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를렌 하우스호퍼 지음, 박광자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시간이 오직 내 머릿속에만 존재한다면, 내가 이 세상에 살아남은 최후의 인간이라면, 내가 죽는 순간 시간도 멈출 것이다. 이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어쩌면 내가 시간을 살해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느 날 아침, 이 세상에 오직 나만 남겨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면. 모든 인간들이 사라지고 이 넓은 땅에 홀로 남겨진 자신을 발견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공포에 사로잡혀 미쳐버리고 말 것인가. 아니면 차라리 잘됐다며 고독과 벗하며 살아갈 것인가.

상당히 도발적이고, 동시에 진부한 이야기다. 핵전쟁이나 그밖에 어떠한 천재지변으로 홀로 남겨진 주인공의 고군분투기는 지금껏 적지 않았다. 때문에 이 책 역시 기존의 그것 이상의 것을 담지 못한다면 또 하나의 모험기, 혹은 인류재앙의 경고 정도로 남았을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전 서평이나 신간안내문을 통해 대략의 줄거리를 알고 있었다. 때문에 조금은 식상하지 않을까, 과거 읽었던 비슷한 내용의 작품들과 차별될만한 그 무엇이 있을까 우려했다. 사실 고립된 이후 2년 반 동안의 홀로 생활이라면 매우 단조롭고 지루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은 그런 내 우려를 보란 듯이 날려버렸고, 난 시간이 날 때마다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그리곤 한숨을 쉬었다. 막막하고, 아득했다. 주인공이 겪었던 시간들, 상처들, 그리고 행복이 고스란히 가슴에 전해지는 듯했다. 아팠다. 적지 않게.

40대 여성인 ‘나’는 사촌 부부의 초대를 받아 그들의 산장으로 휴가를 떠난다. 그날 밤, 사촌 내외는 볼일이 있다며 마을도 나갔고, 혼자 남겨진 ‘나’는 그렇게 밤을 산장에 보낸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사촌 내외는 돌아오지 않았다. 산장지기가 키우던 개 ‘룩스’를 데리고 사촌 내외를 찾아 나선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벽에 부딪치게 된다. 투명하고 단단한 벽. 그 벽이 숲 속을 둘러싸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벽에 건너의 모습들. 그것은 화석이었다. 모든 것이 일순간에 정지된 듯한 모습. ‘나’는 자신이 그 벽 안에 있었기에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벽 너머에 물을 마시기 위해 손을 든 채로 굳어있는 노인을 바라보는 ‘나’는 공포와 함께 자신이 이 숲 속에, 어쩌면 이 세상에 홀로 남았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나’는 차단된 벽 안에서 생존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를 지켜주는 동반자 ‘룩스’와 어느 날 발견하게 된 암소 ‘벨라’, 그리고 영리하지만 쌀쌀맞은 암코양이까지. 이들이 ‘나’의 새로운 가족이 된다. 이제 벽 안에서의 새로운 공동체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 새로운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주인공은 눈물겨운 사투를 벌인다. 이는 생존을 위한 사투였고, 자연에 대한 투쟁이 아닌 적응의 과정, 어울림의 과정이다. 그 안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고, 또 죽는다. 자연의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과정. 순환. 그 안에서 주인공은 도시의 무관심과 단절이 아닌 삶의 또 다른 너그러움과 냉혹함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주인공은 벽으로부터의 탈출 혹은 구조에 대한 기대를 접는다. 이는 비관이 아니다. 새로운 희망이다. 그는 자신이 그동안의 삶을 긍정해오지 못했음을 느끼게 되고, 자연 속에서 동물들과의 삶이 더 행복하고 편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포기가 아니라 긍정의 과정이다.

이 작품은 문명사회에 대한 비판이 남겨있고, 남성중심의 폭력적인 사회 구조에 대한 부정이 드러난다. 때문에 이 작품을 페미니즘 문학의 한 성과로 평가하기도 한다. 생명을 낳고 그 생명을 보살피는 모성의 고통과 희열이 작품 전체에 흐르고 있다. 이는 단순히 모성의 역할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역할의 숭고함(그 어떤 작위적이고 남성 중심의 해석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이 담겨져 있다. 주인공은 사랑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절실히 느낀다.

“사랑을 하고 다른 존재를 돌보는 일은 매우 힘이 드는 일이다. 그것은 살생하고 파괴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이십 년이 걸린다. 반면 아이를 죽이는 일은 십 초면 끝난다. 송아지도 크고 힘센 소로 자라는 데 일 년은 걸린다. 그러나 도끼만 두어 번 내리치면 소를 죽일 수 있다”

그간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남성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시간이라는 속박에서 벗어나 새로이 여성의 시간을 맞는 주인공. 희생과 수동의 상태로 규정지어왔던 여성의 정체성을 깨고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는 주인공의 분투는 눈물겹다. 때문에 지극히 아름답다. 그는 이제 아이들에게, 남편들에게, 그리고 사회의 모든 남성 중심적 시스템으로부터 자유롭다. 강요된 애정, 사랑은 없다. 오직 스스로 자신을 위한 사랑과 희생, 용기가 있을 뿐이다.

지극한 슬픔을 전해주면서도 희망을 차마 버릴 수 없도록 만드는 것. 이 책의 큰 미덕 중 하나이다. 생존을 위해 살생을 하면서도 동시에 다친 동물들을 치료해주고 사랑해줄 수밖에 없는 주인공의 모습은 아무 이유 없이, 혹은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지나치게 잔인하게 살생과 파괴를 일삼아온 남성중심의 사회, 폭력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그러한 문명사회가 스스로의 욕망으로 파괴되는 것은 어쩜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작품에서는 왜 갑자기 벽이 생겨났고, 그 벽 밖에 있는 이들이 어떻게 화석처럼 굳어진 채로 죽어버렸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문명사회 스스로 만들어 버린 재앙임을 암시한다. 핵전쟁이건 또 다른 형태의 전쟁이건 결국 인간이 만들어놓은 추악함이라는 것이다.

고도의 기술화, 인간을 소외시키는 능률 위주의 공격적인 사회. 주인공은 이러한 사회에서 벗어나 타인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시키는 사랑으로 충만한 사회를 만들어간다. 지독한 고독과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인공은 자살을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남겨질 동물들에 대한 미안함, 인간이 삶이 과연 어떻게 이어질까 하는 기대로 주인공은 삶을 놓지 않는다. 오히려 치열하게 자신을 희생시켜 동물들을 돌본다. 그리고 행복해 한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은 사랑을 하지 않고 사라져버린 인간들을 동정한다. 그들은 진정한 삶을 미처 살지 못한 채 굳어버린 것이다.

“동물들은 안쓰럽다. 인간들도 안쓰럽다. 그들은 자기 의지와는 관계없이 이 삶 속으로 내던져진 것이다. 인간이 가장 불쌍할지 모른다. 인간에겐 이성이 있어서 자연의 순환을 막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간을 악하게 만들고 절망적으로 만들었으며 흉하게 만들고 말았다. 다른 식으로 사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랑보다 더 현명한 감정은 없다. 사랑은 사랑하고 있는 사람과 사랑받고 있는 사람 모두가 삶은 그래도 견딜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것만이 더 나은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희망, 유일한 가능성이라는 것을 좀 더 일찍 알았어야 했다. 죽은 자들은 이제 그 유일한 가능성을 잃고 말았다.”

작품은 “인류문명에 대한 비판서이며, 여성의 소외를 밝히고 그 극복을 요구하는 페미니즘 소설인 동시에 새로운 역사를 위한 제안서”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버린 이 세계, 이 사회에서 더 이상 인간성을 포기하지 말고 다시 희망을 찾아 나설 것을 당당히 요구한다. 폭력과 죽음으로 이어져온 남성 중심의 사고에서 생명과 희생, 그리고 사랑으로 상징되는 여성성을 회복할 것을 말한다. 사실 우리는 모두가 어머니요, 모두가 사랑 아닌가.

무척 슬픈 작품이지만 읽는 재미 역시 적지 않다는 것을 말해야겠다. 주인공의 분투 속에 함께 안타까워하고, 동물들의 죽음에 아픔을 느낀다. 하지만 또 다른 생명의 태어남은 희망과 기쁨과 사랑을 느끼게 된다.

이제 벽 바깥은 더 이상 관심이 없다. 스스로 만들어놓은 재앙에 굳어져버린 문명사회를 동정할 이유도 없다. 삶은 다시 시작된다. 하지만 그 새로운 삶은 죽임이 아닌 살림, 차별이 아닌 평등, 증오가 아닌 사랑의 세상이기를 바란다. 그런 세상이라면 까짓 벽 안에 갇혀도 살만 하지 않을까.

상당히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다. 꼭 페미니스트가 아니더라도, 염세주의자가 아니더라도 한 번쯤 읽어보길 권한다. 주인공의 아름다운 도전을 함께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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