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없는 사회의 교육
이계삼 지음 / 녹색평론사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얼마 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1주기를 맞았습니다. 여기에 맞추어 그분의 자서전도 함께 출간됐지요. 방대한 분량이지만 조금씩 아껴가며 읽고 있습니다.

 

기사를 쓰기 위해 자서전을 대필한 분을 인터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언론계 대 선배님 뻘이었죠.

 

그분은 김 대통령의 마지막 눈물을 이야기했습니다. 자서전의 집필위원 임명장을 받으러 간 날이었죠. 대통령은 이렇게 말씀했다고 합니다.

 

“다들 나보고 그냥 조용히 살지 왜 굳이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고 돌아 다니냐고 한다. 하지만 나라도 나서야 한다. 이렇게 어려운 세상에 내가 비록 늙고 병들었지만, 아무 힘도 없지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나. 민주화를 위해 돌아가신 수많은 의사, 열사들이 지하에서 울고 있지 않나. 어찌 내가 가만히 앉아있을 수 있겠나.”

 

이 말씀을 하시며 대통령은 눈물을 흘리셨다고 합니다. 평생을 싸워온 투사의 이미지도 그날엔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만 진정 사람들을 걱정하고 염려했던 노 정치인, 한 인간의 모습만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나흘 뒤 대통령은 입원하셨고, 5일 뒤 서거하셨습니다.

 

2009년 6월 11일, 김 대통령은 마지막 연설을 했습니다. 6·15 공동선언 기념 행사였습니다. 당시 대통령은 이미 물 한 잔을 스스로 들 수도 없을 정도로 기력이 쇠약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분은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다”

대통령의 최후의 절규였습니다.

 

이계삼 선생님의 책을 읽으며 처음 들었던 마음은 한없는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처럼 스스로 평균 이상의 양심을 가지고 살고 있다고 믿어왔던 제가, 사실은 애써 고통과 눈물과 아픔을 외면하며 살아온 것은 아닌지, 스스로 되물었습니다.

 

타인의 눈물이,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본다는 것 자체가 저에겐 너무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힘들지, 얼마나 아플지 알면서도, 그야말로 푼돈을 후원금이나 회비로 내는 것으로 현실을 회피하려 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 돈에 대한 광기, 섹스에 대한 변태적 집착만이 남은 사회. 소외된 이웃들의 가슴 아픈 사연보다는 연예인의 화보 사진이 더 많은 화제가 되고, 인터넷 포털에는 온갖 연예인들의 사생활이 검색 1순위가 되는 시대.

 

이런 세상에 도무지 희망이란 단어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부러 외면하고 부러 눈 감고, 모른 척 하려 했습니다. 스스로 너무 많은 눈물을 흘려, 스스로의 나약함과 무력함이 너무도 보기 싫어, 그렇게 허망하게 살아왔습니다.

 

술잔을 기울이며 이명박 정권의 오만방자한, 경악할 만한 작태들을 아무리 이야기해도, 결국 “어찌할 수 없다”는 자괴감과 난감함이 돌아올 것임을, 너무나 잘 알기에, 전 그렇게 비겁하게 숨어 살았습니다.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은, 몸조차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그 몸을 불살라 사람들에게 호소했습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당 정치인 그 누구도, 양심적 지식인 그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않으려 했던 침묵의 시간에, 그는 그렇게 외쳤던 것입니다.

 

미쳐버린 세상에 대한 열패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는 사람들, 눈물이 사리지고 욕망과 탐욕만이 숭배 받는 시대에, 전 모두지 설 자리를 몰랐습니다. 그리고 슬픈 것이 너무도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권정생 선생님의 말씀이 다시 와 닿았습니다. 책을 읽다 눈에 번쩍 들어온 글이었습니다.

 

“행복이라는 환상을 떨쳐버리지 않는 한 인간은 불행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행복하다는 사람, 잘산다는 인간들, 선진국, 경제대국, 이런 것 모두 야만족의 집단이지 어디 사람다운 사람 있습니까. 어쨌든 저는 앞으로도 슬픈 동화만 쓰겠습니다. 눈물이 없다면 이 세상 살아갈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눈물의 소중함을 잊고, 마냥 외면만 해 온 제 자신이 너무도 부끄러웠습니다. 이 아름다운 세상을 미쳐버리게 만든 인간이 바로 나와 같은 종이라는 사실에 부끄러워만 했습니다. 짐짓 고상한 척 뒷짐을 지고 물러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행동하지 않았던 ‘악의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희망을 찾아야겠습니다. 더 이상 최악일 수 없는 세상이라도, 희망을 찾아야겠습니다.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아프고, 서럽고, 고통스럽겠지만, 눈을 부릅뜨고 다시 세상을 바라봐야겠습니다. 미디어가 전해주는 쓰레기 같은 뉴스들이 아닌, 시스템이 강요하는 비인간적 돈 놀음이 아닌, 제 ‘눈과 양심’으로 다시 세상에 맞서겠습니다.

 

저 하나 따위야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겠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저도 살아야겠습니다. 죽음과도 같은 수치와 모욕 대신, 더 어렵고 힘들더라도 사람의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저는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계삼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언제고 인연이 닿는다면 찾아뵙고 인사드리겠습니다. 지금처럼 아이들을 아끼고 사랑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더욱 더 좋은 글과 행동으로 어리석은 저에게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서럽지만 아름답게, 당당하게 살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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