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 규장각 보물로 살펴보는 조선시대 문화사
신병주 지음 / 책과함께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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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정조가 남긴 문헌이 발견되면서 정조의 죽음에 대한 의혹이 다시 불거졌다. 정조의 죽음이 독살에 의한 것이든 아니든 다시금 조명을 받은 부분은 정조의 국정운영에 대한 강인한 모습이었다. 정조의 그와 같은 의지가 강하게 드러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규장각이다.

정조는 학문에 바탕을 둔 개혁정치를 구상하면서 그 일환으로 규장각을 지었던 것이다. 역대의 도서들을 수집하고 연구하는 학문 연구의 중심 기관이자, 정약용을 비롯하여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 당파나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젊고 참신하며 능력 있는 인재들을 불러모아 개혁정책을 추진하는 핵심 정치 기관으로 삼았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 경희궁에서 15년을 지내다가 즉위 후 처소를 창덕궁으로 옮겨, 창덕궁에서 경관이 가장 아름다운 영화당 옆의 언덕을 골라 2층 누각을 짓고 어필로 ‘주합루(宙合樓)’라고 쓴 현판을 달았으며, 1층을 어제존각(御製尊閣)이라 하여 역대 선왕이 남긴 어제(御製, 왕들이 직접 지은 글), 어필(御筆, 왕이 쓴 글씨) 등을 보관하게 하고 ‘규장각(奎章閣)’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규장각은 역대의 주요 전적을 보관하고 학문을 연구하는 중심 기관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은이는 규장각에 소장된 수많은 자료들 중에서 어필, 온양별궁전도 등과 같은 기록화, 노걸대, 박통사, 첩해신어, 통문관지 등 외국어 학습서, 북학의, 열하일기 등 외국문물기,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대동여지도 등의 지도와 지리지,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국가의 공식 연대기를 비롯하여 국가의 주요 행사를 기록과 그림으로 정리한 의궤, 오늘날 백과사전과 같은 지봉유설, 유원총보, 조선시대 중인들의 삶을 기록한 규사, 호산외기, 이향견문록, 소대풍요 등 다종, 다양한 조선시대의 기록들을 소개하고 있다.

15년간 규장각 연구원으로 활동한 지은이는 위 작품들을 단순히 소개하는 차원을 넘어서 각 작품들이 탄생하게 된 배경과 내용 등을 많은 자료와 사진 등으로 상세하게 정리하고 있다. 지은이의 해박한 글을 통해 우리 선조들의 삶과 모습, 체취를 느끼는 기회가 되었으며, 또한 위 작품들의 현재적 의미와 가치를 다시금 새겨보는 계기가 되었고, 여태까지 몰랐던 부분들이나 잘못 알고 있었던 부분들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는 시간이 되기도 하였다.

지은이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위 작품들은 단순한 작품이 아니라 우리 선조들의 문화역량이 함축된 ‘명품’중의 ‘명품’이었다. 우리만 그 작품들이 가지는 의미를 모르고 지나쳐 왔던 것은 아닌가하는 죄스러운 마음마저 드는 것은 왜일까.

선조들이 모든 것을 일일이 기록으로 남겼기 때문에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찬란한 우리 문화의 유산을 보고 느끼고 즐길 수 있다. 그래서인지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규장각의 분소라고 할 수 있는 강화도의 외규장각에 보관된 의궤 297책을 약탈하여 가서 현재까지도 파리국립도서관에 보관하면서 돌려주지 않고 있는 것은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문화국가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인지. 외교 역량을 총동원해서 조속한 시일 내에 반환을 받아야 할 것이다.

‘명품’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과 노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 선조들이 남긴 기록물도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들이 아니다. 선조들의 ‘명품’을 이어받은 우리가 해야할 일은 그 ‘명품’이 가진 정신을 현재에 실현하고 직접 실천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통을 본받아 새 것을 창출한다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규장각 설립 취지는 현재에도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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