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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 가려 뽑은 함석헌 선생님 말씀
함석헌 지음, 김영호 엮음 / 한길사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가만히 있어보면, 아니 그냥 스쳐 지나가듯 봐도 난 참 무지하다. 교양 없고 상식도 꽝인데다 당최 눈치도 없다. ‘100대 1’에 출전한다면 1~2문제에서 바로 탈락할 것이란 예감으로 창피하고, ‘도전! 골든벨’에 나간다면 학생들 볼 면목이 없어 조용히 사라질 것 같다. 암튼 참 무식한 녀석이다.
함석헌 선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생각하고 흠모하고 따라야 할 큰 어른임에도 여지껏 난 선생에 대해 거의 무지했다. ‘씨알의 소리’‘그 사람을 가졌는가’정도만이 기껏 알고 있는 전부였다.
책을 읽게 된 것도 순전히 우연이었음을 고백해야겠다. 책은 본디 〈함석헌 저작집 전30권 출간기념기획〉으로 선생이 하셨던 너무도 귀한 말씀 중 일부를 가려 뽑은 것이다. 그런데 정작 난 저작집 30권 중 단 한 권도 읽지 못한 녀석이다. 이를테면 염치없게도 요약집을 먼저 읽은 셈이다.
하지만 진정 거인의 흔적은 일개 서생이 봐도 통한다고 하지 않는가. 무지한 내가 읽어도 선생의 글은 하나 같이 커다란 울림을 전해준다. 삶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내 삶의 주인이 되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정작 나는 이 세계에서 어떤 존재인가. 이 모든 것들을 되짚어 주는 선생의 말씀은 그 자체로 한 없이 귀한 나침반이다.
민주주의, 인권을 위한 선생의 거룩한 시간들. 참된 종교를 위한 희생의 시간들. 선생의 길은 가시밭길이었지만 너무도 복되고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때문에 지금도 많은 제자, 후손들이 선생의 가르침에 눈물 흘리고 선생의 죽비와 같은 꾸짖음에 정신을 번쩍 차리곤 한다.
사실 흔히 보수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 땅에 어른들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온전히 틀린 말은 아님을 알고 있다. 어른이 없는 세상은 자유로울지 모르지만, 정작 우리는 그렇지도 않고 오히려 억압과 무지만이 판친다. 그들이 말하는 어른이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생각하는 어른인지는 몰라도, 우리 모두가 우러러 볼 수 있는 어른이 아님은 슬프지만 사실이다.
이 나라가 미국으로부터 버림받을 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성조기를 들고 울부짖고, 진보단체의 엄연한 행사장에 쳐들어가 삿대질과 고함을 서슴지 않는 이들을 어른이라고 부를 수는 도저히 없지 않는가. 전직 대통령들을 싸잡아 빨갱이라 매도하고, 전라도 것들은 죄다 쓸어 죽여야 한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이들, 북한이 여전히 북괴고, 이명박 대통령이 선정을 베풀어 그나마 망해가던 이 나라가 살아나고 있다고 말하는 이들. 친일인명사전에 움찔해 스스로 ‘친북인명사전’을 만들겠다고 입에 거품을 무는 이들. 미국으로부터 우리의 당연한 주권인 전시작전권을 되찾아오겠다는데, 그걸 앞장서서 반대하는 해괴한 이들. 도대체 이들을 어떻게 어른이라 부를 수 있냐는 말이다.
때문에 함석헌 선생과 같은 이들이 너무나 그립고 눈물겨운 지금이다. 선생은 자신이 죽어야 나라가 살고, 민족이 살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우리 모두가 죽을 정도의 각성이 필요하다는 뼈아픈 자성의 촉구였다.
「역사는 언제나 기적의 기록입니다. 눌린 놈은 꼭 영원히 망할 것만 같은데 새 시대의 주인이 되고, 권세를 쥔 놈은 틀림없이 영원히 지배자일 듯 한데 반드시 망하고야 마니 기적 아닙니까. … 겁내지 않고 나가고 보면 바다 밑에도 길이 열리고, 남의 것 빼앗아 먹을 생각 말고 욕심 부리지 않고 하면 거친 들을 들여다봐도 거기 먹을 것이 있더라는 것이 역사의 가르침입니다.」
꿈같은 이야기라 무시할 수 있는가. 이 단순한 진리를 외면해 역사의 죄인, 민족의 죄인으로 기억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 단순함을 망각하는 순간, 역사는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의 늪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선생은 정신이 살아있고, 생각이 살아있는 민족이 결국 승리할 것임을 말씀하셨다. 잊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이들이 결국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음을 강조하셨다. 그것은 단순한 승리의 길이 아닌, 공생과 나눔과 모두의 행복을 추구하는 기꺼운 삶으로의 길이었다.
「정신이 빠지면 춤을 추어도 미친 짓이요, 장식을 해도 시체에 달린 부장품입니다. 옥 같은 손가락이라도 한번 내 몸에서 끊어지면 더러운 것이 되고, 꾀꼬리 같은 노래라도 나를 잊게 하는 것이면 독한 주문입니다. 즐거움도 아름다움도 전체를 하나로 살리는 의미가 있어야만 됩니다.」
나를 포함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산송장’들이 돌아다니는지, 부끄럽고 면목 없을 따름이다. 생은 그렇게 소중한 것인데, 정작 생을 살아가는 이들은 그 소중함에 걸맞는 삶을 꾸리고 있는지. 돌아보고 또 돌아볼 일이다.
선생은 결코 지지 말라고 하셨다. 지지 않는 것이 곧 이기는 것임을 잊지 말라 하셨다. 곤궁하고 때론 비참해지는 이 삶 속에서 결코 넘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다. 삶이기에 넘어지는 것이다. 삶이기에 눈물겨운 것이다. 하지만 결코 무릎 꿇지는 말 일이다.
「생명은 지속이다. 끊이지 않고, 끊어졌다가도 다시 잇는 것이 생명이다. 또 한 번 해보는 것이 생명이다. 지지 않는 것이 이김이다. 져도 졌다 하지 않는 것이 이김이다. 놓지 않는 것이 믿음이다. 살려니 되려니 믿음이다.」
정녕 아름다운 삶을 마치고 떠나신 함석헌 선생. 선생이 가신 뒤로도 삶은 이어지고 역사는 흘러간다. 하지만 정작 아름다움을 위한 투쟁은 멈춰선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간절히 원하기에 이루어진다는 말을 믿는 이들이 숨 쉬고 있는 한 정녕 져도 지는 일은 아닐 것이다.
「삶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퍼져나가는 가지같이 그칠 줄 모르는 삶의 음악을
손에, 발에, 소리에, 얼굴에 넘쳐흐르게 하는 일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그러나
한 맘을 묶어 정성껏 바친 한 사람을 위해
맘껏 일하다가 힘껏 싸워 죽을 수 있다면
그는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보다도
흘러가는 세상 물결 속에 흐르지 않는 사업을 쌓아
바위 위에 서서 죽는 등대지기같이 그 위에 서서 죽는다면
그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그러나 그보다도 또
영원히 실현될 길 없는 이상의 맑은 불꽃을 안고
새파란 나래째 부나비 되어 그 안에 뛰어들어 타죽고 만다면
그것은 그것은 얼마나 눈물이 나는 일인가
즐거움, 아름다움, 행복, 영광을 다 모르고
나도, 세상도, 온 길도, 앞날도 다 볼 줄을 모르고
그저 타, 타, 타, 영원한 불길을 타오르고만 마는 그 일은
아아, 그 일은 얼마나 눈물나게 거룩한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