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건 어떤지요. 사람을 죽이고도 자신을 정직한 사람이라 여기고 사람들을 경멸하며 창백한 천사처럼 돌아다니다니요 아닙니다. 이게 어떻게 미콜카란 말입니까, 친애하는 로디온 로마니치, 이건 미콜카가 아닙니다!
- P289

믿을수 없다는 건 압니다만, 교활하게 머리를 굴리지는 마세요. 생각하지말고 그냥 삶에 몸을 던지세요. 걱정할 필요 없어요. 금방 해안가에 이르러 두 발로 서게 될 겁니다. 어떤 해안가냐고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난 단지 당신에게 삶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는 걸 믿을 뿐입니다. 지금 내 말을 줄줄 외운 지루한 설교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건 압니다. 그래요, 하지만 나중에 기억이 나서 언젠가 도움이 될지 모르잖아요. 그때를 위해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 P295

"대체 어디로 그렇게 서두르시오?" 스비드리가일로프가 호기심에 찬눈길로 그를 살피며 물었다.
"각자 자신의 길이 있는 법이니까요." 라스콜니코프는 음울하고 초조한 어투로 말했다.
- P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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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는 조금도 우습지 않았다.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해주면 좋겠어요...... 예를 들지 말고."
그녀는 더욱 소심하게, 거의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 P224

그는 어떤 음울한 희열에 빠져 있었다. (정말로 그는 지나치게 오랫동안 아무와도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것이다!) 소냐는 이음울한 문답이 그의 믿음이자 법칙이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 P228

소냐, 난 궤변 없이 죽이고 싶었고,
나 자신을 위해, 나 하나만을 위해 죽이려 했어! 이 점에서는 나 자신에게조차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어! 어머니를 돕기 위해서 죽인 게 아냐, 말도 안되는 얘기지! 돈과 권력을 얻어 인류에게 선행을 베풀고 싶어서 죽인 것도 아니야. 말도 안 되는 얘기야! 난 그냥 죽였어. 자신을 위해서, 나 하나만을 위해서 죽인 거야.  - P230

내가 감히 몸을 숙여 권력을 주워올릴 수 있을까 없을까? 나는 떨고 있는 피조물에 불과한가, 아니면 권리를 가지고 있는가......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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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 앞 보리수를 찾아가듯 그날 이후 텅 빈 채 흘러간 한달의 날들을 돌아본다. 뭔가 부글거리는 것들이 그 안에 있다. 나는 살고 싶은 것이다. 일하고 싶은 것이다.
already but not yet.
- P59

한 생을 세상에서 산다는 건 타향을 고향처럼 사는 일인지 모른다. 그러다가 어느 때가 되면 우리는 문득 거기가 타향임을 깨닫고 귀향의 꿈과 해후하는 것은 아닐까. 나 또한 그러하기를 바란다. 과연 내가한 생이라는 타향의 삶을 잘 살았고 잘 살고 있는지 그것이 내내 걱정스럽기는 하지만......
- P62

선생님은 지금 비상사태예요, 그렇게 슬프거나 울적할 시간이 없어, 라고 그는 나를 탓한다. 그가 옳다. 나는 존재의 바닥에 도착했다. 단독자가 되었다. 본질적 타자성의존재가 되었다. 이제 나는 나의 삶을 혼자서 다 껴안아야한다.
그런데 내가 이토록 무거웠던가.
- P70

문득 말년의 롤랑 바르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왜 그가 폴 발레리를 따라서 ‘나만을 위한 한 권의 책‘을 쓰고 싶어 했는지, 왜 생의 하류에서 가장 작은 단독자가 된 자기를 통해서 모두의 삶과 진실에 대해 말하는 긴 글 하나를쓰려고 했는지...... 나 또한 나의 하류에 도착했다. 급류를 만난 듯 너무 갑작이어서 놀랍지만 생각하면 어차피 도달할 곳이다.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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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바라보고 멈춰 서서 찍어온 지난 시간 동안 나는 차츰 내가 되고 싶어졌다. 내가 아닌 무언가가 되려 애쓰는 대신 더욱더 내가 되어야지 하고, 자꾸자꾸 오래오래 그저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나무처럼.
- P167

더디게 자라는 나무가 저 먼 높이에 이르기까지의 세월이란 어떤 것일까.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을 훌쩍 넘어선 나무의 일생을 생각한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뒤에도 이 자리에 계속 남아 있을 나무, 아주 먼 미래에 나 같은 누군가가 똑같이 올려다볼지 모를 나무를.
- P172

여행지에서 그런 식의 독서를 하기엔 시집만큼 좋은 친구가 없다. 이미 읽었던 시가 다시 읽어도 또 좋을 때, 나는 그것이 시인과 함께 걷는 산책 같아 좋았다. 말수 적은 시인의 곁을 따라 걸으며, 드물게 꺼내놓는 말 중에 기억하고 싶은 것이 생길 때마다 마음의 귀퉁이를 작게 접어두는 기분.
- P179

바다 속에서 막 꺼낸 젖은 얼굴 위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 눈을 감았다 뜨는데 머리 위로, 온 하늘에, 진득한 노을이 내리고 있었다. 배를 타고 나왔다고 해도 믿을 만큼 멀리까지 나와 있어서 보이는 주위는 온통 바다였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바다뿐인 곳에서, 짙어가는 노을이 시시각각 하늘과 바다의 빛을 바꾸어 놓고 있었다. 한참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 P180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인생을 낭비하지 않으려고 뭐든 열심이지만, 사실 다 살고서 돌아보는 시점에선 그 ‘열심‘이야말로 인생을 낭비한 일로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그건 좀 이상한말이기도, 기운 빠지는 말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대체로 과하게 파이팅이 들어가 있어 기운을 좀 빼도 되는 사람들이니까.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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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내가 무서울 때 숨는 곳이야."
"뭐가 무서운데요?"
"무서워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
나는 그 말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말 중에 가장 진실된 말이기 때문이다.
- P72

 하밀 할아버지는 빅토르 위고도 읽었고 그 나이의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경험이 많았는데, 내게 웃으며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는 거지." 

- P96

"너 몇살이니?"
"처음 만났을 때 말했잖아요. 열 살이에요. 오늘이 바로 내 열 번째 생일이에요. 하지만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요? 나에겐 여든다섯 살 먹은 친구가 있는데 아직 살아 계세요."
- P136

나는 아이스크림을 핥아먹었다. 기분이 별로였다. 그럴 때면 맛있는 것이 더욱 맛있어졌다. 여러 번 그런 적이 있었다. 죽고싶어질 때는 초콜릿이 다른 때보다 더 맛있다.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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