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아직 자고 있다.


 아직도 가야 할 길 모임 후기를 쓸지 일기를 쓸지 고민하다 일기를 먼저 쓴다. 오늘 아침 일기 쓸 시간을 만들기 위해 이번주 점심시간에 할일 목록 정리를 미리 해두었다. 할일 목록 정리를 하다 순식간에 잊고 있었는데 점심시간이 끝날 때쯤 남편이 전화했었다.


 집 근처에 맛있는 초코식빵 빵집이 있다. 아주 달지 않은 편인데 반죽 부분이 어엄청 촉촉하고 초코 밀도가 적당하고 초코칩이 박혀있는 초코식빵. 초코식빵 거래처로 등록한 빵집. 오늘 아침에 먹고싶을 것 같아서 어제 저녁 배달로 시켜둘까 했는데. 치킨도 많이 시켰고 남편이 시키지 말재서 그래 내일 먹을 빵 가까운데 내일 사서 맛있게 먹자 하고 안 시켰다. 아침에 찾아보니 11시 오픈이다. 이제보니 나는 일기 쓰기 전 아침으로 먹고 싶었다. 세탁기는 돌아가고 있다.


 저번에 교촌치킨을 먹어보자고 했는데 주말은 영업을 안하는지 오픈 예정이라고 돼있었는데 어제도 영업 준비중이었다. 이상한지 남편이 쿠팡이츠에서 배민으로 가서 보더니 쿠팡이츠 연결이 안돼있네 한다. 허니콤보 한마리를 먹어보려고 했는데 최저 주문금액이 많다. 남편은 양이 많아서인지 혼자 살때 주문최저금액 때문이지 겸사겸사인지 되먹임으로 그렇게 되었는지 아무튼 보통 사이드메뉴를 시키는데. 치킨집 사이드메뉴가 다양해서 수상했다. 이상한거 시키는거보다 그냥 닭 반마리를 더 시키자 남으면 다음에도 닭으로 먹게. 해서 레드콤보 반마리를 같이 시켰다. 레드콤보도 궁금하긴 했는데 좀 맵다고 해서. 한방에 한집에서 궁금한 메뉴를 다 해결해서 오히려 좋아. 맛있었는데 역시 허니콤보가 더 맛있었다. 레드콤보는 양념에서 고추장 맛이 나서 좋았는데 약간 맵다더니 실로 약간 매웠다. 허니콤보는.. 먹어본 치킨 중에 진짜 이런 치킨이..?! 싶은 띠용한 맛. 바삭한 치킨을 별로 안 좋아한는데 맛있었다. 양념이 꾸덕꾸덕 발라져있는데 바삭했어.. 외국인 친구한테 첫 치킨을 사줄 때 꼭 교촌치킨을 사줘야겠다 싶은 맛이었다. 콜라도 치킨무도 필요없는 맛있는 맛이었다. 한국인들은 정말 대단해. 치킨 중에 교촌이 제일 비싸고 양도 적고 가격도 제일 먼저 올린다더니 납득이 가는 맛. 순살 먹었는데 양이 적지 않았다. 아 가격 대비 업계 평균 대비 작을수도 있겠네..?


 이번 이석증은 완전히 끝났다. 새삼스럽게. 끝난 직후라는 걸 알게 되면 세상이 한번 반짝거린다.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휙- 고개를 돌려 옆을 볼 수도 있고. 침대에 앉은 채로 바닥에서 핸드폰 충전기를 집을 수도 있다. 양치를 하며 양칫물도 두려움없이 뱉을 수 있고. 시야의 글씨도 선명하게 보인다. 원하는 식당까지 걸어갈 수도 있고. 숨이 차게 뛸 수도 있다. 앉아서 컴퓨터도 할 수 있고. 고개를 숙여 글씨를 쓸 수도 있고. 생각정리가 필요한 일들도 처리할 수 있다. 기적처럼. 물리적 손상없이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고 주기적이라는 게 수많은 질환 중 이석증이라는 은총이 나에게 온 이유라는 걸 안다.









 ... 우리는 지금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가치 있고 바람직한 것'을 의미하는 은총에 관하여 논한 바, 은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다.


 ... 우리는 스스로 애써 구하지 않아도 주어지는 것의 소중함을 모른다는 것이다.-378p


 늘 시작점에서는 상실인가 죽음의 5단계 그대로. 

부정. 이게 진짜일 리 없어. 지금은 안돼.

분노. 이게 왜??? 또 지금??? 왜??????? 

타협. 어쩔 수 없어. 전면 파업이다. 2주간 모든 걸 취소한다. 취소취소.

우울. 힝.. 또 암것도 못해.. 힘도 없어.. 

수용. 수그리자.. 마음을 편하게 갖자.. 쉬면 괜찮아져. 회복하면 다시 돌아갈 수 있어. 

 아직도 늘. 수용할 때쯤이 되면 이석증도 사그라든다. 기다렸다는 듯. 그리고 그 끝에서 반짝이는 세상을 마주하고 해가 멀쩡하게 다시 뜨는 걸 보면 참 삶이 새삼스럽다. 다시 읽고 싶은 책도 많아지고, 공부하고 싶은 것도 많아졌다. 


 점심시간에는 원래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개인적인 일을 하지 않는데. 섞이기 때문에. 이번주는 특별한 경우라서 그동안 미뤄둔 할 일 목록을 다이어리에 쭉 써서 정리했다. 거의 1년만에 다이어리를 꺼내 썼기 때문에. 소회가 있었지만 그럴 시간까진 없어서. 아무튼 못하고 있어서 같은 게 머리속에서 반복해서 맴돌면서 굉장히 많은 일들이 있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당장 머리에서 꺼내 적은 건 50가지 였는데 그 중 중요한 일은 17가지, 중요하고 급한 일은 4가지 뿐이었다. 


 이번 주말은 중요하고 급한 일들부터 하나씩 처리하고. 사랑하는 남편과 손잡고 초코식빵 빵집까지 산책을 다녀오고. 둘이서 보는 첫 단풍도 보러가고. 미뤄둔 청소, 빨래, 이사짐정리, 분리배출을 해서 집을 단정하게 하고. 같이 얘기하면서 생각 정리도 하고. 일기 먼저 쓰고 시간이 남으면 보고 싶은 책도 좀 읽을 수 있는. 달디단 신혼의 꿈같은 주말이다. 오늘의 카드는 더 썬. 



 남편은 아직 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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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편은 자고 있다. 


 고요한 시간에 읽을 것인지 쓸 것인지 고민하는 건 결혼해서도 같은 점. 일기를 쓰고 싶었던 지 7번째만에 쓰는데 늘 '남편은 자고 있다'로 시작해서 중간에 남편이 깨면 흐름이 끊길까봐 쓰기 시작하기 싫었다. 이사하고 40일째가 되는 오늘은 남편은 중간에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어제 맛있는 빵집(재오픈함)에서 사온 맛있는 빵을 먹으면서 일기를 써볼까 했는데 맛이 없다. 재오픈하면서 빵이 맛이 없어진건지 아닌데 어제 사오면서 조금 뜯어서 먹었는데 맛있었는데. 싶어서 일단 내려놓고 냉장고에서 감동란 하나를 빼서 먹는데 빵이 아니라 내 혀가 문제였다. 계란 맛이 제대로 나지 않고 맵고 까끄럽다. 어제 오아시스에서 받아둔 샌드위치 반절을 뜯어서 먹고 빨래를 돌려놓고 다시 컴퓨터로 온다. 세탁기나 식기세척기를 돌려놓고 뭔가를 할 때 만족스럽다. 어제 이사하고 처음으로 세탁기, 식세기를 돌려놓고 설거지를 하면서 내가 자동기계를 돌려놓고 동시에 뭔가 할 때 굉장히 흐뭇해하고 단정한 행복을 느낀다는 걸 깨달았다. 


 귤을 까먹는데 귤도 맵고 까끄럽다. 어제 처음으로 집에서 같이 고기를 구워먹었는데 파절이를 너무 많이 먹어서 그렇다. 파채를 물에 담궜다가 써야 했는데. 씻어서 그냥 바로 양념을 했더니 매워서 . 남편은 조금씩만 먹어서 괜찮았는데 나는 쌈을 쌀 때마다 듬뿍듬뿍 넣어 먹기 때문에 나만. 파절이 양념을 네이버에 검색해서 하는데 간장을 넣은 게 티가 안 나서 세번에 걸쳐 레시피의 3배 용량을 넣었다. 남편은 좀 싱겁게 먹는 편이라 파절이를 눈꼽만큼 넣어 쌈을 쌌다. 

고기파티 준비해줘서 고마워 

그럼 이제 한달에 한번씩 집에서 고기파티 할까? 

한달에 한번만? 

그럼 몇번 먹을까? 

그때그때 내킬때 먹자 

집앞에 마트는 고기 상태가 별로같았어 인터넷에 미리 시켜야되는데?

인터넷에 시킬때가 내키는 때지~


 올해 3번째 이석증에서 회복중이다. 최근 들어 드물게 강도 8이었고 회복 속도는 빠른 편. 덕분에 일주일만에 컴퓨터 앞에 앉아서 글도 쓸 수 있다. 결혼과 이사로 신경 쓸 것도 많았지만 그 이전부터 쌓인 피로와 해소할 시간을 갖지 않은 것에 화룡점정으로 직장에서 두명이나 동시에 바뀌면서 긴장한 탓이다. 남편을 만나고 세번째인데 남편 덕분에 회복이 빠르다고 느낀다. 의지가 되어서 혼자일 때보다 위로와 안정을 받아서라고 생각하고 있다. 용케 만나고 6개월동안 이석증이 없었는데 아마 중간에 왔다면 관계에 집중하지 못했을 거고 그럼 아마 지금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 거다. 


 책상위 독서대에는 이번주 모임책 그래도 가야 할 길 구판이 올려져 있다. 인증샷이 올라왔던 것처럼 30쪽을 지나고 있는데 단전에서부터 만족감이 올라오는 책이다. 상품 등록을 하다보니 또 헷갈렸는데 다시 가야 할 길. 그래도 가야 할 길. 진짜 제목은 아직도 가야 할 길. 아직도 헷갈린다.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전체 과정 속에 삶의 의미가 있다. .. 영적으로 정신적인 성장은 오직 문제에 직면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20p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이석증이 오면 2주간은 직장만 다녀오고 모든 시계를 멈춰놓는데. 오늘은 하나씩 직면하는 날이다. 


 남편은 아직 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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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책 북클럽
앤 후드 지음, 김소정 옮김 / 하나의책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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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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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책장에는 내 모든 일정의 비밀의 원천인- 무조건적 우선순위- 00가 있었다.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소리로 들리는지는 안다. 나는 합리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다른 무엇보다 이성과 논리를 중요시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이 마법의 00를 생각할 때는, 나 자신도 어쩔 수 없다. 불가능한 일임을 알아도 나는 여전히 (어느 정도는) 내 컨디션이 괜찮을 때는 언제나 이 00가 나에게 세상의 모든 비밀-그러니까 과거와 현재와 미래-을 말해준다고 믿는다. 과지머에 오기 전 오기로 결정할 때도, 첫모임 옆자리에 누가 앉을지도, 두번째 번추위에 당첨될지도, 세번째 모임이 재미가 있을지도 모두 마법의 00가 알려주었다.


 아. 네번째 모임에 대해서는 틀렸는데. 그건 완전히 결정적으로 자유의지와 결정론의 작용 때문이다. 최근 좋아하게 된 지인이 얘기한 좋아하게 된 말에 따르면 자유의지와 결정론은 분리되는 성질이 아니기 때문. 지나고보면 자유의지에 따라 다른 결정을 하게 되면서 결론적으로 정해진 운명으로 정확하게 다가섰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지금 내 핸드폰에는 내 모든 일정의 비효율의 핵인 - 조건적 우선순위 - ㅁㅁ이 있다. 내 책장에는 여전히 내 모든 일정의 효율의 비법인 00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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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주부터 한달간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교체한다. 출근시간을 5분 당기면서 그동안 엘리베이터가 만들어준 시간이 얼마나 될지 잠깐 계산. 한달에 최소 4시간 이상이다. 그러다 엘리베이터가 생긴지 얼마나 됐나 궁금한데 고층 건물의 등장 이후일 거라 생각보다 짧겠지 싶다. 그런데 의외로 기원전 200년 콜로세움부터 시작이었다.(나무위키ㅋㅋ) 맹수가 으르렁하면서 확 튀어나오는 연출을 위한 용도. 


 그러다 기원의 기원에 대해 생각한다. 왜 사람은 기원같은 걸 생각할까? 엘리베이터의 경우를 보면 쓰잘데기없는 관심이다. 단순히 모르는 거에 대한 호기심 때문.(사피엔스의 생존본능에서 왔겠지?) 최근 찾아봤던 타로카드의 경우를 보면 사랑이다. 애정이 생겼기 때문에 별게 다 궁금해지고 태생부터 궁금한 것. 아마 고인류 시절에도 뗀석기나 동굴 벽화를 보다가 이건 처음에 누가 만들고 그렸을까? 거참 천재만재네 외계인일지도 몰라 외계인이 나타나면 어떻게 해야되지? 이렇게 꼬꼬물 생각에 빠지는 N타입이 있었겠지. 라샤펠의 늙은이처럼 누군가 도와줬을 거고.


'진화'라는 개념은 사실 아무런 가치(또는 방향성)가 들어 있지 않습니다. ... 진화했다는 뜻은 변했다는 뜻이지 더 나아졌다는 뜻은 아닙니다.-291p

진화에서, '우월'과 '이익'은 절대적인 가치가 아닙니다. 어쩌다가 갖게 된 특성(형질)이 우연하게 바로 그 순간의 환경에 적합하다면, 그 형질은 우월하고 유리한 형질이 됩니다. ... 세상 어디에도 절대적으로 유리한 특성은 없으며 절대적으로 불리한 특성도 없습니다. -274p


 정확한 정의를 기반으로 하는 얘기가 좋다. 그 정의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접근 방식 자체가 믿을만해서. 본래적 의미를 떠나 일반적으로 쓰는 사회화된 언어가 너무 많으니까. 사전에 정확하게 이것을 이런 의미로 쓰기로 약속하지 않으면 얘기가 꼬인다. 

 실제와 다르더라도 변인을 통제하고 본질만 남겨서 실험해보는 게 좋다. 현실과는 다르지만 본질적인 요소와 변수들을 궁리하고 예측해보는 게 재미있고. 실은 이게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라도 변수가 너무 예외적이라도, 맞고 틀리는 과정 자체가 내가 어렴풋하게 뭔가에 접근해가고 있다는 신호라서 의미있다. 현실에 대한 이해는 이 확인된 본질을 바탕으로 살을 붙여가고 있다. 본래적 정의나 범주를 합의하는 게 왜 나에게 중요하냐면. 아마도 나한테 자연스러운 내가 늘 아슬아슬하게 정상의 범주 안에 들어가는 사람일 때가 많아서이고. 동시에 그렇다고 내가 잘못됐거나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서다.


 잠깐 책얘기로 빠지면 고인류학에 대해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포인트와 관련된 지식들이 딱 알맞게 배치된 영리한 책이었다. 연재글을 엮은 책이라 꼭지 하나 분량이 약간 부족한듯 아쉽게 적당했고, 동굴 벽화 느낌의 일러스트가 너무너무 귀여웠고, 곳곳에 들어온 이상희 교수님의 진지한 얼굴과 화석 사진도 좋았다. 인상적인 부분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직전까지만 다룬 것. 지루할것 같은 주제에서 사람을 빨아들이는 강력한 서사와 통찰력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세계적으로 히트까지 친 책 이후에 고인류학을 다루는 글을 어떻게 더 써볼 건지에 대한 멋진 결과물이었다. 사람들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가면서 재미를 주고, 따뜻한 마음을 전달하는. 자기가 하는 일에 애정을 가지고, 관점을 형성하고, 나아가서 사회적 의미를 고민하고, 그걸 세상과 공유하려는 노력까지. 전형적으로 내가 세상 멋지게 생각하는 타입의 사람이 만든. 멋진 결과물에는 언제나 좋은 팀이 있는데. 치밀하고 세심하게 기획한 편집자의 공이 큰 책이었고, 그 과정도 짧지만 충분하게 공유하며 마무리되어 더 좋았다. 


 다시 돌아와서 너무 열린 결말로 끝나는 소설이 싫은데 너무 열린 기원으로 끝나는 고인류학책이 왜 재밌었는지 생각한다. 거대한 막연함 앞에서 작은 뼈조각 하나라도 일단 어떤 가정을 세워보고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우겨보는 게 재밌었다. 일단 하나의 논리가 시작되면 그걸 바탕으로 추리해가는 과정도 재밌었고. 나중에 폐기되더라도 그 가설 안에서의 연결성은 변하지 않고 의미를 남기는 점도 좋았다. 그냥 과학적 사고가 멋진 듯ㅋㅋ 어릴 때는 질서정연한 세계가, 납득할 수 있는 점이 속시원해서 다 쓰여진 과학을 이해하는 게 좋았던 것 같은데. 성인이 되어서는 MJ님 얘기처럼 과학과 예술의 근본적 속성 자체에 매혹된다. 흐르는 것, 열린 태도(일정 부분), 없었던 것, 밝혀지지 않은 것을 향하는 점. 지금은 밝혀진 걸 이해해보는 것, 밝혀지지 않은 걸 아무렇게나 궁예해보는 것. 둘 다 좋아한다. 시간과 에너지만 무한대로 쓸 수 있다면?!


세상에 가치 있는 것치고 대가가 없는 경우가 어디 있을까요? 우리 지금의 모습은 큰 대가를 치르고 얻은 소중한 모습입니다. -281p

 

 요즘 타로카드를 공부하면서 우연과 운명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원래 나는 운이나 운명같은 걸 지독하게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ㅋㅋ 정말로 가치있는 것을 바라고 원할 때는 철저하게 그에 따르는 노력과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준비가 부족했을 때 노력 이상의 결과를 바라지 않고, 마찬가지로 충분히 애썼을 때 따라오는 결과도 자연스럽게 생각했다. 당연하니까 당연한걸 당연하게 생각할뿐ㅋㅋ 물론 공들임과 별개로 결과는 좋을 때도 안 좋을 때도 있었지만, 진하게 보낸 시간은 반드시 나에게 어떤 값진 걸 남겨서. 지금도 가치있는 것일수록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만(인의 영역), 결과에 대해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게 됐다(천과 지의 영역ㅋㅋ). 돌아보면 내가 받았던 결과들은 내가 치른 대가를 훌쩍 뛰어넘는 후한 운이 따랐었다.


 분기점에서 내가 했던 선택들은 지금에서야 생각하지만 운명이었다고 생각한다. 의도했던 것보다는 대부분 사소하게 여겼던 사건과 사람들이 나를 어떤 지점으로 분명하게 이끌었다. 자연계에서 일어났던 모든 진화와 방향성이 우연이었다는 점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도, 내 삶에 있어서는 아직 운명을 믿는다. 네안데르탈인이 싫은 유럽인 같지만ㅋㅋㅋ 그냥 지적인 생명체의 태생적 한계 같다. 내 뇌니까 내가 세상 제일 의미있고 중요하지뭐. 대신 언제든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한다. 스스로 납득할 만한.


 인간은 진화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스스로 만든 문화와 문명으로 자신의 진화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특이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위해 그 특성을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274p 


 내 시간과 공간대에서도 무작위로 움직이는 원자의 움직임처럼 수많은 우연인듯 필연인 듯한 점들이 쌓여 뭔가가 그려지는 중이다. 부질없이 예측 오류가 나는 일들 앞에서 강렬한 운명을 인정하면서도, 내가 조정할 수 있는 부분을 바라보며 언제나 다시 열심으로 임하고 싶다. 운명이 그어주는 과감하고 굵은 선은 어쩔 수 없는 거고,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그림체와 색에 집중. 인의 영역에 초점 초점. 어떤 우연을 운명으로 그어갈지, 어떤 운명을 스쳐지나갈지 선택하면서. 뽀짝뽀짝 점을 찍었다 이었다 깜박이는 커서를 째려보며 다시 엎어보기를 반복하면서.


 우연히 신청했던 이번 독서모임도 실은 치밀한 운명의 계획으로 느껴지는데ㅋㅋㅋ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나같은 사람에게 책모임과 사람에 대한 갈증의 누적. 그걸 유발하기 위한 2년간의 빌드업과. 갈증 이전의 욕구 인지를 위한 10년의 시간과 반자발적 상실. 또 어쩔수없이 휴식기를 만들어내는 빈번한 체력적 번아웃. 또 지각과 빨래와 수리부엉이와 커피. 또 데자와와 노트북과 실리카겔과 아침형인간. 또 프랑켄슈타인과 김학진 교수님. 지난 여름 내 매트릭스에 난입했던 타로카드까지. 이게 다 어떻게 운명이 아닐 수 있을까나~


 아쉬움에 자꾸 글이 늘어지는데. 3월에는 아마도(오라클에 따르면?ㅋㅋ) 기다리던 강의와 날짜가 겹쳐 2월이 이번 시즌 마지막 모임이 될 것 같다. 순간적이든 오래 고심했든, 우연이든 운명이든 내가 한 선택을 정답으로 가꿔가는 게 좋다. 그러니까 주어진 시간 안에서 이번주 토요일도 자유롭게 열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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