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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한 아름다움
심상정 지음 / 레디앙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은근슬쩍 정부가 경인운하 사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한 촛불집회 당시 “국민이 원하지 않는다면 대운하 사업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던 대통령은 그러나 경제 위기를 핑계로 결국 우리의 산천을 파헤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역사적으로 유래가 없는 규모로 말이다. 결국 믿을만한 사람을 믿었어야 했다는 생각밖엔 들지 않는다.
지난 2008년 4.9 총선에서 심상정 의원은 낙선했다. 민주노동당의 갈등과 그 결과 탄생한 진보신당을 이끌기까지, 사실 그가 지역구를 챙기며 선거운동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심 의원은 근소한 차이로 선전했다. 물론 승패에서 그것은 별 중요성이 없을지 모른다. 심상정 의원은 그렇게 다시 현장으로 돌아왔다.
총선에서 패배한 직후 이른 바 거물이라 불리던 사람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들 자신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리라 믿고는 싶지만, 지금과 같은 시국에서 그들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 많던 인물들은 어디에 갔을까.
하지만 심상정은 오히려 낙선 이후 더욱 자주 그리고 활발히 뛰고 있다. 서민들과 비정규직 노동자, 그리고 모든 국민들의 아픔을 함께 하며 살아가고 있다. 국회에 다시 입성하지 못했을 뿐이지, 여전히 그는 전사이고 또한 정치인이다.
책은 심상정이라는 인물이 지금까지 성장해 온 과정을 솔직 담백하게 담고 있다. 물론 약간의 자기 자랑(^^)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는 정말 약과라는 생각이다. 그 예로 지난 해 이명박 정부는 국정 TV를 통해 자신의 1년 외교성과 중 중요한 것들로 “주한미군 계속 주둔”, “미국의 무기 구매 국가 최고 대우 받기로” 등을 들었다. 수치가 아닌 자랑으로 말이다. 그리고 걸작 중 걸작이 있었으니,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서로 친구라 부를 정도로 친하다는 점을 성과이자 자랑으로 내세웠다. 유치의 수준을 넘어 정신적 분석이 필요한 상황이다. 제 정신이 아니다.
이에 비하면 심상정 의원의 고백 혹은 자랑(?)은 사실에 입각한 그리고 몸으로 직접 뛰어 이루어낸 성과라는 점에서 전혀 낯간지럽지 않다. 오히려 불가능한 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그의 투지와 열정에 탄복할 따름이다. 그는 입만 살아 나불거리는 것들이 아닌 진정한 실천적 정치인이자 운동가인 것이다.
그런 그를 우리는 버렸다. 반론의 여지가 없다. 다시금 국회는 쓰레기장이 되었고, 국민들은 자신들이 뽑은 인간들이 여의도를 개판으로 만들고 있음을 한탄하고 있다. 어이없는 일이다. 이렇게 될 줄 모르고 그 사람들을 국회로 보냈는가. 또 속았다는 말만 반복할 것인가. 국민의 수준이 그대로 드러나는 지금의 국회다.
하지만 빌어먹게도, 우리는 희망을 버릴 수 없다. 서민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재앙과도 가까운 지금의 경제 상황, 그 상황을 더욱 더 벌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정부와 국회,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 이들 앞에서 우리는 마냥 하늘만 바라보며 절망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시금 뒤로 돌아간 민주주의를 다시 세우고, 2%를 위한 정부가 아닌 98%를 위한 정부가 되도록, 그러한 정치판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심상정이 필요하다. 정치인이 건드려서는 안 되는 금기 두 가지. 즉 미국과 삼성을 동시에 상대하면서 “정직하고 바른 정치인”, “삼성 저격수”로 불렸던 심상정과 같은 정치인들이 살아남아야 희망이 생기는 것이다. 쓰레기가 만발한 곳에서 장미 꽃을 기대할 순 없다. 먼저 토양을 만들어 놓은 다음 우리는 아름다운 꽃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당당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심상정 의원의 앞으로가 그래서 더욱 기대된다. 친박연대는 예전 선거 당시 심 의원을 무수리, 박근혜를 공주로 묘사한 바 있다. 유신공주는 정말 필요 없다. 바닥을 기고 있는 정부와 여당의 지지도 앞에서 자신의 정치적 계산만 하고 있는 박근혜 보다는 국회에 있든 없든 국민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는 실천하는 정치인 ‘무수리’ 심상정이 백 배 소중하다.
때문에 우리는 아직 희망을 버릴 수 없다. 심상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진정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