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납치된 공주
카렌 두베 지음, 안성찬 옮김 / 들녘 / 200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이른 바 〈판타지 소설〉을 즐겨 읽는 편은 아니다. 〈반지의 제왕〉같은 영화는 즐겨봤지만, 굳이 책으로 읽을 만큼 좋아하진 않는다. 감수성이 단단히 사라져 버린 녀석이다. 쓸데없이 책에다 대고 “이게 말이 돼?” 따위의 소리나 늘어놓곤 했으니. 판타지가 말이 되면 그게 되냐?
책을 읽은 것은 꽤 지났다. 쌓여있는 〈서평 작성 예정도서〉중에서도 아래에 놓여있었다. 아마 조금만 시간이 더 지났음 줄거리나 주인공을 비롯한 주요 등장인물들까지 잊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찌 이 유쾌한 모험을 쉽사리 잊을 수 있겠는가.
불을 뿜는 용이 등장하고, 절세 미녀 공주를 둘러싼 사랑의 투쟁, 음모와 배신, 의리와 정의가 살아 숨 쉬는 기막힌 세계. 어쩌면 뻔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영웅 서사시의 구조에서 벗어남이 없지만, 상상력을 자극하는 장면 장면은 아주 조금은 나를 아이처럼 만들어 준다.
〈비〉와 〈이것은 사랑노래가 아니다〉로 베스트셀러 작가 대열에 오른 저자는 독일의 대표적인 작가 중 하나라고 한다. 유럽 작가들에 대해 거의 무지하다시피 한 (사실 다른 지역의 작가들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별로 없긴 하다) 나로서는 생소한 이름이지만, 나름 필력을 인정받은 작가라고 들었다.
〈납치된 공주〉는 영웅 서사시와 중세 기사 문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일 년 내내 눈으로 덮여있는 북쪽나라의 아름다운 공주 리스바나.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는 용감한 기사 브레두르. 하지만 따스하고 부유한 왕국 바스카리아의 디에고 왕자가 찾아와 리스바나에게 반하고 만다. 기사로서 용서될 수 없는 질투심으로 브레두르는 연회에서 춤을 추고 있는 디에고에게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게 되고, 두 국가 간에는 전쟁까지 불사하는 일촉즉발의 사태가 벌어진다.
소동 끝에 리스바나에게 청혼하는 디에고 왕자. 하지만 리스바나는 매정하게 거절하고. 아들의 고통을 보다 못한 레오 왕은 디에고를 위해 리스바나를 납치해 본국으로 돌아가는데…. 한편 납치된 공주를 찾기 위해 브레두르는 먼 길을 떠나게 되고 온갖 모험과 고나을 이겨내며 공주를 찾지만…. 과연 리스바나의 사랑을 얻는 이는 디에고일까, 브레두르일까.
〈해리포터 시리즈〉첫 권을 읽고 포기한 기억이 있다. 재미를 못 느껴서라기보다는 당시 읽어야 할 책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아직까지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시 시작을 하자니 이건 뭐 분량도 만만치 않고, 중간 중간 영화도 몇 편 봐서 대충은 알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납치된 공주〉를 읽고 다시 해리포터에 도전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용과 마법사, 난쟁이들이 등장하는 환상의 세계. 명예를 지키기 위해 때론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용기, 스스로의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 강인한 의지, 그리고 목숨을 바쳐 이루어내고픈 사랑. 허구와 환상으로 점철된 판타지 소설이지만, 소설이 전해주는 감동은 이 현실의 세계와 전혀 틀리지 않는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자격, 그것을 간직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세상이다. 우정, 의리, 명예, 양심, 관용, 배려 그리고 사랑. 이런 단어들이 무색해지는 지금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치졸하고 더러운 군상들이 TV화면을 장식한다. 오로지 돈과 권력에 눈이 먼 이들은 타인을 짓밟고 때로는 아무 거리낌 없이 해친다. 그리곤 그것을 발전, 혹은 국익이라 말한다.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대가를 받아들이는 모습.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지만 그렇기에 너무나 숭고하기도 하다. 그러한 모습을 본지 우리는 너무나 오래 되었다. 때문에 소설에 등장하는 용감한 기사와 명예를 지키는 왕자는 이 시대 우리가 꿈꾸는 인간상 바로 그것일지도 모른다.
판타지의 환상적인 세계, 그 속에서 명멸하는 수많은 군상들 속에 현재를 오버랩 시키는 것은 어쩌면 오버일지도 모른다. 판타지는 다만 판타지일 수도 있으니. 하지만 아름다운 공주를 지키기 위해 불을 뿜는 전설의 용, 그 용과 같은 사람들을 우리는 그리워한다.
유쾌한 독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