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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는 사랑한다, 행복할 자유를! - 대한민국 보통 아줌마 이보경 기자가 들여다본 프랑스의 속살
이보경 지음 / 창해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프랑스의 기본 키워드는 일단 ‘다양성’이다. 단조로운 흑백 TV가 아니라 시민 머릿수만큼의 수백만 화소가 어우러져 색상을 발하는 고화질 TV랄까. 그런데 쇠고집도 있다. 파리는 40년째 건물 신·증축의 고도를 37미터, 13층으로 제한하고 있음을 보라. 현대 도시가 저마다 아찔한 S라인으로 자태 경쟁을 하든 말든 개의치 않는 뚝심. 초선 재임 7년 동안 시민 세금을 한푼도 올리지 않았고 관용차와 홍보 등의 지출 항목에서 수백 억 원을 절감했다는 시장이 있는 파리. 신뢰지존의 한 주간지는 100년째 ‘무광고’를 고집한다.”
프랑스, 그리고 파리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는 회사연수 6개월, 그리고 휴직 후 자발적인 1년. 모두 1년 6개월간의 파리 체류 경험을 풀어놓는다. 직업이 기자이다 보니, 또한 강력한 파워 엔진을 장착한 대한민국의 ‘아줌마’이다 보니 파리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도 심상치 않다.
우선 이런 종류의 책이 대부분 가지고 있는 어설픈 평가나 결론짓기가 없다는 것이 책의 미덕이다. 그는 딱 본 만큼만, 아는 만큼만 이야기한다. 1년의 프랑스 탐사를 위해 4년간 어학을 공부한 ‘고집’이 있는 저자지만, 정작 평가는 매우 조심스러워 보인다. 여기에 특유의 유머가 함께 하니 성실히 만든, 하지만 적당히 마음을 풀어놓고 읽을 만한 에세이는 나왔다.
유럽인들은 보통 미국을 조롱하거나 경멸하는 분위기가 있다. 자신들이 보기엔 너무나 천박한 자본주의의 노예이고, 또한 지구 전체를 일순간에 파괴할 수 있는 무서운 군사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올바르게 사용하거나 운용할 수 있는 ‘내공’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즉 미국은 성찰을 잃어버린 ‘공룡’이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유럽이 가지고 있는 원죄 역시 사라지지는 않는다. 사실 그들도 잘 알고 있다. 자신들이 남들보다 한 발 더 먼저 착취하고 살육했기에 지금과 같은 윤택한 생활을 할 수 있었음을. 그럼 모른 척? 그렇다. 그들은 짐짓 점잖은 척하며 시치미를 떼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면 그들을 비난하는 것이 맞을까? 아님 그냥 우리도 적당히 모른 척하고 넘어가 주는 게 좋을까? 글쎄, 단정하기 힘든 문제다. 저자 역시 단정 짓지 않는다. 다만 보여준다. 프랑스가 가지고 있는 힘과 또한 약점. 아픈 부분들을 말이다. 우리는 일단 그들의 다양성과 함께 의외로 툭툭 튀어나오는 살벌함을 제대로 파악하는 게 먼저인 것 같다. 누드모델을 했던 영부인, 약간 모자란 듯 해 보이는 대통령, 피 튀기게 공부를 시키지는 않지만, 어느새 성인이 되면 세계 모범 시민으로서 사고하고 행동하는 프랑스인들. 얼핏 조화롭지 않아보이는 것들이 적당히 조화되는 것. 바로 그것이 프랑스의 힘이자 또한 약점이 아닐까.
우리는 어설프게 서구문명을 받아들였고, 어설프게 그것을 모방해왔다. 선이든 악이든 일단 서구 것이면 환장했던 과거가 지금도 가끔 튀어나온다. 우리가 생각하는 선진국이란 게 미국을 비롯한 ‘전혀’ 선진국이지 않은 국가라는 게 가슴 아픈 현실이지만, 또 그 안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고, 즉 어느 정도 ‘쟤네’들과 비슷해져 간다고 좋아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선진국이란 것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 지금 아닐까. 어차피 공존과 공생, 연대와 조화의 가치가 없다면 자본주의는 멸망한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자본주의는 지금의 모습으로는 마르크스가 말한 사회주의 혁명, 즉 인간의 자발적 반란으로 뒤집어지는 게 아니라 자연의 비자발적 발란으로 멸망할 것이다. 이대로 가면 지구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런데 이대로 가야만 자본주의가 유지될 수 있다면? 답은 나온다. 우리는 거대 우주선을 만들어, 그게 빠삐용이든 엘리우스든, 제2의 지구를 향해 우주로 나가야 할 것이다.
매일 지구상에서 석유 자원을 가장 많이 소비하는 미국이 정작 중국에겐 ‘너희 인구가 다 차를 가지게 되면 지구는 멸망해’라고 외친다. 중국의 답은? ‘웃기네’. 중국으로선 당연하다. 왜 우리는 차를 타면 안 되냐는 항변이다. 너희들이 지구를 다 망쳐놓고, 이제와서 우리는 닥치고 자연보호나 하라는 소리? 이렇게 들리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프랑스는 그나마 미국 보다는 양심적으로 보인다. 단지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파리엔 고층건물을 짓지 못한다. 자전거 타기가 일상화 되었고, 무분별하게 자연을 파괴하면서까지 개발이다 뭐니 해서 자본을 축적하려는 세력들을 ‘무식한 야만인’ 정도로 취급한다. 우리도 지금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서 ‘녹색 성장’이니 ‘그린 에코’니 떠들지만, 지금 프랑스도 생태주의, 환경주의가 대단히 큰 화두가 되고 있다.
일견 우리가 참고할 만한 것들이 있어 보이긴 하다. 여전히 환경 보호는 남 얘기라고 생각하는 미국보다는 참 바람직한 모습들이다. 그럼 우리는 슬슬 고민을 해야 하지 않을까. 뭐가 똥이고, 된장인지 말이다. 여전히 똥을 사랑하는 파리들이 위에 있는 것이 우울하긴 하지만 말이다.
책은 편안하게 읽을 수 있다. 저자의 눈길과 발길을 따라 파리를 산책하고, 프랑스를 슬쩍이나마 돌아본 느낌이다. 하지만 그곳 역시 다양한 고민과 아픔이 있음을 놓쳐선 안 될 듯하다. 인간의 이성을 의심케 하는 수많은 죄악 속에서 프랑스가 짊어져야 할 과제, 과오 역시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그들의 과오와 고민까지 아우를 수 있어야 진정 에펠탑을 봐도 봐야 하지 않을까.
예전 홍세화 선생의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를 읽으며 그동안 알지 못했던 프랑스, 그리고 파리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매력적인 도시, 예술의 도시, 낭만의 도시. 하지만 강인한 저항과 함께 똘레랑스가 있는 나라. 그 관용과 저항 속에 새로운 희망을 찾을 수도 있고, 더 한층 세련된 자본의 힘을 느낄 수도 있었다.
그에 비해 이 책은 조금은 부드럽고, 조금은 오밀조밀하다. 조금은 마음 편하게 읽을 수 있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그 오밀조밀 속에 적지 않은 메시지가 담겨 있음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를 꿈꾸었던 이들, 파리의 멋진 풍경과 사람들을 동경했던 이들. 편한 마음으로 페이지를 넘겨도 될 듯하다.
하지만 그 이후의 변화까지는 책임지지 못하겠다. 저자는 가능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