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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의 오디세우스
에릭 엠마뉴엘 슈미트 지음 / 밝은세상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두 차례나 전직 미국 대통령의 방북을 성사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던 국제정치학자 박한식 교수는 중국에서 태어나 국공내전과 혁명을 피해 북으로 갔다가 다시 터진 6·25전쟁으로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전쟁이라면 너무나 지긋지긋했던 그는, 흡사 그를 따라다니는 것처럼 느꼈던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다.
하지만 박 교수는 말한다. “전쟁이 싫어 갔던 미국이 알고 보니 모든 전쟁의 근원이자, 전쟁 제조국가였다. 그래서 느꼈다. 전쟁을 피하지만 말고 전쟁 자체가 발생하지 않도록 내가 노력해야겠다고”
그렇다. 미국은 건국부터 전쟁으로 시작해 지금까지 인류 역사 대부분의 전쟁을 도맡아왔다. 경찰국가라는 이름아래 말이다. 때문에 미국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피비린내는 미국의 어쩔 수 없는 숙명과도 같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럼 이라크란 단어를 떠올려보자. 무엇이 떠오르는가. 사담 후세인의 장기독재, 이란과의 오랜 전쟁, 걸프전쟁 그리고 부시, 미국, 9·11 테러. 온갖 부정적인 단어만 튀어나온다. 찬란한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는 역사적 도시, 풍부한 석유 매장량, 순박하지만 자존심 강한 민족에 대한 이미지는 어느 새 CNN의 전쟁 생중계 속에서 사라져갔다.
1차 걸프전 이후 미국은 금수조치를 단행했다. 흡사 지금 MB가 미국 등 큰 형님들의 힘을 빌어 북에 경제제재를 가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약 10년간의 경제제재로 이라크는 수많은 아이들을 굶주림과 하찮은 질병으로 묻어야 했다. 노약자, 임산부 등은 말할 것도 없다. 수백만의 아이들이 단지 이라크에서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죽어나가야 했다. 물론 당시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후세인은 벌을 받아야 한다’는 명분으로 이를 정당화했지만, 정작 후세인은 미국의 2003년 이라크 침공으로 인해 2006년 사형 당했다. 그는 결코 굶주리지 않았으며 질병으로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 다만 아이들이 그를 대신해 죽어야 했던 것이다.
소설은 프랑스의 극작가이자 철학자인 저자가 밝히는 제국주의의 비판서이자, 노마드로 교묘히 위장되는 디아스포라 문제 제기다. 자신이 스스로 여유를 가지고 떠나는 여행, 이민이 아닌 그야말로 처절한 생존을 위해 국경을 넘어야 하는 이들의 고통을 다룬다. 하지만 이렇게 무거운 주제임에도 유머와 위트가 살아있다. 블랙 유머라고도 느껴질 만큼 그의 문장은 뼈아픈 웃음을 준다.
살려달라고 외치는 아버지를 사살한 미군. 미군은 후세인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주인공 ‘사드 사드’는 후세인을 무찌른 미군이 정작 이라크 국민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꿈을 위해, 그리고 ‘살기 위해’영국으로 향한다. 이라크에서 영국으로 이어지는 여정에서 그는 몇 번이나 죽음의 위기를 겪으며, 어느 새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된다. 난민도 뭐도 아닌 ‘불법체류자’인 자신을.
책은 말한다. 과연 인류의 진보는 어디까지 왔는지, 그리고 그 진보가 평등적 진보인지, 선별적 진보인지. 단지 이라크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차별받고 착취당해야 하는 주인공의 삶은 수많은 불법체류자, 제3세계 국민들을 대신해 묻고 있다. 과연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말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생활력이 강한 당신들보다 제 밥벌이도 못하는 멍청이들을 돌보는 게 더 낫다고 여기죠. 매일 눈물과 피땀을 흘리며 사는 당신들보다 될 대로 되라 식으로 사는 자국민들을 더 보호해야 할 가치가 있다고 여기죠. 당신 같은 사람들은 눈에 거슬리니까 차라리 없는 셈 치는 거예요. 당신네들은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알아서 잘들 사는데 뭐 하러 도와야 하냐고 빈정대기 일쑤죠. 아무리 힘들어도 제 나라보다 나으니까 머물러 있는 것 아니냐며 간단하게들 치부하죠. 당신들이 안 보이는 데서 죽은 듯 조용히 사니까 존재 자체를 깡그리 잊어버리는 거예요. 일종의 집단적 무관심인데, 인간에게 무관심보다 심한 모욕은 없잖아요. 그들은 당신들을 없는 사람 취급하고, 아무리 추워도 끄떡없고, 아무리 때려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사람들이라 여기죠. 이런 게 바로 야만이 아니고 뭐겠어요. 타인을 나와 동일한 인간으로 보지 않는 순간, 나보다 열등한 인간으로 취급하는 순간, 인간을 그 자체로 보지 않고 우열을 나누는 순간, 인간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순간, 미개한 사회가 되는 거라고 봐요. 난 항상 문명을 선택했어요.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사회는 미개한 사회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이 일을 하다가 잡히면 징역 오 년이지만 상관하지 않아요. 미개인들한테 아무리 날 가둬보라고 해봐요. 아무도 날 막을 수 없어요. 아무리 날 가둬도 감옥에서 나오는 순간 이 일을 다시 시작할 테니까. 나와 다른 사람을 모자라거나 개화 대상으로 치부하는 사회는 문명사회가 아니죠. 그런 사회는 보존할 가치가 없어요.”
불법체류자를 돕는 프랑스 운동가의 말을 빌어 저자는 말한다. 프랑스가 과연 문명사회인지. 그럼 난 되묻는다. 한국은? 외국인 노동자들은커녕 자국민들마저도 오로지 착취의 대상으로 여기는 한국 사회는 문명사회인가?
주인공 사드 사드의 이름은 아랍어로 ‘희망 희망’이고, 영어는 ‘슬픔 슬픔’이다. 그의 이름이 말해주듯, 아랍인을 버리고 온갖 자유와 인권이 살아 숨 쉬는 서구 사회로 들어가려 했던 주인공은 처절한 슬픔을 겪어야 했다. 오직 자기들만의 인권, 자기들만의 자유를 찬양하는 서구 사회와 그들에게 외면당하면서도 노동 착취를 당하는 비서구인들.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과 얼마나 차이가 날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관심이 과거에 비해 상당히 높아졌다. 다문화 가정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어색하지 않고, 피부색이 다른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다. 하지만 진정한 평등과 자유가 그 아이들에게, 그 아이들의 부모들에게 주어졌는지, 곰곰이 생각해 볼 문제다. “인간에게 이방인은 비인간일 뿐”이라는 말이 무참해지는 사회는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다. 인간이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사회는 보존해야 할 이유가 없다.
G20 정상회의를 하든지, GDP가 몇 만 달러를 넘든지 그딴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곳이 진정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는 믿음을 이 안에 살고 있는 모두에게 주어야 한다. 그게 사람 사는 세상이다.
한 번 생기면 절대 떨어지지 않는 티눈을 주인공의 아버지는 부정적 이름을 붙여 떼어내라고 말한다. 티눈에 부정적인 이름을 붙이면 쉽게 떨어져 나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끝내 주인공 사드 사드는 그 티눈에 ‘희망’이란 이름을 붙인다. 자신의 이름과도 같은 단어. 희망.
희망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세상을 그린다. 그런데 내가 티눈이 생기면 무어라 이름을 붙일까. 이미 짐작한 이들도 있으리라. 극비다. 2년 후에 공개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