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 보이
팀 보울러 지음, 정해영 옮김 / 놀(다산북스)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누구나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있다. 물론 할아버지, 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생전 얼굴을 뵌 적이 없는 이들도 있다. 그런 분들은 어찌 보면 성장기에 커다란 선물을 하나 잃은 것이나 다름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내가 기억하는 할아버지. 글쎄, 살아오면서 할아버지에 대한 여러 가지 기억들이 점차 바뀌어 감을 느끼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할아버지의 기억은 ‘당당함’이었다. 어느 시기, 어느 장소에 있더라도 결코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을 내보이는 모습. 그 당당함이 할아버지에겐 충만했다.

사실 그랬다. 우리 시대 할아버지들이 겪었을 수많은 일들. 그 기가 막힌 시간들이 그들을 여러 갈래로 진화하게 만들었다. 자신이 처한 극한의 상황에서 어떻게든 생존해야 했고, 자식들을 굶기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물론 아버지 세대 역시 자식들을 위한 처절한 생존의 몸부림을 쳤고, 이제 우리들이 그 역할을 맡게 되었지만, 각 세대마다 겪게 되는 굴곡은 저마다 다른 것이다.

《리버보이》를 읽으며 페이지마다 할아버지가 살아오심을 느꼈다. 물론 주인공 제스의 할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지고 계셨던 분이지만, 나에게도 할아버지는 멋진 리버보이였다. 군대에서 이제 막 병장을 계급을 달고 내무반을 호령하려던 그때, 할아버지의 죽음이 전해졌고, 결코 나가기 싫은 특별 휴가를 얻어 달려간 기억이 있다. 군복을 입고 상주가 되어 절을 하던 그때, 할아버지께서 생전에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남자가, 어딜 가든, 옷이 중요한 게 아니야. 돈이 중요한 게 아니야. 없어도 돼. 하지만 하나. 반드시 가져야 할 것은 자신감이다. 자신감을 잃은 남자는 아무리 돈이 많고, 아무리 비싼 옷을 입어도 이미 승부에서 진거야. 어딜 가나 사람들이 널 얕잡아 볼 수 없도록. 자신감을 가지고 눈을 부릅떠야 한다. 하지만 너보다 힘없는 이들. 도와줘야 되는 이들은 결코 외면하지 마라. 도와주지 못하는 사람은 도움을 받을 수도 없다. 삶은 도와주고, 도움을 받고, 그러면서 이어져. 그게 삶이고, 너의 길이다.”

그 후에도 할아버지의 말씀은 지금까지 내가 살아가는 힘이 되어주곤 한다. 정말 짜증나고 울화통 터지고 ‘성질’나오게 하는 세상에서, 그래도 희망이란 놈과 친해지려는 이유는 바로 할아버지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자신감을 가지고 빌어먹을 세상과 시원하게 한 판 맞짱을 뜨겠다는 깡이 생긴 것도 할아버지의 덕이 크다. 때문에 난 할아버지께 자주 감사하며 살고 있다.

《리버보이》는 성장 소설이다. 사랑했던 할아버지를 떠나보내는 손녀의 간절한 사랑, 그리고 그러한 손녀에게 할아버지가 전해주는 마지막 선물. 리버보이와 함께 제스는 더 성장할 수 있었고, 더 사랑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아름다운 그림을 제스는 살아가는 동안 끝내 완성할 수 있으리라. 제스는 그만큼 강하고 아름다운 소녀다.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가족이 주는 믿음과 용기는 결코 적지 않다. 아니 어쩌면 힘없고 나약한 우리들이 살아갈 수 있는 가장 큰 원천이 되어주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제스는 그야말로 커다란 선물을 받은 것이리라. 나 역시 그렇고.

효도? 참 쉬운 말이지만. 참 어려운 말이다.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에게 그 어떤 보답도 사실 유치하고 끝이 명백하다. 그분들이 주시는 사랑에 비한다면 그야말로 초라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가족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우리는 만들어진 동물이다.

온갖 흉악한 이야기들이 판치는 세상이다. 가족 간의 피비린내 나는 사건들이 끊이지 않고, 대기업들은 창업주가 죽는 그 날 바로 재산 다툼이 벌어진다. 왕자의 난이니 뭐니 하는 거창한 이름으로 불리지만 결국 추태와 죄악에 다름 아니다. 어르신들은 道 가 땅바닥에 떨어진 시대라 개탄한다. 왜 저러시나 하면서 커왔지만, 이젠 어느 순간 내가 중얼거린다. “말세야 말세”이러면서.

하지만 믿음은 변하지 않는다. 인간은 교육으로만 길러지지 않는다. 사랑이 가장 큰 자양분이다. 결국 사랑을 받고 자란 인간은 받은 사랑을 혼자 안고 살아갈 수 없다. 넘치는 사랑을 전해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 당연한 이치다. 넘치면 죽을 수밖에 없다. 그것을 전해줄 수 있어야 비로소 살 수 있고, 그게 산 것이라 할 수 있다.

제스는 할아버지에게 받은 사랑을 평생 돌려주며 살아갈 것이다. 아빠와 엄마, 그리고 자신이 만날 사랑과 또 다른 사랑의 결실들. 제스는 그렇게 사랑을 전하며 살 것이다. 독신이면 어떻게 할 거냐고? 독신이면 어떤가. 아무 문제없다. 세상엔 사랑받지 못해 죽어가는 이들이 숱하다. 그들에게 전해주는 사랑도, 가족에 그것과 다르지 않다.

강산에 노래 중 〈할아버지와 수박〉이 있다. 복덕방에서 내기 장기를 두셔서 이긴 날, 기분이 좋아 수박 하나를 들고 돌아오시는 그 뒷모습. 아마 콧노래를 흥얼거리시며 큰 기침하며 돌아오셨겠지. 그 뒷모습이 정말 “코가 찡하도록”그리운 세상이다.

『또다시 삶은 계속될 것이다. 고통스러울 필요는 없었다. 단지 때가 되면 누그러질, 건강한 슬픔만이 있을 뿐이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전하고픈 책이다.

“할아버지~ 잘 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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