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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특별판)
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너무나도 유명한, 제목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쉽사리 손이 가는 책은 아니었다. 작가에 대한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들이 지레 나를 겁먹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찌 보면 전형적인 천재의 삶을 살았다고 할 수도 있는 작가는, 또 어찌 보면 그러한 전형에 어긋나는 사람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그의 글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그 무엇도 쉽사리 믿지 못했지만, 그래도 막연한 믿음이 존재했다고 할까. 그는 철저히 인간을 불신했던 것 같다. 하지만, 결국 믿었던 것이기도 했다.
〈본능의 기쁨〉에서 로맹 가리는 “인간이란 아직 존재하지 않습니다. 새로 만들어내야 하는 거예요.”라고 외친다. 하지만 〈지상의 주민들〉에서는 “어쨌든 난 낙관주의자예요. 우리 인간들은 말이죠, 아직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고, 겨우 출발했을 뿐이니까, 나아가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정말 어떤 존재가 될 겁니다. 난 미래를 믿어요.”라고 속삭인다.
그 어느 것이 로맹 가리의 믿음이었을까. 아마 둘 다가 아니었을까. 참혹한 인간의 본성 속에서도 결국 그 어떤 희망이 존재할 수 있음을, 반드시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을, 그는 갖고 싶어한 것이 아닐까.
책 속에 담겨있는 단편들은 그 분량에 비해 결코 짧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하나 모두 쉽게 읽히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하나 쉽게 읽히기도 한다. 씁쓸한 웃음과 함께 놀라운 위트와 반전을 엮어내는 솜씨는 그가 천재임을 증명하는 것 같고, 인간에 대한 영원할 것만 같은 불신 속에서도 가끔씩 비치는 연민과 사랑은 그가 고독하면서도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어 했던 한 인간이었음을 보여준다.
수준 높은 책 앞에서 언제나 주눅 들고 저자의 위대함에 감탄하는 것밖에 할 수 없는 나지만, 이런 작가의 작품 앞에 그 정도 감탄은 오히려 부족한 면이 있지 않을까.
‘천지간의 좀벌레 한 마리’인 나로썬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