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마다 살아온 시간이 다른 만큼 추억도 다르다. 아직 어린 내 세대의 아래 위를 살펴봐도 모두 나름마다의 추억이 있고, 또 낭만이 있었다. 황야의 무법자들이 악당을 소탕하는 웨스턴 무비에 열광했던 우리 윗세대가 있다면 주윤발과 장국영에 매혹되었던 내 또래들이 있었고, 지금 또래들은…. 음, 솔직히 딱 잘라 말하기 어렵다.(내가 잘 모른다)
남자들의 로망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무협 소설이 아닐까. 권 당 50원, 때론 1000원에 하루 종일 만화책과 무협지들을 읽을 수 있었던 만화 가게. 내 바로 위 또래들. 또는 내 또래들이 열광했던 것 들 중 하나가 바로 만화 가게, 또 무협지였다.
온갖 마도의 세력이 중원을 어지럽히고 있을 때 홀연히 나타난 절대 무림 고수. 그는 부모님을 살해한 원수를 갚기 위해 절치부심 극강의 무공을 닦아왔다. 하지만 채 익지 않은 무공은 그를 주화입마라는 절망적 상태로 만들어버리고, 이대로 무너질 위기에 있던 그를 구한 것은 사부님의 외동딸이자 평생 홀로 짝사랑했던 한 여인.
뭐 대충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스토리들. 기억하시는가. 무협지는 수업 시간 국어 혹은 영어 교과서 밑에 깔려 수업 시간의 진행 속도를 배로 급강시켜 주었고, 종종 선생님께 걸려 호되게 야단을 맞기도 한 원인 중 하나였다.
과거 구무협부터 공장무협, 중국무협, 신무협에 이르기까지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는 한국 무협의 역사 속에 얼마나 주옥같은 극강 비급들이 존재했었나. 그 수많은 명작들을 밤을 새워가며 읽어본 경험. 80~90년대를 살아간 남자들이라면 적어도 몇 번 쯤은 있으리라.
얼마 전 즐겨 놀러가는 딴지일보 게시판에서 한국 무협에 대한 절정 고수님들의 글을 접한 후 옛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음은 물론이다. 때문에 과연 나는 얼마나 많은 책들을 전수받았는지, 돌이켜 보았고, 강호에 출호한 이래 이날 이때까지, 허접스런 무공에 머물러 있는 내 자신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 강호에 숨어있는 초절정 고수들이 몇이란 말인가!
서효원 작가의 책은 재작년인가 폐업정리하는 도서대여점 세일 코너에서 입수한 비급이었다. 사실 예전 무협지 좀 읽었다는 이들에겐 아직까지 전설로 남아있는 이가 서효원이다. 하지만 통탄할 지고, 온갖 판타지 퓨전 무협지들이 강호를 접수하고 있는 이 때, 서효원을 기억하는 이 과연 몇이나 될 것인가.
그는 대학 시절 강호에 출호한 이래 안타깝게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10년 간 무려 128편이라는 작품을 쏟아낸 전설의 작가였다. 〈대자객교〉〈실명대협〉〈실명천하〉〈대중원〉등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던 그는 안타깝게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짧은 시간 동안 다량의 작품을 만들어낸 그는 작품마다 스토리가 비슷하다는 단점이 지적되고 있기는 하지만, 한국 무협의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기에 충분하다. 완벽한 주인공이 갑자기 강호에 나타나 온갖 절정 고수들을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한다는 다소 뻔한 스토리에서 벗어나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주인공이 자신과의 처절한 갈등을 극복하고 비로소 정의의 세계에 돌아온다는 구상은 무협지가 가진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 무협의 새로운 갈래를 만들어낸 것이다. 애초 무공에는 소질을 보이지 못한 채 백면 서생으로 책장이나 넘기던 내가 서효원 작가의 대표작을 읽을 기회는 없었다. 천마삼세는 다만 그의 128편의 작품 중 하나였을 뿐이다. 하지만 나의 유년 시절, 철없었지만, 정의감에 불타고, 약자에 대한 동정과 강자에 대한 패기와 도전의식이 넘쳤던 그 시절을 떠올리기엔 충분한 비급이었다.
무협지가 그토록 많은 이들의 신금을 울렸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박진감 넘치는 액션과 끈끈한 의리, 그리고 너무도 고혹적이면서도 때론 가슴 아프게 애절한 사랑이 담겨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또 하나 있다. 온갖 부조리가 판치는 현실 세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 정의는 결국 〈완결편〉에서 이뤄지고 만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사악한 마의 무리들이 온갖 거짓말과 폭력으로 무림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선량한 백성들을 고통에 빠지게 만들었던 그때. 사람들은 거짓과 속임수와 억압만이 존재하는 그 시절. 꽁꽁 숨어 무협지를 읽으며 이 더러운 세상을 조롱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도 액션 판타지 무협 소설들이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이유도 이해가 간다. 뭐 다들 말 안 해도 알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공권력이 민간인을 사찰하는 이 시대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천마이세의 못다 이룬 천하 마업을 이루기 위해 키워진 천마삼세 공야릉. 그는 무서운 속도로 마도와 백도의 초절정 비급들을 전수받으며 아무도 넘볼 수 없는 천하 제일의 고수가 된다. 그리고 모든 준비가 끝난 후 하나 하나 무림의 초고수들을 쓰러뜨리며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만화책을 우습게 아는 이들은 대부분 무협지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전혀 쓸모없는 쓰레기라 치부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인간이 반드시 매일 매일 칸트와 니체를 논할 수도, 라캉과 지젝을 노래할 수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무협지라는 장르가 우리에게 가져다 준 미덕을 굳이 부정할 필요가 없다. 짜증나고 열 받는 세상. 현실에선 이뤄지지 않는 권선징악을 대신 시원하게 보여주는 무협지가 있기에 그래도 우리가 가끔은 통쾌하게 웃을 수 있지 않을까.
아! 다시 영웅문부터 찾아 잃어버린 강호의 열정을 되찾아야 겠다.
영웅들이 뜨겁게 숨 쉬는 무림의 세계로 초절정 비급을 얻기 위해 떠나보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