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이 세계를 구한다
마하트마 K. 간디 지음, 김태인 옮김 / 녹색평론사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의 봉사를 국가가 만든 경계선 너머 우리의 이웃들에게로 확장하는 데는 아무런 제한이 없다. 신은 그런 경계선을 만든 적이 없다”

간디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간디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비폭력 무저항의 민족주의자로만 알고 있는 간디는, 또한 인간불평등 사상을 극복하고, 착취와 억압으로 작동하고 있는 사회 경제적 시스템을 극복하려 애쓴 풀뿌리 사상가이기도 했다.

책은 인도가 가야 할 길에 대한 간디의 오랫동안의 철학이 담겨 있다. 스와라지(자치, 독립)의 중요성, 아힘사(비폭력)와 스와데시(자립경제)의 세계를 향한 그의 염원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아울러 그는 기계의 발달로 인한 인간성이 황폐화를 우려한다. 노동이 단순한 효율성의 증대가 아닌 사랑이 담보된 노동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람들은 가장 매력적이고 이상적인 조건에서만 일해야 하고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를 이롭게 하기 위해서, 욕심이 아니라 사랑이 동기가 되어 일해야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노동 조건의 변경이다. 부를 향한 이 미친 듯한 돌진은 중단되어야 하며, 노동자들은 생계를 위한 임금만이 아니라 단순한 노역이 아닌 매일의 일거리를 보장받아야 한다. 이런 조건 하에서 기계는 국가나 기계를 소유한 사람에게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작동시키는 사람들에게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개인이 유일한 최고의 고려 대상이다. 개인의 노동을 줄이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하며 욕심이 아니라 정직한 인도주의적 배려가 동기가 되어야 한다. 욕심을 사랑으로 대체하면 모든 것이 제대로 될 것이다” 

평택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간디의 말은 무참하다. 이 책은 1962년에 간행되었다. 그 당시 우리의 노동 현장은 어떠했을까. 전태일 열사의 죽음이 모든 설명을 필요 없게 만든다. 그랬다. 우리는 전태일 열사의 죽음을 아무 의미 없게 만드는 데 전력을 기울여 왔다. 고작 청계천 다리 위에 그의 동상만 세웠을 뿐이다.

간디는 “다른 생명에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고대 이래 인도의 위대한 사상 유산에 대한 가장 겸허한 충실성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그에게 산업주의 경제와 근대적 과학기술에 의존한 서양 문명은 참된 의미에서의 문명이라는 이름에 값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서양문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가 “그런 게 있다면 참 좋겠지요”라고 답한 이유이다.

간디는 영국의 식민지 시대를 통해 비참한 운명을 강요당한 인도의 70만 개의 농촌마을의 부활과 회생 속에서 참다운 독립과 해방, 진정하게 새로운 인류 문명의 가능성을 보았다. 그는 물레를 돌리며 참다운 자치에 기반한 자립적 마을을 꿈꾸었다. 지금 우리에겐 어쩌면 너무 순진해 보이는 간디의 구상은 그러나 더욱 뼈아픈 자성을 이끈다. 외국의 수입이 없이는 단 하루도 버틸 수 없는 품목이 우리에겐 과연 얼마나 많을 것인가. 당장 석유가 수입되지 않는다면? 아마 패닉이 밀어닥칠 것이다. 해운대를 습격한 메가 쓰나미 정도의 파괴력이지 않을까.

간디의 수공업 중심의 마을 자치에 대해 현실성이 없다고 느낀 것은 비단 우리만이 아니었다. 네루 수상을 비롯한 당시 인도의 지도부는 간디의 주장에 대해 수긍은 하면서도 비현실적이라 느꼈다. 그리고 어느 덧 지금의 거대한 인도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렇담 지금 인도는 행복할까? 아직도 우리 인구의 몇 배가 넘는 이들이 굶주림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수많은 농부들이 자살하는 국가 인도. 신비로움에 가려진 굶주림과 부패. 이것들 역시 산업화와 개발이 가져온 어쩔 수 없는 “부수적 피해”라고 할 것인가? 글쎄, 아마도 간디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자발적으로 불러온 재앙일 뿐이다.

간디는 근대적 산업화, 기계화는 “인류에게 무엇보다 큰 화근”임을 주목하여, 언젠가 “반드시 인류에게 저주가 될 날이 올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미 저주는 시작된 지 오래다. 오래된 미래가 아닌, 새벽의 저주다. 해는 벌써 중천에 솟았다.

각 지자체 별로 특산화한 쌀이 많다. 종류가 하도 많아 기억도 힘들다. 저장한 쌀이 너무 많아 버리든지 북에 지원해주자는 말들도 나온다. 얼핏 보면 우리가 쌀이 넘치는 나라라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른바 압축적 경제성장의 결과, 농업, 농촌, 농민의 전면적인 몰락과 함께, 식량자급률 25퍼센트 수준에서 외국농산물에 대한 의존 없이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게 된 위태로운 상황이 바로 지금 우리의 모습이다. 중국산 아닌 먹거리를 찾아보시라. 혹시 당신은 돈이 넘쳐 모조리 국산 먹거리만 드시는가? “행복한 줄 알아 이것들아~!!”

그 잘난 세계화-사실은 식민주의의 세련된 이름이지만-의 지배 밑에서 민중의 삶은 벼랑 끝에 몰리고 인간 생존의 자연적 토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땅을 사랑했을 뿐이에요”라고 말했던 분을 장관으로 모실 걸 그랬다. 암튼 자연적 토대가 붕괴되는 지금, 또 다른 대규모 자연 학살을 22조 원의 돈을 박아가며 하려 하는 것이 현 우리의 모습이다.

간디의 물레 사상. 우리가 입을 옷이라도 우리 손으로 만들자는 소박한 사상. 한 집에 물레 하나씩 가져 그것으로 생계를 꾸리자는 그 소박한 사상이 더욱 절실한 이유다. 간디는 단순함이 보편성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수백만의 이익을 위한 것은 어떤 것도 많은 학식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학식은 오직 소수만이 갖출 수 있고, 따라서 부자들에게만 이익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이다. 온갖 어려운 통계와 자료를 들이밀며, 우리에게 공범이 되자고 유혹하는 “머리 좋은” 이들을 경계해야 하는 것이.






자연을 파괴해가며, 환경오염의 주범인 킬러 자동차를 팔기 위해 우리의 쌀을 포기하는 지금. 과연 우리 마음속의 물레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을지. 우리 모두 한 번쯤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으면 우린 새벽의 저주를 맞이할 지도 모른다. 어쩜 그 저주가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농부가 멕시코에 가서 영어로 외치고 자결한 그 순간부터 말이다. 일독을 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