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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카파 - 그는 너무 많은 걸 보았다
알렉스 커쇼 지음, 윤미경 옮김 / 강 / 2006년 8월
평점 :
품절
러시아 혁명을 이끈 비운의 사상가 레온 트로츠키. 그의 마지막 공식 연설 자리. 그 곳에는 이제 막 카메라를 잡은 신출내기 사진가 앙드레 프리드만이 있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이 신참 사진가는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진기자이자 종군기자가 된다. 로버트 카파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1944년 6월 5일 프랑스 노르망디 오마하 해변. 독일군이 철통같은 방어벽을 쌓아둔 바로 그 곳으로 연합군은 상륙했다. 빗발치는 포화 속에 무수히 많은 젊은이들이 쓰러져가고, 그 와중에 로버트 카파는 쉴 새 없이 셔터를 누르며 그날의 역사를 담았다. 그는 “병사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았지만 나는 정중하게 그들의 시체를 밀치며 지나가야 했다”고 말한다.
그는 용감한, 때로는 무모할 만큼 용감한 사진기자였다. 죽음의 한 복판에 뛰어들어 인간의 광기가 만들어놓은 비극을 고스란히 사진에 담았다. 그의 사진을 통해 전 세계인들은 전쟁의 참혹함과 비인간성, 그리고 무모한 이기주의를 뼈 속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때로는 단 한 장의 사진이 그 어떤 수많은 글과 말보다 더욱 절실한 진실을 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온갖 명성과 화려한 조명에도 불구하고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가 담은 무수히 많은 죽음과 증오, 광기가 온전히 그에게 남아 평생 그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그는 수많은 여성들과 염문을 뿌리며 사랑에 탐닉하기도 했지만, 정작 그 누구도, 단 한 명의 여인도 사랑할 수 없었다. 그는 비인간성의 시대에서 인간을 사랑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를 일약 스타로 만들어준 스페인 내전부터 그가 마지막으로 셔터를 눌렀던 인도차이나 반도 전쟁까지, 그는 언제나 죽음을 따라다녔다. 어쩌면 그는 스스로 죽음을 찾아 방황했던 사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가까스로 비껴갔던 죽음이 언젠가는 결국 자신을 찾아올 것임을 알면서도, 그는 그렇게 셔터를 누르며 그 죽음을 기꺼이 맞았다.
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사진 에이전시인 ‘매그넘’의 창설자이기도 한 그는 많은 사진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지금도 그를 추종하는 많은 이들을 만들고 있다. 하지만 그의 모든 명성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가 지금까지 기억되는 것은 그가 남긴 수많은 사진들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메시지일 것이다. 모든 전쟁이 궁극적으로는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한 ‘악’이라는 것임을 말이다. 독일인이던, 미국인이던, 중국인이던 국적과 성별과 나이에 상관없이 인간의 광기가 만들어놓은 전쟁의 피해자는 결국 우리 모두임을 그가 남긴 사진은 보여주고 있다.
인간이 인간을 증오하고 학살해야만 생존할 수 있고 번영할 수 있는 시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우리는 수많은 학살과 죽음을 목격하고 있다. 수많은 종군기자들이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죽음을 전한다. 하지만 이제 그러한 죽음마저 무덤덤하게 다가오는 소름끼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동포 간의 학살을 직접 겪었던 우리들이기에, 지금도 멈추지 않고 있는 인간 광기의 현장들은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아픔이다.
로버트 카파는 결국 불행한 사람이었다. 죽은 자들에게 둘러싸여 평생을 고독과 슬픔, 연민과 공포 속에 살아야만 했다. 하지만 그의 고통이 남겨진 자들에겐 말없는 메시지가 되고 있다. 그가 전해준 수많은 메시지가 담고 있는 명료한 단 하나의 사실. 인간의 생명과 가치에 대한 존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소중한 필름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