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은 내가 무서울 때 숨는 곳이야."
"뭐가 무서운데요?"
"무서워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
나는 그 말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말 중에 가장 진실된 말이기 때문이다.
- P72

 하밀 할아버지는 빅토르 위고도 읽었고 그 나이의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경험이 많았는데, 내게 웃으며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는 거지." 

- P96

"너 몇살이니?"
"처음 만났을 때 말했잖아요. 열 살이에요. 오늘이 바로 내 열 번째 생일이에요. 하지만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요? 나에겐 여든다섯 살 먹은 친구가 있는데 아직 살아 계세요."
- P136

나는 아이스크림을 핥아먹었다. 기분이 별로였다. 그럴 때면 맛있는 것이 더욱 맛있어졌다. 여러 번 그런 적이 있었다. 죽고싶어질 때는 초콜릿이 다른 때보다 더 맛있다.
- P14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변한 누군가를 포기하기란 그리 쉽다. 내가 나빠서가 아니라 네가 더 이상 내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탓하기란 얼마나 쉬운가 너 스스로도 포기해버린 너를, 내가 어떻게 포기하지 않겠느냐고 말하기란 얼마나 편한가. 영화는 묻는다. 어쩌면 그동안 우리는 너무 쉽게 포기해온 사람들이 아닌가하고.
- P140

물론 여행이라는 게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곳에서도 신경 써야 할 일은 생기고, 따끈따끈한 후회가 새로 만들어지며, 남들 앞에서 금세 의기소침해지는 자신이 싫어질 때도 많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모닝 맥주는 말하는 것 같다.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더 나은 사람이 될 필요도 없어. 지금 맥주 한 잔이 주는 작은 기쁨을 밀어두지 않은 너는, 너에게 충분히 좋은 사람이야.
- P151

그래서 나는 더 기억해두고 싶었나 보다. 별것 아닌, 그러나누군가가 살아낸 것이 분명한 삶의 자리들을 보아두었다가 ‘언젠가 생각나면 들려주어야지 마음먹었나 보다. 멀리 여행 다녀온 친구가 생각날 때마다 낯선 도시의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그러니 나는 앞으로도 여전히 좋아할 것이다. 처음 와보는 동네, 한 번도 오른 적 없는 언덕, 비슷한 듯 모두 다른 골목길, 그구석구석을 걷다가 누군가의 삶을 짐작해보곤 하는 산책을.
- P16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기야 연애는 늘 그런 문제 아니었던가.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것.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것. ‘썸머Summer‘와 헤어져도 ‘오텀Autumn‘이 온다는 걸 알지만,
지금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썸머이다. 그럴 때 ‘이 다음‘ 같은 건 의미가 없다.
- P101

나는 언제부터 이런 것을 세어보는 사람이 되었나. 인생에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다면, 지금은 분명 여름일 것이다.
언제까지 여름이라 느낄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렇다.
- P105

아무도 여행 오지 않던, 어린 나를 키운 조그만 시골마을에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쌓여 있었는지 나는 안다. 그러니 내가하루나 이틀 머물다 가는 곳에서, 오랜 세월 차곡차곡 쌓여왔을이야기를, 누군가가 보냈을 한평생을 지금도 나는 궁금해하지않을 수 없다. 그 긴 세월에 내 짧은 하루를 포개고 가는 것이 여행이라면, 사실 할 일이란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 P122

어디서든 쉬이 외로워지는 우리를 위해, 어디서나 비슷하게 이어지는 일상을 보여주는 창들. 창이 있어 우리가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할 수 있다는 건 다행한 일이었다. 어쩌면 그런 이유로, 사람은 처음 막힌 벽을 뚫어 창이란 걸 만들어낼 생각을 했는지도.
- P127

오래전 여행을 하며 창문 바깥에 서서 안쪽을 그리워하던 나는, 이제 생활을 하며 창문 안쪽에서 바깥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꼭 멀리 갈 필요는 없는 거라고 산다는 건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지금 눈앞의 세상을 잘 담아두는 일이라고.
- P13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냐는 재빨리 그를 쳐다보았다.
이 불행한 사람을 향해 처음에 느꼈던 열정적이고 괴로운 연민이 가라앉자 또다시 살인이라는 끔찍한 생각이 그녀에게충격을 주었다. 그의 돌변한 어투에서 갑자기 살인자의 목소리가 들린 것이다. 그녀는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어쩌다가, 어떻게,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아직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이제 이 모든 의문이 한꺼번에 그녀의 의식 속에서 확 불붙었다. 
- P251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할 거냐 하면 말이야, 만약 내가 오직 굶주림 때문에 사람을 찔러 죽였다면" 하고 그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주고 아리송하지만 진심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그랬다면 나는 지금......행복했을 거야! 이 점, 똑똑히 알아 둬!"
- P253

"나는 그때 깨달았어, 소냐." 그가 황홀해하며 말을 이어갔다. "권력이란 오직 감행하는 자, 즉 그것에 마음을 두고 쟁취하려는 자에게만 주어진다는 것을. 여기에는 하나, 오직 하나만 있으면 돼. 오직 감행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 
(중간생략)
 나는...... 나는 감행하고 싶었고 그래서 죽였어...... 그저 감행하고 싶었을 따름이야, 소냐, 바로 이게 이유의 전부야!"
- P26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꽃 같은 현재를 상기시키는 뺨이 환한 꽃들 앞에서, 우리는 함께 있는 이를 마땅히 생각할 일이다. 이제 헤어지면 다시 못 만날 사람처럼. 함께하려면 오직 지금 이 순간뿐인 사람처럼. 이 꽃아래,
마지막 악수를 나누는 사이처럼.
- P61

내가 다녔던 학교에도 꼭 이런 등나무가 있었는데. 전국의 학교 운동장엔 약속이라도 한 듯 등나무가 서 있으니, 이 아래에선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났을까. 얼마나 많은 고백과 얼마나 많은 다툼과 얼마나 많은 꿈들이, 그럼에도 꺼내놓지 못한 얼마나 많은 마음들이 고여 있을까. 어떤 장소에서든 이런 생각을하면 그곳에만 고인 시간이 보이는 기분이다.
- P68

한참을 걷다 보니 문득 아, 우리가 지금 길을 찾으려던 게 아니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함께 걷고 싶어서였지. 다행이라 생각한 순간, 어둠이 조금 밝아졌다. 고개를 드니 등나무 환한 꽃들이 조그만 전구처럼 머리 위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때 꽃은 피고 있었던가, 아니면 지고 있었던가.
- P68

생각해보면 이 봄의 산책이 다 그런 마음이었다. 봄은 짧으니까. 어떤 순간도 결국엔 과거가 되니까.
우리, 저기까지만 더 가보자.
- P69

중요한 건, 여기에서 즐거움을 찾아낼 수 있는가 하는 것.
얼마나 잘 타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즐겁게 타는가 하는 것.
- P80

 지금의 여름이란 어쩌면 내가 보낸 첫 번째 여름 위로 쌓이고 쌓여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시간이 반드시 앞으로 흐르는 것만은 아니어서, 다시 같은 계절을 지날 때마다 문득 되살아나는 기억이 이토록 많은지도.
- P8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