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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상스러움 - 진중권의 엑스 리브리스
진중권 지음 / 푸른숲 / 2002년 4월
평점 :
절판
흔히 어르신들이 말한다. 너희들은 정말 살기 좋은 시대에 태어나 배고프고 무서운 전쟁을 겪지 않아도 되는 ‘복’받은 아이들이라고. 참고로 난 70년대 후반에 태어났다.
맞는 말씀이다. 어르신들이, 그것도 이 땅에 태어나 지금까지 버티고 버티며 살아온 어르신들이 보기에 지금 이 시대는 태평성대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틀린 말이기도 하다. 지금 이 시대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급속도로 붕괴되어가고 있고, 자연의 파괴, 빈곤의 무한 반복, 경쟁을 통한 타자의 배제 혹은 살인이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태연히 벌어지고 있는 살벌한 정글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탄생과 지금까지의 발전, 혹은 그냥 오늘까지 이어져온 과정을 본다면 흔히 경제인들이 마치 자랑처럼 지껄이는 “우리는 단 한 번도 위기가 아닌 적이 없었다”는 말이 실감이 날 정도로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시기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때문에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흔히 어르신들이 보기에 ‘철없고, 개념 없고, 싸가지 없어 보이는’ 지금 세대들 역시 정말 박 터지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진중권의 글을 즐겨 읽는 사람으로서 이 책은 적어도 진중권을 “단순히 말 빨과 글 빨로 어설프게 행세하는 예의 없는 지식인 흉내”정도로 치부할 수 없음을 알게 해 준다. 그는 분명 행동하는 지식인(이 당연한 말이 왜 이 땅에서는 무슨 커다란 명예인 것처럼 들릴 정도인가)이고, 약자와 함께하는 진정한 의미의 글쟁이, 그리고 확성기이다.
물론 말 빨로 치면 유시민을 비롯하여 몇 몇 지식인들이 더 있기는 하다. 하지만 유시민은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는 우를 범했고, 스스로 무너졌다. 그리고 다른 지식인들 역시 행동하기보다는 골방에 틀어박혀 온갖 날선 단어들의 생산으로 자위행위에만 집착한 면이 있다. 그러나 적어도 진중권은 다르다. 그가 빨갱이건, 혹은 또라이건 말이다. 그만큼 우리는 행동하는 이들을 그리워한 것이다.
시청 광장과 청계천에 촛불이 넘실거릴 때 쉽사리 접근할 수 있었던 지식인들은 많지 않았다. 이른 바 보수를 자처하는 자칭 우익들은 두려움과 또는 평가 절하로 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평소 진보를 외치고 정의를 떠들던 인간들 역시 그다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그 곳에서 인터넷으로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고,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네티즌에게 전달한 이가 바로 진중권이었다. 그는 급기야 자신이 경찰에 체포되어 닭장차에 잡혀가는 상황에서도 중계를 멈추지 않았다. 살아있는 민주주의 교육을 직접 보여준 셈이다.
민주화 투쟁, 노동 투쟁 등을 통해 얻은 고난과 상처를 밑천삼아 자신들이 그토록 저주했던 기득권 세력과 사실상의 연합을 이룬 소위 민주화 세력의 지도자들과 자신의 얄팍한 지식을 바탕으로 권력과 명예의 전당에 오르려 삽질을 마다하지 않았던 수많은 지식인들 사이에 진중권이 돋보이는 이유다.
여기까지 보자면 내가 진중권 팬클럽 회장이라도 되는 줄 알겠다. 절대 아니다. 엄정화 이후 팬레터 한 장 써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다만 나는 지식인이, 이 땅의 지식인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진중권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가 이문열이 말한 대로 검도 1단인 주제에 5단들에게 덤비는 아마추어, 혹은 사이비 지식인이라고 치자. 그리고 그의 지식이 SKY의 지식인들과 조중동의 Pen들과 비교했을 때 수준차이가 있다고 치자.(물론 절대 아니지만. 난 지금까지 진중권에게 논리에 맞게, 상식적으로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을 거의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가. 그는 자신의 지식이 50이라면 50을 몽땅 털어 행동으로, 실천으로 옮기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지식이, 위치가 100이라 느끼는 인간들은 그 10, 20도 제대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게 중요한 차이라는 것이다.(그들이 정말 100이라고 믿는 이들은 거의 없다)
언젠가 꼭 한 번 만나 진지하게 농담을 주고받고 싶은 지식인. 그가 진중권이다. 앞으로도 그 싸가지 변치 말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