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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건너는 법 - 서경식의 심야통신
서경식 지음, 한승동 옮김 / 한겨레출판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생존자들의 증언은 존중받지 못했다. 프리모 레비들, 아우슈비츠 생존자들만이 아니다. 일본군 ‘위안부’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살아 있는 증인들은 존중받기는커녕 “돈 타낼 목적으로 거짓말하고 있다” 따위의 욕까지 먹고 있다. 일본에서는 최근 10년간 반동화가 급격히 진행돼 과거 침략이나 식민지 지배를 미화하려는 우파세력이 정권을 쥐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공공연하게 핵무장을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지금이야말로 최대한의 예민함을 발휘해 증인들이 미래를 위해 울리는 ‘불길한 경종’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다.
- 260p,「참극 생존자들이 세상을 저버리는 이유」, 2006 -
지난 4월 5일 북의 장거리 로켓 ‘은하2호’의 발사 이후 일본이 보인 반응은 패닉에 가까웠다. 자국의 영공 위로 로켓이 날아갔으니 단순히 넘어갈 문제는 분명 아니었지만, 내가 말하는 패닉은 겁나고 무서워서가 아니라 너무나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는 것이다. 물론 일본의 일반 국민들은 그동안 일본 정부가 세뇌 시키다시피 한 ‘북한 공포증’으로 정말 무서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북의 로켓 발사에 매우 즐거워하고 있다. 겉으로 내색은 안 하지만 말이다.
일본은 그동안 전력을 보유하지 않고, 교전권을 포기한다는 헌법 제9조를 수정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헌법 9조는 서경식 선생의 말대로 일본이 과거에 저지른 침략전쟁을 두 번 다시 하지 않겠다는 국제적 공약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선생은 일본이 이 헌법 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다시금 일본이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로 돌아가려 하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일본에게 북한의 존재는 한없이 고마울 수밖에 없다.
서경식 선생의 책은 지난번에도 다룬 바 있다. 그는 제일조선인 2세로서 자신이 살아온 일본과 자신의 조국인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부단히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이다. 책은 그런 그가 2005년부터 2007년까지 한겨레신문에 연재했던 칼럼 ‘심야통신’을 묶은 것이다. 칼럼을 통해 그는 디아스포라적 상상력으로 우리의 역사와 현재, 일본을 비롯한 동북아 나아가 전 세계의 평화를 염원하고 있다.
그의 두 형이 군사정권 시절 조작된 시국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선생은 그러한 자신의 형들의 경험을 통해 조국의 실체를 깨달을 수 있었고, 자신과 같은 재일조선인들의 삶, 그들을 마치 없는 이들처럼 여기는 조국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프리모 레비 등 역사의 참혹한 현장을 증언한 이들의 죽음을 통해 과거의 올바른 인식과 용서가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디아스포라라는 단어를 우리 사회가 비로소 인식하게 된 계기를 만드는데 많은 역할을 한 선생은 디아스포라적 관점, 마이너리티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세상, 국가에 많은 중요성을 부여한다. 소수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곧 다수의 권리마저 박탈하게 된다. 이미 우리 사회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우리는 내 일이 아니라고 다른 이들의 고통에 눈을 감지만, 곧 그 ‘다른 이’들은 내 자신이 되었음을 느끼게 된다. 이것이 소수의 고통에 눈을 돌리고 그들의 고통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역사는 단지 역사일 뿐이라 여기고, 그 역사가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있다는 것은 망각한다. 아울러 이른 바 주류가 만들어 놓은 단 하나의 역사에게 모든 정당성과 권력을 넘겨주고 그밖에 것들은 철저히 무시하거나 지워버린다.
우리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일본이 항복한 사실에 좋아하지만 원폭으로 일본인들과 함께 숨져간 3만이 넘는 재일동포들은 잊는다.
위안부 등 일본의 잔악한 만행에 대해서는 분노의 목소리를 높이지만 베트남에서 우리 군대가 저지른 참혹한 만행은 잊으려 한다.
우리는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고, 그것에게만 역사라는 이름을 붙이려 한다. 참으로 가증스럽고, 이기적인 행동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주류의 역사만이 역사가 될 수는. 택도 없는 소리다. 역사는 모든 동시대인들이 겪었던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서경식 선생의 글을 읽으면 이 점이 명확해진다. 우리가 무엇을 기억해야 하고 누구를 기려야 하는지, 또한 우리에게 강압된 역사, 왜곡된 역사를 주입하려 하는 주체들이 누구인지, 정작 우리는 어떠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 그의 글은 알려준다. 이것이 불편하지만 내가 그의 글을 꾸준히 읽는 이유이다.
일본의 온갖 만행 중 가장 추악한 것은 자신들의 과거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전무하다는 사실일 것이다. 일본은 단 한 번도 과거 자신들로 인해 고통 받은 이들에게 진실된 사죄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시대의 증인들이 자연적으로 소멸해감에 따라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작업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단언하건대 이처럼 일본이 과거에 대한 화해를 진심으로, 온전히 하지 못한다면 동북아의 평화는 없다.
하지만 문제는 일본만이 아니다. 정작 우리도 우리의 역사를 맘대로 왜곡하고 일방화하려 한다. 한 줌도 안 되는 권력자들의 짓이다. 서경식 선생은 일본 국민들이 일본 정부와 우익 세력으로 인해 점차적으로 망각의 늪에 빠져들고 있다고 지적하지만, 그것은 비단 일본 국민들만이 아님을 요즘 소름이 돋을 만치 느끼고 있다.
한국 야구의 선전이 그리고 김연아의 우승이 눈물겹게 아름답고 자랑스럽지만, 오늘도 힘들게 하루하루 삶을 이어가는 이웃들의 이야기는 이미 들리지 않는다. 정부는 어느 순간 슬쩍 태극기를 시내 곳곳에 매달아두고 있다. 꼭 국경일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태극기는 우리에게 애국심을 강요하고, 국가에 대한 충성을 현 정권에 대한 충성으로 연결시키려 한다. 치졸한 짓이다. 국가에 대한 애국심 역시 실체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알지 않는가. 아직도 이승만을 국부라 여기는 이들이 존재하는 지금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을 사랑하는 것을, 국가는 자신에 대한 충성, 사랑으로 환원시키려 한다. 그리고 그러한 짓거리에 국민들은 알든 모르든 함께 장단을 맞춘다. 북이 겪고 있는 어려움은 보이지 않고, PSI에 전격 참여하겠다는 한국 정부의 행동이 정의인 것으로 판단한다. 우리 역시 망각의 늪에 빠져들고 있다.
시원한 술 한 잔이 그리운 목마른 세상이다. 단순히 노래 가사로 들리지 않는 요즘이다. 서경식 선생과 같이 시대의 어두움을 경계하고 역사의 망각을 거부하는 이들의 노력은 오늘도 지속되고 있다. 거대한 권력에 맞서 싸우는 이들의 모습은 때문에 눈물겹고 때론 전사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 시대의 전사는 수많은 민중이다. 이웃들과 함께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것이 이들이 원하는 소박한 꿈이다. 이러한 꿈을 짓밟으려 하는 것이 누구인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들은 우리에게 “다 잘 될 거야”라고 떠든다. 그리고 역시나 닥치고 하라는 대로 하라고 윽박지른다. 그 다 잘 될 거라는 공익광고를 족벌 체제를 갖춘 위대하신 삼성이 협찬하는 우스운 나라가 한국이다.
때문에 이 우스운 나라에서 서경식 선생과 같은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너무나 고마운 일이다. 그리고 나 역시 적어도 스스로 부끄러운 인간이 되지는 말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무관심이 커다란 죄악이 되어가는 시대다. 아니 언제나 그랬다. 무관심으로 자신을 합리화하는 치졸한 짓은 하지 말아야 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스포츠 열풍이라고 떠든다. 대한민국을 이끈다는 이들의 어처구니없는 작태에 질려버린 국민들은 스포츠에 열광한다. 스포츠를 통해서라도 현실의 고통을 잊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국가는 그러한 국민들의 무관심에 오히려 고마워하고 있다. 전두환이 프로 야구를 만든 것은 그에겐 너무나 적절한 행동이었다. 지금도 우리는 현실에 질려 다른 것들을 찾는다. 연예인들의 쓸데없는 잡담에 킬킬거리고, 조금만 심각한 내용이라도 나온다면 이내 귀찮아한다. 이 더러운 세상 어차피 어찌 할 수 없다고 체념한다. 이 우울한 시대를 진정 건너는 법은 무엇일까.
서경식 선생의 책은 누구에게나 권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한다. 그 정도로 책에 대한 선생에 대한 믿음이 나에겐 있다. 책을 옮긴 한겨레 한승동 기자에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기구한 그의 전체 가족사가 우리 민족 현대사의 일부였다. 아니, 일부라기보다는 그 축약판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1000년 동안이나 들판에서 벌어지는 중생들의 삶을 지켜봐온” 말없는 관촉사 미륵보살입상처럼 그는 어느 날 문득 그 모든 것의 본질을 한순간에 파악해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디아스포라적 상황이야말로 그에겐 오히려 창조와 자기확장의 절호의 발판, 무한히 열린 가능성의 장이 됐다. 자신의 의지로 그렇게 만들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의 세계는 북조선(북한이 아니다. 우리는 아직도 미완의 조선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북은 또 하나의 한국이 아니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유럽, 미국으로 확장되고 계속 깊어지고 있다. 한반도 남쪽에 갇혀 있는 우리야말로 눈앞에 보이는 게 전부인 양 착각과 환상 속을 헤매는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닌가.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강자들의 게임이 빚어낸 아주 아슬아슬한 균형 위에서 하루살이처럼 파닥거리고 있다. 제대로 알고 대처하지 않으면 참혹했던 과오는 언제든 되풀이될 수 있다. 서 교수의 글은 끊임없이 그걸 일깨운다.
보수 정권이든 개혁 정권이든 공통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은 국가 구성원들의 안위와 행복을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국가 전체 구성원들이 골고루 행복해질 수 있도록 국가 운영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는 일이 필요하다. 하지만 현 정부의 모습을 보면 당장 5년 후의 미래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는 오직 현재만을 위한(그것도 제대로 하는지는 의심스러운) 질주를 계속한다. 성찰 없는 대북 정책은 한반도 정세를 더욱 위험하게 만들고 있다. 입만 열면 주절거리는 국제적 협력 강화는 정작 누구를 위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역사의식이 없는 이들이 국가를 이끌게 되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보여주고 있다.
평화를 위해서는 타자에 대한 상상력이 절실하다고 선생은 말한다. 저 멀리 팔레스타인에서, 이라크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고통 받고 있는 아이들의 눈물을 우리 아이들의 눈물과 다르게 생각하지 않을 때 진정 평화는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용서라는 말을 감히 입에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 나라 사람들은 역사의 고통을 잊어버린 걸까? 고통을 잊지 않는다는 건 과거에 얽매여 가해자를 계속 원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의 확실한 평화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