상관없어. 트로트에 대한 일종의 예의라고 할 수 있지. 티셔츠나 청바지를 입고 무대에 서는 것은 어르신들에 대한 예의가 아냐. 적어도 당신들을 위해 이렇게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트로트 가수의 기본자세라 할 수 있지.”
책을 통해 많은 사실들도 알게 됐습니다. 하춘화와 주현미가 얼마나 일찍 데뷔를 했는지, 전설적인 가수 배호는 왜 그리 인기가 있었는지, 조용필의 존재감은 어떤 것인지, 남진과 나훈아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모두 흥미로운 것들이었습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남대문 시장 좌판에서, 시골 장터에 한 복판 엿장수의 흥겨운 무대에서, 우리는 트로트를 만날 수 있습니다. 힘들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모든 우리 이웃들에게 오랫동안 힘이 되어준 트로트. 걸그룹이 대세를 장악하고, 몸짱 가수들이 노래를 부르는지, 몸자랑을 하는지 모르는 이 시대에서도, 트로트는 반드시 살아남으리라 믿습니다. 아니 더더욱 그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못 믿겠다고요?
“오빠 한 번 믿어봐~!!^^”
음악은 한 개인의 예술 작품이기도 하지만,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문화 현상이기도 하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음악은 많지만 우리에게 의미 있는 음악으로 남는 것은 한정적이며, 그 의미는 타인이 아닌 우리 스스로 만들어간다. 우리가 살아가며 음악에 부여하는 의미와 가치는 다음 아닌 힘없는 ‘우리가’ 만든다는 것이다.
미국의 컨트리 뮤직, 일본의 엔카, 터키의 아라베스크, 이스라엘의 무지카 미즈라히 등 다양한 서민의 노래에는 의미심장한 철학적 의미와 아름다움이 있으며, 그것은 바로 노래와 그 노래를 사랑한 사람들의 치열한 투쟁이 뒤엉켜 형성된 것이다. 서민은 일상적인 노래를 통해 세상을 읽으려 하고 이해하려 하며, 계속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해나간다. 그래서 서민의 음악은 사람들에게 느낌뿐만이 아니라 생각하게도 만든다. 가슴속에 파고드는 감동이라는 것은 느낌과 생각 그 어떤 것 하나라도 홀대하게 된다면 존재하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