촐라체
박범신 지음 / 푸른숲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제가 원래 뭐 하나에 꽂히면 당분간 정신 못 차리고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난 번 《백수산행기》를 읽은 뒤, 등산에 다시 마음이 동해 한 달 정도 등산을 하고 있어요. 그러던 중 예전에 사두고 고이 모셔두었던 이 책을 찾게 되었지요. 산 생각만 하다 보니 눈에 확 들어오더라고요.

 

작가야 뭐 워낙 유명한 분이니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고, 참고로 제 개인적인 인연이라면 1996년 대학 입학 시 면접을 잠깐 봤던 기억이 납니다. 주제넘게도 제가 그때 문예창작과에 지원했었거든요. 한국 문학과 나아가 세계 문학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 다행히, 그리고 당연히 떨어졌지만요.

 

그때 작가님이 “인상 깊게 읽은 책이 무어냐”라고 물으신 게 생각납니다. 그때 제 대답이 그야말로 압권이었죠. “백...백범일지요. 그리고 굳이 또 하나를 물으신다면 다케이코 이노우에의 《슬램덩크》라고 말씀드릴 수….”

작가님의 얼굴이 상상 되시죠? 늦게나마 참 죄송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 저는 참 무지한 천둥벌거숭이였답니다.

 

암튼 작가와의 인연은 그게 다고요. 작가의 소설은 한 두 권정도 읽었던 것으로 기업합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촐라체를 집어 들었고요.

 

촐라체는 산 이야기죠. 그리고 사람의 이야기였습니다. 산에 관심이 없는 이들에겐, 아니 관심이 있다 하더라도 도저히 무모해 보일 수밖에 없는 도전을 하는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추운 것을 정말 못 참는 편입니다. 몸이 매우 마른 편이라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여름보다 전 겨울에 특히 맥을 못 춥니다. 때문에 높이는 그만두고서라도 살인적으로 춥다는 이유 하나로 전 이미 히말라야나 에베레스트, 안나 프루나 등등의 전설적인 이름들과는 괴리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작가 덕분에 이렇게 책을 접하게 됐습니다. 그리곤 참 많은 생각을 했어요. 인간이란 나약한 존재의 위대함. 자연이라는 위대한 존재의 고독감.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라는 어쩔 수 없이 서러운 관계. 촐라체는 무지한 저에게 깊은 울림의 소리를 전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수히 쏟아지는 산악 용어를 몰라도 괜찮았습니다. 그것이 감동의 깊이를 덜어주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게 무얼까 하는 호기심을 주었죠. 그리고 막연하게나마 히말라야를 오르고 있는 저를 상상해 보기도 했습니다. 감히 현실화될 수 없는 아름다운 상상이었죠.

 

라인홀트 메스너는 ‘죽음이 지대’를 뚫고 나가려면 어떤 ‘모럴’이 필요하다고 썼다. ‘무덤과 정상 사이’는 ‘종이 한 장’차이밖에 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뚫고 나갈 때 ‘오히려 지각이 맑아지고 민감해지며’마침내는 ‘전혀 새로운 생의 비전을 연다’는 것이다. 그는 산소통 없이 에베레스트를 올랐고, 낭가파르바트 8천 미터 리지에선 ‘갑자기 둥근 모양을 한 투명체가 등 뒤에 구름처럼 떠 있는 걸’본 사람이었다.

 

사람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무모해 보이는 일에 도전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느낍니다. 그 강약의 차이, 성격의 차이는 있겠지만요. 책을 덮고 제가 처음 생각한 것도 ‘나는 그동안 얼마나 무모한 일에 생명을 걸어왔나’였습니다. 타고난 겁쟁이에다가 모험을 특히나 안 좋아하는 무사안일주의자인 저로서는 그리 떠오르는 것이 없더군요.

 

하지만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무모하게 도전해서 잔인하게 깨져본 경험이 없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만약 그런 분들이 있다면 쪼금 행복한 분들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행복과 사소함의 위대함은 끝내 모르시겠죠.

 

사람은 사람을 믿어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저는 고양이도 강아지도 믿지만, 아쉽게도 그들에게 제 생명을 100% 맡긴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굳이 생명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야말로 홀로는 절대 살아갈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을 살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사람을 미워하게 되고 이용하려 하고 버리려 합니다. 마치 자신이 신이라도 된 듯이 굴기도 하고요. 그리고 제 멋대로 사람을 단정 짓고 평가합니다. 무서운 일이죠. 감히 어느 누가 사람을 알겠습니까.

 

서로를 위한 배려나 애정이 소중하다는 흔한 말은 소용도 없겠습니다. 그야말로 살기 위해 사람이 필요함에도 우리는 스스로 그것을 부정하는 멍청한 행동을 하곤 합니다. 아무 말 없이 사람들을 보듬어주는 자연과 비교할 수조차 없죠.

 

촐라체는 위대한 자연의 숭고함.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끝끝내 지켜낸 이들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위대한 자연과 버금갈 정도로 위대한 생명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론 전부 동의하실 수는 없겠죠. 세상엔 사람의 제 몫을 하지 못하는, 오히려 다른 이들에게 눈물과 고통을 주는 이들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믿습니다. 사람은 꽃보다 아름답다는 사실을.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사람이어야 한다는 사실을요.

 

아름답고도 가슴 아픈, 기억에 남는 독서였습니다. 이제 전 다시 촐라체 대신 북한산을 오릅니다. 건승하세요. 모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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