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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광시곡 1
김주연 지음 / 아름다운사람들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장르를 초월하고 예술인들에게는 일정한 광기가 느껴진다. 물론 모든 예술인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감탄하고 감동을 느낄만한 예술적 성취를 보여준 이들은 강약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런 광기를 뿜어내곤 했다.
사실 예술은 광기, 고통, 절망이 수반되는 행위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기도 하고, 또한 유에서 다시 무로 끝없이 추락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예술가는 자신의 영혼이라도 팔아 시대가 감동할 수 있는 예술 작품을 만들려 한다. 그들의 피나는 노력과 뛰어난 영감, 그리고 광기어린 집착이 아니었다면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아름다운 예술 작품들은 세상에 존재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난 어쩔 수 없이 음악을 떠올린다. 솔직히 미술이나 그밖에 예술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지한 녀석이기도 하고, 그나마 내 짧은 생에서 음악이 가장 친근한 벗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 장르로 국한된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기는 하다. 락 음악이다.
어떤 예술 분야가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음악은 그야말로 광기의 산물이다. 다른 음악 장르를 건방지게 논하고 싶지는 않고, 락 음악만 보더라도 한 곡의 탄생을 위해 수많은 고통과 광기가 수반되는 것이 사실이다.
90년대 초 등장해 세상을 바꿔버린 〈Smells Like Teen Spirit〉의 주인공. 그룹 Nirvana의 보컬리스트이자 기타리스트 커트 코베인. 그는 차고에서 연습을 하며 지독한 가난을 벗 삼아 음악을 했던 고독한 시인이었다. 하지만 단 한 곡으로 그의 인생이 바뀌고 전 세계가 그와 Nirvana에 열광하자, 차마 견딜 수 없었다. 아름다운 부인과 너무도 사랑스러운 딸을 남겨두고 그는 결국 엽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쏴야만 했다.
그의 노래는 비관과 우울, 어둠과 광기로 가득 차 있었다. 물론 결혼과 득녀 이후 “나도 이젠 행복한 내용의 노래를 만들고 싶다”고 했었지만, 그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는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일본 밴드 X-Japan의 명 기타리스트였던 Hide. 그 역시 자신의 음악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수많은 명곡을 만들며 밴드에 없어서는 안 될 인물로 기억되는 히데. 그의 페르난데스 기타가 뿜어내던 강렬한 사운드는 아직도 많은 팬들을 감동케 하지만, 정작 그는 그렇게 팬들 곁을 떠나버렸다.
우리나라엔 김광석이 있다. 시대가 흘러도 영원히 남을 것 같은 아름다운 노래들. 힘든 시절 많은 이들에게 위로가 되어주었던 노래들을 남긴 채 그는 그렇게 떠나갔다. 지금도 라디오를 틀면 흘러나오는 노래. 술 취한 중년들이, 입대를 앞둔 젊은이들이, 서른 살에 막 다다른 청춘들에게 그는 여전히 따뜻한 위로다.
잔혹한 살인사건을 다룬 소설을 읽으며 나는 생뚱맞게도 이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수많은 음악가들을 떠올렸다. 책처럼 교향곡이나, 오페라는 아니지만, 나에겐 이들이 먼저 떠올랐다. 결국 살아온 인생이 이렇게 내 생각의 기억마저 만들어 버린 것일 테다.
주인공 서연의 삶은, 음악과 도저히 떨어질 수 없는 음악 그 자체였다. 하지만 정작 아름다워야 할 음악은, 모든 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기립박수를 쳐주는 바로 그 음악은, 본인에겐 고통일 뿐이었다. 자신은 완벽해야 한다는 생각, 자신이 만든 음악이 곧 자신을 떠날 것이라는 두려움. 그리고 고독과 절망, 아픈 유년의 기억들. 이 모든 것들이 그의 음악을 더욱 완벽하게 만들어주었지만, 결국 파국을 향해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
스포일러가 될 것이기에 더 이상 내용을 말하진 않겠다. 소설은 매우 뛰어나다. 최근 일본의 미스터리, 추리물들이 각광을 받고 있는 현실을 본다면 이 책은 그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음악적 진행 묘사는 압권이다. 이는 그동안 축적된 저자의 지식과 노력의 결과다.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 긴박한 구성과, 한 번 책을 펴면 도저히 멈출 수 없게 만드는 속도감과 구성. 근래에 읽은 소설 중 가장 흡입력이 강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자신의 전문 분야를 바탕으로 써내려간 작품이기에 문장마다 자신감이 넘친다. 또한 끊어야 할 곳과 이어야 할 곳을 비교적 정확히 판단하고 실행에 옮긴 솜씨가 기성 작가와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책을 통해 받은 감동은, 음악에 대한 열정 그 자체다. 서연의 비밀을 알았지만 그의 新환상교향곡 시연을 멈출 수 없었던 형운. 그리고 자신의 과거와 연결될 것을 느꼈지만, 그 과거를 잊기 위해 오히려 그 안으로 뛰어 들어가 버리는 채원. 이 모든 것들은 음악이라는 커다란 구심점을 향해 미친 듯 달려간다.
아름다운 음악 속에 이어지는 잔혹한 살인. 그리고 집념과 집착이 만들어낸 광기와 환희의 음악. 절묘한 만남이다. 저자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흔히 말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물론 잘 찾아보면 공짜도 있겠지만, 아쉽게도 99.999999%는 정답이다. 공짜는 없다. 저자가 작품을 만들기 위해 겪어야 했던 고통과 아픔, 집념이 고스란히 느껴지기에 책은 평가받아 마땅하다. 또한 독자로서 충분히 즐겨야 한다. 저자의 책머리에 담았던 고통의 토로와 스스로의 위무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책이다. 다시금 음악과 고독, 절망과 환희가 느껴지는 시간들이었다. 즐겁고도 가슴 아픈 독서였다.
“만 시간의 통곡 속에 삭아 내린 내 심장에게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