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왜 나폴리에 왔나?"
안나가 물었다. 앞으로 만나는 사람들마다 내게 던질 질문이었다. 그리고 내가 12주 동안 답을 찾아야 할 물음이기도 했다. 왜 나는 굳이 이곳에 왔는가? 
- P30

‘영화감독은 배의 선장이라는데, 나는 그런 타입의사람이 아니다‘라는 문장을 이렇게 말했다. "무비 디렉터이즈 캡틴, 벗 아임 낫 어 캡틴 가이."
그렇게 이국의 언어로 소리 내어 말하고 나자 정말 뭔가가 명쾌해지는 느낌이었다. 이전까지는 그렇게 단정지어 말한 적이 없었다.
- P37

"카페인과 칼로리는 반드시 복수한다."
- P55

스포츠가 무엇이기에, 공을 차서 골대 안에 넣는 행위, 누군가는 ‘그깟 공놀이‘라고 치부할 일에 사람들은 왜 그렇게 열광하는가?
이 세상은 공정한 경쟁이 벌어지지 않기 때문에, 하나의 룰 안에서 최선을 다해 벌이는 분투에 열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P79

이탈리아의 생활은 이런 것이었다. 친구들, 농담, 걷기, 맛있는 음식, 심플함, 느긋함, 해변에서 먹은 인생 최고의 파니니. 아무 근심 없이 이런 기쁨을 나에게 줘도 된다는 확신. 프로치다섬을 소박한 행복으로 기억할 것이다.
- P115

이탈리아 여행에는 감탄과 긴장, 두 가지 능력이 동시에 필요했다. 
- P118

짧은 일정으로 베네치아의 정수를 맛보려면 그저 섬안에서 마음껏 길을 잃어보라는 조언을 들었다. 하지만 마음껏 길을 잃고 의외의 발견을 할 수 있는 여행의 재미는 그럴 만한 시간과 비용이 주어졌을 때에나 가능한 특권과 호사였다. 
- P120

‘영화적 공간‘이라 함은 일상과는 거리가 먼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곳이다. 그곳에서는 로맨틱한 사랑이 펼쳐질 수도 있지만, 미로에서 길을 잃고 물에 빠질 수도 있다. 언제나 사랑에 빠지는 것은 어느 정도 위험을 수반하고 있는 게 아닐까. 길을 잃고 헤매는 것, 그것이 사랑과 관련 있는것이 아닐까. 물은 언제나 생명의 메타포인 동시에 죽음의 메타포다. 
- P123

다음과 같은 장면을 떠올려본다. 어느 커플이 보라카이의 바다에서 선셋 세일링을 하며 온 세상이 붉게 물드는 풍경을 맞이하는 순간. 혹은 일본의 깊은 산골 노천 온천에서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풍경을 맞이하는 순간, 보통은 "이런 잊히지 않을 아름다운 풍경을 함께 보다니 우리는 결혼해서 평생 살 수밖에 없겠어"라고 할만한 풍경이다. 그러나 함께 압도적인 풍경을 감상한 뒤에 "난 너를 사랑하지 않아"라고 말하게 되는 장면.
- P137

역설적으로 눈앞의 풍경이 너무나 아름답기에 앞으로 이런 풍경을 평생 함께 보고 싶은 사람이 이 사람이 아니라는 진실을 깨달은 것이다. 토스카나의 발도르차 평원도 내게는 그럴 만큼 압도적인 풍경이었다.
- P137

이런 풍경을 매일 보며 통학하는 토스카나의 시골 마을 아이들은 어떤 꿈을 품고 자라날까.
- P139

시스티나 예배당을 빠져나오면 기념품가게가 있고 바티칸 우체국에서 엽서를 부칠 수 있었다.
조금 혹하는 마음과 함께, 참 장사 잘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교적이지만 세속적이고, 예술적이지만 상업적인 것이 뒤섞인 풍경. 인파의 행렬에 지치고, 수백 편의 작품을 감상한 후 과연 제정신으로 차분하고 침착하게 편지를 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 P145

난 늘 노력한 만큼의 정확한 보상을 바랐고 (그 ‘정확한‘은 자의적인 것이다), 세상은 그렇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 종종 불행했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보다 기대를 많이 하기에,
실망하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 나쁜 상황들을 먼저 떠올리며 위장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개로 앞이 보이지 않는 신의 길 초입에서, 지난밤 예상치 못했던 지로 디탈리아와 천 개의 계단과 귀도의 요리는 내게 어떠한 메시지 같았다.
가보자, 포기하지 말고.
- P153

돌체 파르니엔테(Dolce far niente).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의 달콤함‘이라는 뜻이다. 근면성과 성실성, 생산성과 효율성을 추구하는 나라에서 태어나 쫓기듯이 살아왔던 내게는 그런 느긋한 태도가 없었다. 심지어 여행에도 최적의 것을 즐기지 못하면 실패라 여기고, 시간을 허비했다는 죄책감을 느꼈다. 하지만이번 이스키아를 여행하면서 만족스럽지 않은 호텔과 레스토랑에 전보다 훨씬 관대한 태도를 보이는 나를 발견했다. 
-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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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네모 한 권. 호기든 용기든 패기든 한 움큼을 쥐고서, 자신이 살고 또 겪었던 생활을 모으고 짜낸다. 일종의 착즙이랄까? 한 입 마시고서 ‘오호, 돈 주고 사 마시던 주스보다 조금 덜 단 것 같은데?‘ 하는 물음표가 뜨는 것도 자연스럽다. 
- P70

내 책 한 권만 딱 만들고 마는 게 아니라, 그동안 내가 보고 만졌던 책들이 이러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졌겠구나 하는, 이해의 폭을 넓히는 활동이다.
- P95

 ‘너‘와 ‘나‘를 겹치면 더 두꺼운 "내"가 되고 내 세상은 비로소 넓어지는 것 아닐까.
- P97

이렇게 당신이 문장을 읽어나갈 때 내가 문장을 적어나갈 때 글자가 쌓여나가는 모습도 일종의 아날로그라 할 수 있겠다.
- P99

그러나 친분이 없는 사이에서는 좋은 ‘뜻‘으로 하는
"말"은 별로 소용이 없는 것 같다. 좋은 뜻은 좋은뜻이고 좋은 말은 좋은 말이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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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는 웃었지만 뒤에서는 째려보던 책방직원의 뒤끝 에세이
- P3

사람의 일생을 봄여름가을겨울로 본다면 그때 나의 시기는 여름이었으나 빈곤했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도 쌀쌀맞게 굴곤했다. 
- P12

나가는 사람은 그걸로 끝이지만 책방에 남아야 하는 나로서는 그말들을 곱씹으며 ‘왜 말을 저렇게 하지?‘ 하며 계속 불쾌해하는 일에 힘을 쓰게 되었다.
- P19

여기서 포인트는 손님의 입장에서는 책방직원이 자신을 봤는지 안 봤는지도 모른다는 것이고, 또 한가지 포인트는 내가 다 간파했다고 판단하면서 나의 교만함까지 발달시킨다는 것이다. 
- P28

큰 서점의 쾌적한 분류를 편해하면서도, 작은책방의 오래된 빼곡함을 편애한다. 조금 전 분명히 본 것 같은 책도 단숨에 보이지 않는 숨겨놓지않았으나 숨겨진. 계획의 어깨를 토닥이는.
- P43

우리도 어디로 갈지 모른 채 흐르고 있으니까. 대신 어디로든 원하는 방향이 있다면 그쪽으로 가보면 된다고, 아직 원하는 방향이 없다면 갈 수 있는 방향을 찾아보자고 말할 수는 있겠다.
- P50

그런데도 나는 이 일이 좋다. 힘이 들어서 좋다. 힘이 들어가면, 그러니까 힘들었던 일은 기억에 더 강하게 새겨진다는 사실을 자주 되새긴다. 철컥철컥 셔터. 척척척 사다리.
언젠가 검은머리가 파뿌리가 되었을 즈음에, 길을걷다 우연히 셔터를 올리거나 내리는 모습을 본다면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 책방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 P57

그렇다면 우리 책방의 셔터와 사다리는 단순한 시설물이 아니라 훗날 나의 이 시절을 환하게 소환할 은빛 시설물이라 할 수 있겠다.
- P57

자신에게 피해를 준 것도아닌데 섣불리 점수를 매기는 말들. 점수보다는 박수를 보내면 좋겠는데. 심사를 하기보다는 신사가 되면 좋겠는데.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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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회의석상에서도 조는 수가 일쑤다. 한참 자다 깨어도 토의는별로 진전이 없고 여전히 갑론을박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동안에 어떤 사항이 결정되었다 하더라도 상관은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이라면 나중에 자연히 알게된다. 
- P86

친구가 산책을거부하거든 그가 전날 밤 잠을 잘 못 잤다고 인정하라. 작은 일에 신경질을 부리는 때에도 그리 알라. 
- P86

하늘에 수많은 별들을 생각할 때 잠 못 드는 사람도 있을것이요, 밤이 너무 아름다워 나룻배를 타고 맨해튼과 브루클린 사이를 밤새껏 왔다갔다한 애인들도 있을 것이다.
- P87

너의 슬픔 그 무엇이든지 잠 속에 스러질 거다. 
- P88

죽음이 긴 잠이라면 그것은 영원한 축복일 것이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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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피쿠로스의 네 가지 처방
-불안과 고통에 대처하는 철학의 지혜
존 셀라스 (지은이), 신소희 (옮긴이) 복복서가 2022-02-09, 132쪽, 교양철학


#경기광주용인독서
#에피쿠로스철학


🍉 부담스럽지 않은 두께에 일부 들어간 보랏빛 표지에 처음부터 편안히 읽어나갔다. 고백하자면 철학도 실용을 따져보게 되는 속물적인 마음이 있었다. ‘네 가지 처방‘이란 제목에 정리가 쉽겠구나 라는 므흣한 추측, 불안과 고통에 대한 대처라는 것에 위로에세이 같은 편안함이었다.

🍉 쉽고 명료한 문장으로 총 7장의 챕터로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맛보았다. 제목의 네 가지 처방은 뜬금없이 중간 정도인 5장에 갑자기 나오는데, 7장까지가 묘하게 얽히고 섥혀 나름의 논리, 철학, 종교(그 당시에는 종교일 수도 있겠다)를 갖추게 된다.
(신을 두려워 마라.
죽음을 염려하지 마라.
좋은 것은 구하기 어렵지 않으며,
끔찍한 일은 견디기 어렵지 않다. 77p )

🍉 독서 모임의 한 멤버는 일부 그런 명료함을 불편해했다. 고통이 아니면 행복이야, yes 아니면 no인거야, 그러니 정신적 쾌락으로 모든 걸 극복할 수 있으니 금욕 시작이야, 식의 명료함은 양 끝단 사이에 있는 너무 많은 것들을 건너 뛴다는 게 이유였다. 또한 에피쿠로스 철학대로라면 문명은 발전, 다양화되지 못했을 거란 부연설명. 그 말에 수긍이 가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런 명료함이 이 복잡한 세상을 좀 단순하게 바라보게 해주는 것 같고, 고대 사람들도 불안했구나 하는 생각에 위로가 되었다. 모든 시대, 모든 지역의 사람들은 불안하지 않았을까.

🍉 난 사는 동안 충분히 감사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용서하고, 용서받고, 돕고, 속상하기도 하고 등등, 충분한 삶을 살아 보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에피쿠로스와는 거리가 있지만 그런 내 생각에도 이 철학이 위로가 된다. 작은 것들을 지향하는 문화. 책의 마지막에 저자가 말하는 유의미성에 적극 동의. 오해를 풀자면, 내가 책을 읽고 난 소감을 재미없게 썼지만 이 책이 재미없는 게 아니다🥲 냥냥파워!

🌱에피쿠로스는 차분한 평정심에 이르는 것이 관건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평정에 이를 수 있을까? 욕망의 좌절과 미래에 대한 염려라는 두 가지 위험을 극복함으로써 평정에 이를 수 있다. 
23

🌱이처럼 루크레티우스, 베르길리우스, 필로데모스를 비롯한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은 로마의 일상적 권모술수로부터 멀리 떨어져 유유자적한 이탈리아 해변에서 저 유명한 ‘정원‘의 정신을 되살리려 했다. 철학은 치료이며 구원은 세상의 이치를 이해함으로써 가능하다는 에피쿠로스의 핵심 사상을 포용했던 것이다.
29

🌱‘어제는 가죽이던 것이 오늘은 자줏빛과 금빛 옷감이 되었다. 이런 잡동사니들이 인류의 삶을 원한으로 채우고 다툼으로 허비하게 만든다.‘
112

🌱하지만 우리가 에피쿠로스 철학에 얼마나 동의하든 혹은 반대하든 간에, 고대 아테네 변두리의 비밀스러운 정원에서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이 논했던 여러 주제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의미하다는 점만은 부정할 수 없으리라.
12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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