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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이방인
제임스 처치 지음, 박인용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당신이 사는 세상은 어떻소?”
“듣는 것이 곧 무기를 만드는 모루와 망치인 곳이지. 남의 말을 들음으로써 힘을 키우고 공격을 준비한다오. 누가 이야기하는 것을 귀 기울여 들으면 그 사람의 약점을 알아차릴 수 있소. 그를 죽일 수 있는 지도가 그려지는 셈이지. 그래서 우리들은 이야기를 하되, 중요한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 해요. 누가 들을지 모르기 때문이오.”
- 117p
원산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언젠가 사무실에서 원산 해수욕장에 대한 잡지 기사를 읽기는 했다. 사진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미소를 짓고 있었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잡지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항상 크게 미소를 짓는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그랬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가난했지만 아직 희망은 남아 있던 옛날 1960년대의 잡지였다.
- 153p
“너 자신이 죽을 수도 있고, 어리석게 너를 믿은 사람을 수용소에 보낼 수도 있는 거다. 왠지 아느냐? 네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눈치가 없기 때문이다. 내 손자가 그런 바보였다니…….”
(중략)
“네 주위를 돌아봐. 우리가 원했던 게 바로 이런 거냐? 이걸 위해 우리가 일본놈들과 싸웠고, 이걸 위해 네 아버지를 겨울날 아침 죽으러 내보냈다고 생각하느냐? 젠장, 네 주위를 돌아보라니까!”
- 175p
“우리가 처음부터 다른 나라에 비해 뒤떨어졌다고, 거지처럼 살았다고 믿는 사람들 때문이야.”
할아버지의 얼굴은 이렇게 말할 때는 붉게 달아올랐다.
“미국인도, 중국인도, 일본인의 도움 없이도 우리 민족은 수백 년 동안 혼자서 가구를 만들어 왔다. 아름다운 가구를 말이지. 미국이 아직 나무로 뒤덮여 있고 야만인들이 동물 가죽을 옷 삼아 걸치고 다닐 때야. 그들이 나무에 대해 무엇을 알 것이며, 나무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그것의 정령에게 노래를 불러 줄 수는 있겠느냐? 그들에게도 참된 목수가 있을까?”
- 223~224pp
난 북한을 전공했다. 그런 학과가 있었나 하는 분들이 언제나 있다. 그렇다. 있다. 97학번이다. 재수를 해서 들어갔으니 내 나이가 어느 정도인지는 대략 알 것이다. 문민정부 그리고 국민의 정부(둘 다 헛소리다. 문민정부가 문민을 위해 한 일은 대략 난감에다, 한반도를 전쟁 바로 직전까지 몰고 갔을 뿐이다. 그리고 다들 아시다시피 지금의 경제 위기의 예고편인 IMF나 불러왔다. 참고로 박정희 사망 후 후계 체제를 고민하던 미국에게 김영삼은 “무능하다”고 이미 분석된 인물이었다. 어허 통재라. 국민의 정부 역시 마찬가지다. 국민의 정부가 뭔가? 제2의 건국? 그 전엔 국가가 없었나? 국가의 권력이 국민들을 통제하지 못했나? 우리는 너무나 과잉된 국민국가 아니었나?)를 거치면서, 특히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 정책으로 남북관계의 급진전이 이루어지면서 절감한, “도대체 북에 대해 아는 이들이 왜 이리 없어?”라는 인식으로 몇 개의 학교에서 북한학과라는 것을 만들었다. 난 그런 학교 중 하나의 제1기 학과생이었다. 지금은 그 학교가 하는 꼴이 너무 가관이라 “나 이 대학 나왔어요”라고 말하지 못한다. 권력 추종, 그리고 오로지 돈을 위한 ‘효율적’ 교육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역겨운 냄새가 나는 학교다. 하긴 뭐 원래 친일파가 만든 학교인데, 뭐 어디 가겠나?
암튼 학사 4년, 그리고 이후 한참 있다 다시 대학원(다른 학교)을 들어가 또 2년. 이렇게 공식적으로는 6년, 비공식적으로는 거의 10년 정도 북을 공부했다. 사실 공부 했다기보다 그냥 북에 대해 궁금한 부분을 타인의 도움과 혼자 삽질(앗. 최대의 욕설)로 점차 알아갔다고 할까. 물론 난 지금도 북을 공부한다. 그냥 관련 자료나 책을 읽고, 강연을 찾아가고, 기회가 닿는 대로 북을 방문하는 정도이지만 말이다.
여전히, 아직도 북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사실 한 국가에 대해 연구한다는 것은 일생을 바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게 그런 깜냥이 없음은 진작 알고 있다. 난 그냥 분단된 나머지 반에 대해 궁금했고, 그들을 알아야 우리를 알 수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 생각엔 아직 변함이 없다. 그런 면에서 참 이명박 정권은 안쓰러울 뿐이다. 똑바로 해 이것들아~
자, 오늘도 말이 많다. 책 이야기를 하자. 제임스 처치라는 가명으로 소설을 펴낸 저자는 전직 정보요원으로 수십 년간 북을 비롯한 아시아에서 활동한 인물이라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그 외에 저자에 대한 정보는 철저히 비밀이다. 그는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에서 활동했던 경험과 만났던 사람들, 그리고 남북한에서 근무하면서 쌓인 한국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책을 썼다고 밝혔다.
책은 북을 배경으로 한 추리소설이다. 나름 시리즈물로 ‘평양의 이방인’(원제는 고려 호텔의 시체) 이후에도 주인공인 ‘오 수사관’을 등장시킨 2편의 소설을 더 출간했다. 현재는 4부를 준비 중이라 전해진다. 일단 이전에 북을 배경으로 한 추리소설이 전무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이 나름 신선함을 주고 있긴 하다. 하지만 아쉬움은 감출 수 없다. “역시, 어쩔 수 없구나”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저자는 말한다. “북한에 가기 전에 북한에 대해 많은 것을 연구했지만 처음 북한에 도착하는 순간 내가 그동안 가졌던 지식과 고정관념이 다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북한에서는 마치 60~70년대의 한국에서처럼 우리가 잃어버린 순수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순수함. 좋은 이야기다. 60년대, 70년대의 남한. 순수했지 싶다. 그는 한반도에 대한 강한 애정을 표현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불편하다. 왜 불편한지는 앞서 인용한 문장들을 조금만 주의 깊게 읽어보면 알 수 있다.
미국을 비롯한 이른 바 서방세계에서 바라보는 북은 부시 정권이 만들어놓은 불량국가의 이미지 이전에 이미 어느 정도 만들어져 있었다. 소련의 위성국가,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세습 독재체제, 전체주의 국가 그리고 아무도 내막을 알지 못하는 신비의 나라.
굳이 오리엔탈리즘을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 요즘은 사이드 이야기를 하면 오히려 옥시덴탈리즘을 들먹인다. 그것도 서양인들이 아닌 남한의 먹물들이 그렇게 들먹일 때는 정말, 휴우. 매월 26,800원을 주고 시원하게 때려주고 싶다.
북은 아직도 수수께끼에 둘러싸인 최후의 국가 중 하나다. 체제의 특성상 그런 것도 있었지만, 사실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북에 관심도 없었다. 핵을 만들어 세계를 놀라게 하니 그제야 ‘아, 맞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나라가 있었지’ 했을 정도? 물론 7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서방세계에서는 코리아 하면 남보다는 북을 먼저 떠올리긴 했다.
암튼 저자가 어느 정도 북에 대한 지식을 갖춘 것은 알겠다. 그리고 그래, 북에 대한 애정이 있다는 말도 믿어준다. 하지만 책은 북에 대한 호기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물론 첩보나 추리소설로서 재미가 아주 없다는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 재미도 있었고, 시리즈로 계속 나온다면 뭐 읽어볼 의향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적어도 서구인들의 시각에서는 그렇다는 것. 북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거나 공부를 했던 이들에게 이 소설은 그야말로 “뭐야, 장난 하냐?”정도가 아닐까.
더구나 2006년 이 책이 미국에서 출간됐을 때 미국 언론의 반응을 보면, “역시! 이러니 부시가 대북정책을 고따위로 했지!”라는 생각을 안 할 수 없다. “부시 행정부 외교안보팀의 취침 전 필독서”(워싱턴 포스트), “지난 50년간 북한을 알기 위한 미국의 어떤 노력보다도 훌륭하다.”(뉴트 깅리치 전 미국 하원 의장, 작가), “부시 대통령도 읽어야 한다. 북한을 이해하고 싶다면.”(마이클 브린 전 가디언 서울 특파원), “북한이라는 퍼즐을 풀고 싶은 사람은 이 소설을 보라”(로이터). 이 정도 되면 정말 정말 막 가자는 것이요. ‘미친 거 아냐?’가 된다. 허구의 소설 하나가 지난 50년 간 북한을 알기 위한 미국의 어떤 노력보다 훌륭하단다. 아 통재라. 찌라시와 꼴통은 비단 세계 공통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된다.
결론을 짓자. 심심풀이로 보기엔 괜찮다. 난 어쩔 수 없이 북 관련 도서들이 나오면 일단 관심을 갖게 되고 거의 읽어보려 하지만, 그냥 북에 관심도 없는 분들이라면(과연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럴 수 있을까 싶지만) 안 보셔도 될 듯. 차라리 이응준의 『국가의 사생활』이 기대 만땅이다. 무지 공부하고 준비한 작품이라는데, 기대가 크다.
『평양의 이방인』. 한동안 북을 소재로 그야말로 소설을 쓰신 김진명 보다 일면 나은 부분도 있지만, 북에 대한 호기심 충족, 그리고 교묘히 숨어있는 북에 대한 서구의 오리엔탈리즘. 그것은 어쩔 수 없이 드러난다. 책을 덮으며, ‘그럭저럭 시간 때우기에는 좋네’라고 느꼈지만, 한 편으로는 ‘이런 책을 미국인들이 읽고 북을 판단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드는 것은 나 뿐만은 아닐 듯하다.
제발, 북을 무시하거나 비난하기 전에 제대로 좀 알려는 노력을 먼저 하자.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