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그날 밤 아버지는 형에게 선언했다.

“너는 공군사관학교에 가야 되겠다.”

형이 말했다.

“요샌 육사가 뜨는데요.”

나는 폴짝폴짝 뛰며 소리쳤다.

“아버지 나는요? 나는 자라 뭐가 될까요?”

아버지는 큰 손바닥으로 내 얼굴을 밀어내며 말했다.

“너는 그냥 잘 자라거라. 그게 애들이 할 일이야.”

- 『스카이 콩콩』중에서 -


소설 읽기를 좋아하지만, 문학에 대한 깊은 지식이 없는 나는 소설의 끝자락에 걸려 있는 비평가의 분석 글을 이중적인 감정을 가지고 읽곤 한다.

“뭐야, 어떻게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따위 해석이 나올 수 있어?” 혹은

“아~! 그렇게 깊은 뜻이?”

가지고 나온 책이 갑자기 끝나버려, 남은 오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고민하던 중 들어간 서점에서 순전히 제목만 보고 집어든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 역시 책의 끝자락에 매달려 있는 김동식의 해설은 윗 두 가지 반응이 적절히 섞이도록 만들었다. 즉 내 나쁜 머리로 이해가 되기도 하고, 또 아니기도 했다는 말씀.

결론적으로 참 재미있게 읽었다. 페이지 넘기는 것이 아까워 조금씩 아껴 읽었으니, 작가의 구라 실력과 문장의 비범성은 인정해야겠다.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작인 『노크하지 않는 집』을 포함한 9편의 소설은 일단 지루하지 않다. ‘달려라, 아비’ ‘스카이 콩콩’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 등은 킥킥 거리며 읽었고, ‘나는 편의점에 간다’ ‘그녀가 잠 못 드는 이유가 있다’ ‘영원한 화자’ ‘사랑의 인사’ ‘종이 물고기’ ‘노크하지 않는 집’은 짧은 내용임에도 깊은 여운을 남긴다. 김애란 소설집을 읽고 느낀 하나의 심상은 외로움에 대한 순응 혹은 반항, 체념 그리고 사랑에 대한 미련이다.

김애란의 소설에는 ‘아버지’가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이 아버지들은 당최 온전하지가 못하다. 어머니가 처음 잠자리를 허락한 밤 피임약을 사러 신나게 달리던 아비는 그 날 밤의 역사로 딸(주인공)이 생기자 역시 신나게 달려 나가 결국 돌아오지 않는다. 순돌이 아빠처럼 전파상으로 수십 년을 보낸 아버지는 큰 아들이 안경을 쓰고 돌아다닌 것을 몇 년간 보았으면서도 정작 아들의 시력이 나쁜 걸 모른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딸네 집에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아버지는 하루 종일 방안에 처박혀 티브이만 본다. 하반신은 이불 속 어딘가에 묻은 채. 이 밖에도 놀이동산에서 무정하게 자식을 버리고 도망간 아비, 아들에게 복 요리를 사주며 그 날 밤, 잠을 자면 아들이 죽는다며 공갈치는 아비 등 평범하다고는 보기 어려운 아비들이 주구장창 등장한다.

하지만 주인공들은 이런 아비들을 증오하거나 혹은 극복하려 하지 않는다. 이들을 긍정하며, 결국 자기 자신을 긍정하게 된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비가 지금도 지구 어디에선가 달리고 있을 것이라 믿는 딸은 꿈속에서 아비에게 멋진 선글라스를 끼워준다. 맛나게 먹은 복 요리 때문에 밤을 새워야 하는 아들은 아버지에게 이발을 부탁하며, 자신의 탄생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티브이 중독자로 살아가는 아비에게 밖에 나가 노시라며, 딸은 티브이 위에 돈을 올려놓는다.

김동식은 해설을 통해 그렇다면 왜 나를 버린 아버지를 생명의 도약이라는 이미지와 결부시키는 것일까 물은 뒤 이렇게 답한다.

아버지가 예뻐서일 리가 없다. 아버지와 관련된 정신분석학적 드라마의 재현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그것은 삶의 고통을 긍정하지 않겠다는 숨은 의지이며, 생명의 고양을 꿈꾸는 자기 자신을 위한 배려이다.

이는 아버지에 대한 긍정을 통해 정신적 상처를 만들지 않으려는 즐거운 의지다. 그리고 자신의 무의식에 대한 자기 배려다.

김애란의 소설은 또한 철저히 타자화된 ‘나’에 집중한다.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나는 어떤 인간인가에 몰두한다. 낯선 나에 당황스러워 하고,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어디에도 없는 나를 찾아 여행을 떠난다. 김동식은 김애란의 소설에서 ‘나’는 영원회귀와 생명의 도약이 잠재적으로 공존하는 장소의 이름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타자화된 나를 찾는 길은 다름 아닌 후기산업사회의 철저히 익명화된 세상에서 이루어진다. 편의점을 갈 때마다 자신이 그 어떤 고상한 사람이라도 되는 척 상상하는 주인공은 정작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는 이가 나타나면 당황하고 귀찮아하며, 거부한다. 철저히 상품으로 환산되는 세상에 자신 역시 하나의 상품처럼 눈에 띄고 싶지 않아서 일까, 아님 그 반대일까. 나는 편의점에 간다. 하지만 편의점에는 너무나도 많은 ‘나’가 있다.

「노크하지 않는 집」을 보자.

주인공 여자는 대학가 주변 건물 1.5층에 산다. 세면, 목욕, 용변, 빨래 등 주로 물과 관련된 일은 공동의 장소에서 해결을 하고 각자의 공간으로는 단칸방을 갖는다. 5개의 방에 5명의 여자들이 살고 있지만. 그들은 얼굴을 마주치는 일이 없다. 여자 주인공이 어느 날 돌아와보니 얼마 전에 잃어버린 구두가 방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누구의 짓일까. 다른 사람들의 방에 들어가 보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두 가지의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첫 번째는 5개 방의 열쇠가 모두 같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각 방에 비치된 물품과 양태가 동일하다는 것이다.

나는 없다. 아니, 많은 나들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똑같은 생활용품들이 동일한 방식으로 배치되어 있는 5개의 방에서, 그녀가 본 것은 무엇일까. 1.5층 단칸방에서 혼자 살아가는 여성들이 속하게 될 계층과 거기에 상응하는 문화적 취향이 있을 따름이다. 달리 말하면 나는 실존이 아니다. 자신의 내부에 또는 과거의 시간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근원적인 실존은 없다. 김애란의 소설에 의하면, 나는 아비투스의 구성물이다. 나는 관찰하는 섬세한 시선으로도 존재하지만, 그와 동시에 특정한 계층의 아비투스로서 공간적으로 발현된다. 나는 안과 밖에 동시에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소설에서 관찰의 시선이 갖는 지위는 대단히 압도적이다. 하지만 김애란의 작품들은 관찰자의 시선이 갖는 계급성을 전복적으로 탈은폐한다.

장기하와 얼굴들이 부른 ‘싸구려 커피’의 명 가사가 떠오른다. “이젠 내가 장판인지, 장판이 난지도 몰라”. 가끔씩 느낄 때가 있지 않은가. 내가 누구인지. 아님 누가 나인지.

단편 소설이 갖는 미덕은 비교적 짧게 감동을 얻을 수 있다는 편리함과 다양한 에피소드를 한꺼번에 경험할 수 있다는 점 아닐까. 성석제의 글 역시 장편도 좋지만 단편도 쏠쏠하다.

그러한 측면에서 김애란의 소설들은 나에겐 의외에 소득이었다. 그리고 즐거웠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사는 이곳에서 “그 중 하나”로 살아가는 내가, 가끔은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내가 무엇인지, 무엇이 나란 존재인지 고민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무모가 비관과 자기 체념이 아닌 긍정과 아이러니의 즐거운 회귀가 될 수 있다면, 썩 유쾌하지 않을까.

유쾌한 경험을 하도록 이끌어준 김애란에게 감사한다. 그가 유쾌한 ‘뒤끝’이 있는 작가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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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09-08-23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리뷰를 보니까 스카이 콩콩 을 다시 읽고 싶은 충동이 드네요 ^^

메틀키드 2009-08-24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핫...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