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자네가 내 의견을 알고 싶다면......" 스테판 아르카지치는 안나와 이야기할 때처럼 아몬드 버터 같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의 선한 미소가 너무나 믿음직스러워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유약함을 느끼며 그 미소에 굴복하고 말았고 스테판 아르카지치가 하는 말이라면 뭐든 믿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느꼈다. 
- P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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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현관 안으로 들어서며 결심을 뇌 깊숙한 곳에서 꺼내듯 하여 그것을 확인하였다. 거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다. ‘속임수일 경우, 조용히 무시하고 떠날 것. 사실일 경우, 예의를 지킬 것‘.
- P368

브론스키는 일어나 구부정한 자세로 흘깃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압도되었다. 그는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그것이 자신의 세계관으로는 아예 도달할 수도 없는 지고한 무언가라고 느꼈다.
- P377

남편은 슬픔 속에서도 관대한 데 반해, 자신은 기만 속에서 비열하고 보잘것없이 보였다. 그러나 자신이 부당하게 경멸했던 사람 앞에서 느끼는 자신의 비열함에 대한 자각은 그의 슬픔에서 작은 일부만을 차지했다. 
- P379

그는 병든 아내의 침대 옆에서 난생 처음으로 타인의 고통이 자신의 마음속에 불러일으키는 부드러운 연민에 자신을 내맡겼다. 예전에 그는 그러한 감정을 해로운 약점으로 생각하여 수치스럽게 여겼다. 그녀에 대한 연민, 그녀의 죽음을 바란 것에 대한 후회, 무엇보다 용서의 기쁨은 그로 하여금 갑자기 고통의 완화뿐 아니라 정신적 평온마저 느끼게 만들었다.
- P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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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이 가까워 오면 할아버지의 침에 절어 시척지근한 냄새가 밴 베수건에 싸 둔 곶감이나 밤 따위가 다 절절히 그리워지곤 했다. 그건 먹고 싶다는 것하고는 달랐다. 핏빛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건들대는 수수이삭을 보고 싶은 것과 같은 감미롭고도 쓸쓸한 정서였다. 
- P127

그러나 남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돌보지 않는 행위는 얼핏 보기에는 정의감 같으면서 실은 도피였다. 오빠는 국방복 입고 각반 치고 징 박은 군화 신고 군수공장에 다니는 일을 못 견디어 했다.
- P167

관념적으로 모호하게 미화됐던 은방울꽃의 실체를 발견한 날은 온종일 이상하게 우울하고 마음이 아팠다. 장차 이 세상은 어찌 될 것이며 나는 어찌될 것인가, 내가 지금의 이 상태에 완벽한 기쁨을 느끼는 것은 이 상태가 영속되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막연하게지만 자연과 행복하게 일치된 것 같은 자신을 믿을 수 없는 마음이 생겼고, 나의 중요한 일부를 서울에 남겨놓고 온 것처럼 느꼈다.
- P174

언니의 화법은 특이했다. 옆에서 듣는 사람 속까지 시원하게 해주면서도 오빠의 자존심을 긁는 신랄함이 없이 다만 구수했다. 오빠가 언니를 보고 첫 눈에 마음에 들어 한 것도 아마 이성 간의 직감으로 그런 소질을 감지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때가 마침 오빠에게 얼마나 충고와 위안이 필요한 시기였던가도 알 것 같았다.
- P225

그럴 때 엄마는 나한테 말하는 게 아니라 오빠의 전향을 지켜보고있는 어떤 음산한 시선을 향해 변명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게 열성스럽고도 조금은 비굴하게 굴었다. 
- P229

그 엄청난 자유를 어떻게 쓸 것인가. 악용, 선용, 남용, 절제 아무거나 다 매혹적이었다. 앞으로는 모든 것을 그것과 더불어 공모하리라. 그 꿈이야말로 장미와 라일락과 모란을 피게 하는 5월의 햇빛보다 더 찬란했다.
- P236

그건 앞으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이었다. 그 예감이 공포를 몰아냈다. 조금밖에 없는 식량도 걱정이 안 됐다. 다닥다닥 붙은 빈집들이 식량으로 보였다. 집집마다 설마 밀가루 몇 줌, 보리쌀 한두 됫박쯤 없을라구. 나는 벌써 빈집을 털 계획까지 세워놓고 있었기 때문에 목구멍이 포도청도 겁나지 않았다.
-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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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를 위해서 무언가 내 속의 한계 같은 걸 박차보려고 허둥대면서도 그렇게 안 되던 조바심과 난 왜 이렇게 못났을까 싶은 자기혐오 등 복잡한 심리적 갈등까지를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
- P38

가슴이 두근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것은 내 마음속에서 평화와 조화가 깨지는 소리였고, 순응하던 삶에서 투쟁하는 삶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본능적으로 감지한 두려움이었다.
- P46

 나는 내 영역이 중대한 도전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온몸으로 그 도전에 대항하고 있는 거였다.
- P73

사람에겐 누구나 죽었다 살아나도 흉내 못 낼 것 같은 게 있는 법인데 나에겐 그게 집단의 중심이 되는 것이었다. 
- P78

엄마가 셈이 바른 것은 자타가 인정하는 바이나 막상 자신의 가난한 돈지갑이 새는 것도 모르는 것이 엄마의 또 다른 면이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엄마에게 그런 허술한 일면이 있었음을 감사하고 또한 그로 인해 엄마를 사랑한다.
- P95

조리풀을 뜯을 때마다 습관적으로 먹을 만한 풀을 찾았지만, 선바위 주위 척박한 땅에는 모질고 억센 잡풀밖에 자라지 않았다. 가끔 나는 손을 놓고 우리 시골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하염없이 생각하곤 했다.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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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왜 그런지 알겠는데, 내가 독일에서 아랍계독일인으로 사는 동안 익숙해진 게 하나 있거든. 모든 문제의 원인을 하나로 몰아붙이면 편하다는 거."
- P63

한국은 소용돌이 같은 곳이었다.
휩쓸려가지 않기 위해 버텨도, 살아남으려면 결국에는 함께 휩쓸려야 했다. 어디에 다다를지 모르고, 모르는 척하면서, 그들은 거기서 간신히 벗어났다.
- P68

이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독일 민담집에 나오는 한스들도 행복한 결말을 위해 약삭빠르게 눈치를 보거나 가여운 척 동정을 구하고 시치미를 떼는 등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한수라고 해서 못할 건 없었다.
- P73

폭력은 감염병과 비슷했다. 기민하게 먹잇감을 찾아내서 목덜미를 물고 휘두르다가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내팽개쳤다. 
- P81

폭력이약탈한 건  뼛가루나 살가죽 몇 점이 아니었다. 전부였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폭력을 극복하기 위해 폭력을 먼저 용서하라고 종용했다. 용서를 바라지 않는자들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
- P82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공평을 찾는 건 순전히 화풀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함께할 편을 만들고, 탓해도별 탈 없을 만한 대상에게 비난을 쏟아 부었다.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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