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박정희 특가 세트
시대의창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18년. 긴 시간이다. 한 생명이 태어나 청년으로 성장하는 시간. 강산이 거의 두 번 바뀌고, 요즘 같이 정신없이 빠른 시대에는 그 몇 배로 강산이 바뀔 수 있는 시간. 하긴 요즘 강산이라는 것이 온전히 남아 있을 수 있기는 한 지 궁금하지만 말이다.

 

그 긴 시간동안 대한민국은 오직 단 한 사람에 의해 작동되었다. 그의 말에 수많은 이들이 생명을 잃었고, 그의 눈짓에 수많은 여성들은 노리개로 전락했다. 물론 그 반대도 있었다. 그의 묵인 혹은 동조 하에 적지 않은 이들이 배를 채웠으며, 그 부를 대를 이어 물려주었다.

 

박정희. 그는 대한민국 자체였고, 지금도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거대한 그림자이다. 부인하고 싶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그의 딸은 여전히 한국 정치의 핵심 세력으로 건재하고, 그가 죽은 지 30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도, 그를 온전히 비판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해외 토픽에 나올 일이다. 박근혜가 정치가로 계속 건재한 것은. 다른 국가도 이런 사례가 있을까. 지독한 독재자의 딸이 거대 정당의 대표가 되어버리는 것이.

 

그의 영광스러운 길을 답습한 신군부는 “다시는 이 땅에 나와 같은 불행한 군인이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는 박정희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후 다시금 총칼로 대한민국을 지배했으며, 대통령이란 자리를 친구에게 물려주는 눈물겨운 우정을 보여줬다. 그렇게 박정희는 살아 꿈틀거리고 있었다.

 

박정희는 서울대생이 뽑은 가장 복제하고 싶은 인물 1위로 뽑힌 바 있고, 여전히 많은 이들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기억하고 그리워한다. 서울대는 역시 무개념 집합소. 노인들은 그의 딸 손을 잡으며 눈물을 흘린다. 그 아들의 방탕한 생활이 정당화된다. 대한민국 경제 발전의 모든 공은 그에게 있으며, 그는 조국 근대화의 살아있는 신화다.

 

내가 그와 같은 하늘 아래에서 숨을 쉰 것은 사실 3년이 채 안 된다. 그렇다. 그는 내가 3살이 된 해에 심복에게 살해당했다. 평생 근면함이 몸에 배어 청와대에서 에어컨을 끄고 파리채를 휘두르며 파리를 잡았다는 그, 구멍 난 속옷과 다 헤어진 혁대를 보고 그가 대통령인 줄 몰랐다는 사고 당시의 의사, 농부들과 들판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며 웃었던 그는, 그러나 젊은 여대생의 접대를 받고 여가수의 노래를 들으며 양주잔을 기울이다 그렇게 죽었다. 참고로 박정희는 김대중과의 대선(1971년) 당시 그해 국가예산의 10%가 넘는 액수를 선거자금으로 뿌린 바 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출세하겠다’는 일념으로 일본의 충실한 황민이 되기 위해 군대에 들어간 그, 독립군을 때려잡는 만주군으로, 박정희가 아닌 다카키 마사오로 살고 싶었던 그는, 일제의 패망으로 다시 추락한다. 이후 자신이 몸담았던 남로당의 조직을 모조리 불어버린 대가를 목숨을 건진 그. 그와 함께 일본에 충성을 바쳤던 선배, 친구들의 도움으로, 그리고 6·25전쟁이란 구원으로 다시금 권력의 곁에 다가가게 된다.

 

그리고 5·16 군사쿠데타. 이승만의 독재를 학생들의 피로 끝장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대한민국은 다시금, 민주주의가 밟히는 역사의 반복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18년의 시간 동안 그는 경제성장과 독재자, 검소한 대통령과 부정축재와 정경유착의 근원, 새마을의 신화와 IMF의 시초라는 극단적인 평가를 동시에 받는 인물이 되어 우리의 기억을 혼란스럽게 한다.

 

박정희가 일생동안 라이벌 의식을 느끼고, 콤플렉스를 느끼고, 심지어 죽여 버리려 한 인물이 바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교통사고를 위장한 첫 번째 살해 시도는 김대중 대통령을 평생 ‘절뚝발이’로 만들었고, 일본에서의 납치사건 역시 미국의 개입이 없었다면 성공할 뻔 했다. 그렇게 박정희는 김대중을 미워했다. 왜 그랬을까.

 

자신과는 너무 다른 인생을 살았고, 너무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김대중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돈과 권력, 폭력과 협박으로 모든 이들을 굴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 믿었지만, 정작 인간 김대중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은 오직 출세를 위해 일본에게 충성을 바쳤지만, 김대중은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해 국민들에게 온 마음을 다 바쳤기 때문이다. 그 결정적 차이가 그로 하여금 김대중을 일생동안 미워하게 만든 것이다.

 

얼마 전 마침내 김대중 대통령의 자서전이 출간됐다.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크다. 김 대통령의 삶 자체가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와 같았고, 또한 그 스스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냈으니 말이다. 그에 비해 박정희에게 쏟아지는 “조국 근대화와 경제 성장의 화신”이란 수식어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다.

 

김대중 대통령은 6·25전쟁 이래 최대의 국난이라 했던 IMF를, 그것도 박정희로 시작해 김영삼까지 모든 대통령들의 책임이 있는 그 IMF를 극복하고 외환보유고를 1천억 달러 이상 끌어올린 인물이다. 이는 세계 5위의 외환보유고였다. 당시 세계 모든 국가가 마이너스 성장이나 멈춤 상태였을 때에도 대한민국은 성장을 지속할 수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 너무도 많은 이들이 큰 고통과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항상 죄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이 잘나서가 아니라 국민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경제가 일어섰음을 분명히 밝혔다. 적어도 부끄러움과 고마움을 알았던 대통령이란 소리다. 지금 계신 분에겐 결정적으로 부족한 부분이다.

 

박정희는 일본인이 인정한 ‘일본인’이었다. ‘진충보국 멸사봉공’이란 혈서를 일본 천황에게 바친 인물은 우리 식민지 역사상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가 김재규에게 살해당하자, 주한 일본대사관의 한 외교관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대일본제국 최후의 군인이 죽었다”고.

 

“대동아 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훌륭하게 죽겠습니다.”

 

박정희의 말이다. 만주군관학교 졸업생을 대표로 그가 한 선서였다. 다카키 마사오, 박정희, 후에 다카키 마사오에서 조선의 냄새가 난다고 하여 다시 그가 고친 이름은 오카모토 미노루였다. 뼛속까지 철저히 일본인이 되고자 했던 박정희. 우리는 그를 대통령이라 불렀고, 그의 지휘에 따라 일개미마냥 일해야 했다.

 

그에 대한 평가가 여전히 논란이 되는 것은 그대로 우리 사회, 역사관의 현실을 보여준다. 아직도 그가 살아있다는 증거이며, 그가 남긴 유산들이 곳곳에 숨 쉬고 있다는 소리다. 경제성장이라는 구호 아래 수많은 전태일이 죽어가고, 수많은 ‘열사’들이 죽어가야 했던 그 때 그 시절. 과연 누구를 위한 경제성장이었고, 누구를 위한 10억 불 수출이었는지,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아직도 그로 인해 은혜를 입고, 떵떵거리고 살고 있는 수많은 이들, 그리고 그에게 단 한 푼의 돈도 받지 못했지만, 그 어떤 은혜도 입지 않았지만, 여전히 그를 그리워하고, 그의 딸에게 동정의 표를 던지는 우리 아버지 세대. 우리는 인간이 얼마나 복종적이고 노예적이며, 또한 과거 회귀적인지 느낄 수 있다.

 

나만 잘 살면 된다는 물질주의를 확산시키고, 북에 대한 만들어진 분노를 작동시키며, 여전히 미국이 우리의 구세주라고 믿는 이들. 이들에게 박정희는 여전히 위대한 대통령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그러한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너무나 팍팍하고, 피곤하다. 일생을 기회주의자로 살았던 박정희를 어느 새 닮아버린 우리들. 내 안의 ‘박정희’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영원히 삼류를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제2의, 제3의 박정희들을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끔찍한 반복은 이제 여기까지만 했으면 싶다.

 

김대중 대통령의 절뚝거리며 걷는 모습이 무참하게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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