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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사냥꾼들 - 추리하고 탐험하는 영문학 이야기
이창국 지음 / 아모르문디 / 2007년 3월
평점 :
청계천과 동대문 운동장 근처에 있는 헌책방을 즐겨 갔다. 지금은 내가 분가한지라 예전처럼 자주 가지 못하고, 또 예전에 비해 책방들이 많이 사라져서 아쉽긴 하지만, 여전히 가끔씩은 구경삼아 들르곤 한다. 그곳에 가면 무언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 그 자체가 좋은 나들이다.
예전에는 돈 만원으로 5~6권의 책을 사들고 오기도 했다. 우선 양적인 뿌듯함과 함께 무언가 크게 횡재했다는 기분도 유쾌했다. 그러다 간혹 예전에 절판된 책들을 구하는 기분이란. 마치 금지곡 등등으로 우리나라엔 정식으로 발매되지 않은 앨범을 구했을 때의 그 느낌과 같다. 한마디로 아싸! 였다.
북을 전공한 지라(악기가 아닌 국가) 북과 관련된 책들을 구하는 데는 오히려 헌책방이 영풍이나 교보보다 나았다. 조악한 형태로 반은 몰래, 반은 정식으로 출간되곤 했던 북 관련 서적들은 마치 비밀문서를 입수하는 듯한 기분을 주곤 했다. 물론 현재는 다시 예쁘게 디자인되어 출간된 책들도 있다. 하지만 그 때 이후 영영 사라진 책들도 많다.
이런 경험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문학 사냥꾼〉은 더없이 즐거운 책이다. 사실 이 책도 사무실 근처 책방에서 뒤적거리다 제목이 눈에 띄어 집어든 책이었다. 그리고 사무실이 바뀐 이후에도 들여다볼 생각을 하지 않던 이른바 “쌓아둔 책 더미”중 하나였다. 그러던 녀석을 8월 말 갑자기 집어 들어 읽기 시작했고, 곧 쏠쏠한 재미를 느끼며 읽어나갔다.
학자들은 - 여기서 말하는 학자는 학문 외에는 정말 쓸모없는 군상들을 말한다. 하다못해 형광등 하나 다는 것도 서툴고, 컴퓨터 다운되면 울먹울먹 거리는 종이다 - 보통 사람들과 다른 점이 몇 있다. 현대사회에서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듯 전공 분야가 아닌 분야에는 정말 무지하다는 것과, 참을성으로 치면 생살을 찢고 뼈를 긁는 고통 속에서 장기를 두던 관운장 못지않다는 점이다.
논문 하나 완성시키는 과정에서 위궤양 한 번 걸리지 않는 학자들이 없고, 치질과 각종 질환들을 달고 다닌다. 물론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라는 아주 아름다운 말들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 그런 학자들은 앞에 ‘폴리’라는 접두어가 붙곤 한다. 물론! 다 그렇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암튼 학자들은 지긋이 엉덩이를 의자에 갖다 붙이고 오직 항문에 힘을 주어 학문에만 정진하는 참을성 많은 종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 책의 주된 내용이기도 하지만 남들이 보기엔 전혀 쓸모없을 것 같은 가설 하나를 밝혀내기 위해 수년, 심하게는 평생을 달라붙기도 한다. 필자인 우리의 노 교수님 역시 이런 학자들의 습성을 이야기마다 강조하신다. “학자라는 종들은 ~~ 이러이러 하다”는 식으로. 물론 이러한 표현은 같은 학자로서 보내는 애정 어린 찬사이기도 하다. 남들이 보기엔 전혀 무의미한 일들을 평생에 걸쳐 이루어내는 동업자들에 대한 동병상련의 심정이랄까. 이런 학자들에게 국적과 시대는 아무 상관없다. 그야말로 대단한 종들이 아닐 수 없다.
책은 정말 흥미롭다. 유명작가의 미발표된 원고를 찾기 위한 수많은 학자들의 노력, 그 과정에서의 영화 같은 이야기들. 고서적을 둘러싼 흥미진진한 모험, 소설 속의 한 구절, 시의 한 문장 속에 담겨진 비밀을 찾기 위한 후대 학자들의 집념과 끈기. 이들의 이야기를 보고 있으면 정말 거저 얻을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1부 1장의 「흑단나무 장롱 속의 비밀」을 보자. 영국의 유명한 시인이자 소설가인 새뮤얼 존슨의 전기를 쓴 제임스 보즈웰의 얽힌 이야기다. 보즈웰은 존슨의 전기를 써서 일약 유명해졌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의 명성이 능력이나 성취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존슨의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명성을 위해 유명한 사람의 생애를 철저히 이용한 얌체 정도로 평가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이 말하는 실력 없는 얌체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충분히 떨칠만한 능력과 업적이 있는 이었다. 물론 이는 흑단나무 장롱이 발견된 이후의 일이다. 보즈웰은 기록의 대가였다. 존슨의 전기 역시 존슨의 사후가 아니라 생전에 그를 하루 종일 달라붙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그것도 20년 동안이나!) 기록한 것이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그는 죽을 때 후손들에게 흑단나무로 짠 장롱 하나를 물려주며 부디 잘 보관하라고 신신당부했다. 이 장롱 속에는 생전에 자신에게 온 편지들은 물론, 수십 년에 걸쳐 자신의 생활과 사색을 기록한 일기를 보관해 두었다. 인간 보즈웰에 대한 모든 것이 담겨 있는 장롱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신신당부에도 불구하고 어찌 어찌 하다 보니 결국 그 장롱의 행방은 묘연해졌고, 자신들의 조상이 얌체, 위선자라는 평을 듣기 싫어했던 후손들은 그 장롱과 함께 그 안에 담겨있는 모든 문서들이 불타 없어졌다고 말했다. 보즈웰에 대한 연구를 하려 했던 후대 작가들에겐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아울러 새뮤얼 존슨에 대한 연구를 하는 학자들에게도 불운이었다. 전기에 담겨있지 않은 내용들이 분명 그 장롱 속에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가. 보즈웰이 죽은 후 55년이 지난 1850년 (보즈웰은 1795년 사망했다) 영국이 아닌 프랑스의 어느 조그만 마을의 식료품 가게에서 보즈웰의 서명이 있는 포장지가 발견된다. 발견한 이가 문학에 조예가 있은 이가 아니었다면 그 문서들은 곧바로 쓰레기통으로 던져졌을 것이다. 그 포장지를 발견한 이는 그 문서의 출처를 찾아 나선다. 그리고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흑단나무 장롱은 더블린 말라하이드 성에서 발견된다. 그 성의 주인은 보즈웰의 증증손자인 탤보트 경의 소유였다.
그 장롱 속에는 탄식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자료들이 쏟아져 나왔다. 영문학자 50명이 달라붙어 부지런히 정리해도 50년은 족히 걸릴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보즈웰의 꼼꼼히 정리된 문서들을 통해 18세기 영국의 시대상과 문인들의 활동상 등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었다. 또한 보즈웰이 단순히 운이 좋은 얌체가 아닌 오히려 존슨에 버금가는 문장력과 업적을 남긴 당대 그 누구보다 뛰어난 문인이었음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런 보즈웰의 원고는 1928년부터 1934년까지 6년에 걸쳐 화려한 장정의 전체 열여덟 권짜리 총서로 출판되었다. 보즈웰의 사후 130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그리고 현재 그의 원고는 예일 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밖에도 책은 영문학의 역사를 바꾸어버린 수많은 일화들이 영화처럼 펼쳐진다. 영문학사에서 가장 오래된 서사시인 ‘베어울프’의 기구한 운명, 시대를 떠들썩하게 했던 고서적 위조에 얽힌 이야기들, 바이런이 남겼다는 자서전을 찾기 위한 학자들의 열정과 좌절 등 소문으로만 전해지는 문서, 원서들을 찾기 위한 노력들이 흥미롭게 전개된다.
또한 2부 ‘문학사의 미스터리’에는 문학작품 속에 숨겨 있는 비밀, 유명 작가들의 미스터리한 삶을 파헤치는 학자들의 끈질긴 연구와 노력이 담겨 있다. 마치 소설을 읽는 듯한 재미가 쏠쏠하다.
보통 사람들이 보기엔 전혀 궁금하지도 재미있지도 않지만, 학자들에겐 그야말로 필생의 과업이 되었던 수많은 일화, 이러한 것들이 결국은 영문학의 역사를 바꾸어왔고, 우리에겐 소설과도 같은 즐거움을 주고 있다. 이러한 그들의 노력을 보며 문득 한국의 기록문화랄까, 기록의 습성을 돌아보게 된다.
흔히 5천년의 역사 어쩌구 하지만 우리처럼 기록에 게으른 이들이 있었나 싶다. 물론 우리 조상들이야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각종 야사들을 통해 꼼꼼한 심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어떨까? 세월이 하 수상하고, 먹고 사느라 바빠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기록에 대한 정성이 상대적으로 덜하지 않았을까. 그냥 문득 들었던 생각이다. 내가 어릴 적 살던 동네의 그 모습이 사진 한 장에라도 남아있다면, 내가 예전에 읽었던 책들이 아직도 보관되어 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기록하지 않는 민족은 곧 사라진다는 말이 있다. 과거에 대한 존중과 그를 기반으로 한 현재와 미래에 대한 설계, 이것의 중요함을 강조하는 말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좋았든 나빴든 과거를 보다 소중히 담는 정성과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제대로 된 대통령 기록관 하나 없다는 것이 단적으로 보여주지 않나.
물론 기록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야 백 번 이해야 한다만….
** 이 리뷰는 온북리뷰에르로 작성한 글입니다. http://www.onbooktv.co.kr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