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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는 죽은 사상인가
막스 갈로 지음, 홍세화 옮김 / 당대 / 1997년 8월
평점 :
품절
“생산력의 발전을 통하여 인간해방을 이룰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진보주의 이데올로기가 빠진 함정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냉전의 해체, 사회주의의 명백한 패배. 그 이후 “역사의 종말”을 외치며 희희낙락하던 자본주의의 휘청거림. 온 인류에게 오직 평화만이 남았다고 들뜨던 이들에게 닥친 전쟁의 반복, 또 살육과 학살.
책은 1996년 프랑스의 《르 몽드》에 실린 글을 모은 것이다. 미국 평론가인 윌리엄 파프가 던진 “진보는 이제 죽은 사상인가?”라는 질문에 프랑스의 정치가, 철학자, 학자, 언론인 등이 답하는 형식이다. 짧게는 원고지 20~30매의 분량부터 다소 긴 글까지 각자가 생각하고 믿어 온 진보를 말하고 있다.
그 후 10년이 지났다. 이제 사회주의의 부활을 점치거나 자본주의의 영원함을 외치는 이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10년 전 이들이 고민하고 우려했던 이들은 여지없이 찾아왔다. 과학적 진보로 인해 인류에게 새로운 유토피아가 찾아올 것이라 믿었던 대다수 사람들에게 조용한 경고를 던졌던 이들이다. 때문에 10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섬뜩하고, 우울하다.
「진보 사상의 종말은, 근대화라는 괄호를 굳게 닫았지만, 전지구적 차원에서 문명화된 삶에 대한 논의에 괄호를 여는 아시아의 그 엄청난 봉기가 유럽인들에게 준 긴 파장의 결과일 뿐이다. 시간의 화살을 쏘는 것을 보지 못한다고 실망하고 있기보다, 우리들 자신의 그릇된 역사관을 버림으로써만이 우리들은 남은 역사적 과제에 공헌하게 될 것이다.」
「미래는 항상 과거를 정당화시키고, 정복에 따른 잘못된 희생이 어떻든 간에, 현재는 아무 거리낌 없이 새로운 개척지를 향한 척후의 역할을 담당하는 그런 틀 속에서 시간과 역사, 그리고 과학과 기술은 보조를 맞추어, 하나의 방향으로, 행복한 결말을 향해 나아갔다.」
「진보주의자 ‘특유의’ 환상은, 이 진보가 자동적이며 무의식적으로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그리고 문화적인 면에도 대등한 진보를 가져올 것이라는 확신에 있었다.」
「이론적으로는, 상품교환과 통신의 국제화는 국경 없이 연대하는 지구의 모습을 생각할 수 있게 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모순적이고 훼손된 상업적 글로벌리제이션이 되어, 불평등을 더욱 강화시키고 공동체의 공황, 외국인 혐오와 인종주의, 민족주의와 정체성 추구의 광신주의로 몰아가고 있다.」
「우리는 금세기의 추악함과 끔찍함을 통하여 겸허해져야 할 것이다. 안락함이 인간의 마음에 있는 잔인성을 없애지 않았다는 것은 명백하며, 18세기의 기대했던 것과는 반대로 진보는 윤리적 진보와 전혀 동의어가 되지 못한다.」
「여기에 우리 미래의 비밀이 있다. 지독스럽게 얽혀 있고 복잡하며 상호의존적이고 역설적인 이 세계, 잡다한 망이 뒤섞인, 온갖 징후를 보이는 이 세계에서, 오직 자신의 잘못을 기억하고, 자신의 잔악행위를 잊지 않는 인간만이, 실종되지 않을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오직 그런 인간만이 선으로 이루어진 이념을 향해 나아갈 - 만약 그것이 가능한 일이라면 - 것이다. 기억상실증으로 스스로를 살찌우고 있는 자본주의는 이것에 대비하지 못한다. 산업의 승리가 있던 세기에 한정된 진보에 대한 서양의 개념을 흉내내는 것으로 만족하려는 사회는 영혼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디자인’이라는 추상적 관념의 충족을 위해 ‘사람’이라는 명백함을 거부하고 있는 서울시. 아니 대한민국. 진보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편리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주지만 정작 주체를 상실하게 만드는 지독한 오류에 빠져들고 있다. 효율성, 경쟁력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무수히 많은 죄악들이 정당화되는 시대. 사회주의의 붕괴는 허무맹랑함을 자본주의에게 선사했다. 최후의 일격일 수도 있고, 자본주의 스스로 불러들인 치명적 무기일수도 있다.
10년이 더 지난 지금, 앞으로의 10년을 생각해보면 가슴이 턱턱 막히는 것. 비난 나 뿐만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더 우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