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별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십년도 더 지난 이야기다. 고등학교 내내 학업보다는 그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있으리라 믿어왔고 행동했던 나는 결국 예상했던 수능 점수를 얻었고, 아무런 고민이나 생각 없이 점수에 맞추어 대학을 결정하고 원서를 넣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부끄러운 꼴이었으나, 마땅히 가고 싶던 대학도 학과도 없던 나에게 낮은 점수 역시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때 원서를 넣은 학교 중 한 곳에 문예창작학과에 지원했던 기억이 난다. 얼추 점수를 계산하고 합격 가능성을 타진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점수보다는 약간 높은 점수를 원하던 학교요, 학과였다. 문예창작이라, 글쟁이가 되겠다는 이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인생과 예술을 논하는 곳이 아닌가. 어불성설이었다. 내가 있기에는 말이다.

면접을 치르는 과정에서 당대의 이름을 날리던 소설가가 한 분 계셨다. 지금도 그의 명성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 소설가는 나에게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지원한 학생들이 많았기에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지기에는 시간이 부족했을 것이고, 가장 간단하면서도 지원자의 내공이랄까, 혹은 문학적 소질을 탐색할 수 있는 적절한 질문이었으리라.

그때 생뚱맞게도 내 입에서 나온 책이라는 것이 바로 백범일지와 만화 슬램덩크였다. 문학을 하겠다는 사람에게서 나올만한 답이 아니었다. 소설가는 슬램덩크라는 만화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추억이지만, 난 그렇게 눈치도, 상식도 없는 천둥벌거숭이였다. 하지만 지금도 만약 내가 다시 그 시간 그 장소에 있다면 결국 같은 답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긴 한다. 물론 당연히 난 떨어졌다.

백범의 삶은 그야말로 한국 근현대사 자체라 할 수 있다.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자신의 본심은 어찌 되었든 존경하는 이로 백범을 꼽을 정도로 그는 어찌 보면 만만한 대상이기도 하고, 모두가 인정하는 스승이기도 하다. 이승만, 박정희를 진심으로 존경한다고 차마 입 밖으로는 내뱉지 못하는 보수나, 여운형, 장준하, 조봉암 등을 진심으로 우러르고 있다고 말할 수 없었던 진보나 백범은 안전한 피난처가 되었고, 해방 후 귀국하여 백범이 보여준 방황과 좌절에도 불구하고, 안두희의 총탄에 쓰러진 그는 영원한 구국의 표상이요, 하얀 눈길에 곧게 먼저 걸어간 발자국이 되었다.

몽양이나 죽산, 또는 장준하 선생에 대한 연구서적들에 비해 백범에 대한 자료와 서적은 월등히 많다. 한반도의 모든 이들은 백범을 알고 그를 존경한다. 하지만 정작 인간 김구의 아픔과 고독, 그리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 자식으로서, 남편으로서, 아비로서의 슬픔을 담은 것들은 그리 많지 않았던 듯싶다.

그런 의미에서 김별아의 ‘백범’은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인 백범이 아닌 인간 김구를 다시 한 번 돌아볼 수 있게 도와주고 있다. 태산과 같은 모습으로 민족의 고통에 아파하고, 한반도의 온전한 독립을 위해 한 평생을 바친 백범은 그러나, 당연하게도 아비와 어미의 죽음에 눈물 흘리고, 아내에게, 자식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함을 서러워한 한 인간이었음을, 우리는 잊고 지내온 것은 아닐까.

책을 읽으며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자니 분노를 넘어 슬픔이 다가온다.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1945년 8월15일을 건국절이라 떠드는 무리들. 이승만을 위한 무한한 찬양을 위해 사회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을 무시하고 폄하하는 무리들. 그들이 과연 북한 역사의 정통성을 독점하고 있는 김일성, 김정일과 무엇이 다른가. 역사 교과서가 좌편향이었다고 다시 고치겠다는 무리들. 역사를 자신의 입맛대로 만들어 교육하겠다는 무리들. 그들이 왜곡된 역사를 가르치는 일본의 우익 세력들과 무엇이 다른가. 고작 5년의 임기를 가지고 있는 정부가 50년의 역사를 바꾸려 하고 있다. 백범이 원했던 조국은 과연 지금의 모습이었을까.

먼저 가신 수많은 독립운동가들, 혁명가들을 생각하며, 백범을 비롯한 수많은 거인들이 걸어간 길을 생각하며, 나 역시 쓰린 눈을 썩썩 비비게 된다. 우리는 여지없이 못난 후손이요, 또한 후손에게 부끄러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

강압적이고, 획일적인 애국심에 혐오감을 느끼지만, 그 보다는 공동체의 안녕과 행복 추구에 더욱 많은 힘을 쏟아야 한다고 느끼지만, 적어도 백범이 빈 라덴과 같은 테러리스트였다고 떠들어대는 후손이 아님을 감사하며 오늘도 부끄럽게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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