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이 가까워 오면 할아버지의 침에 절어 시척지근한 냄새가 밴 베수건에 싸 둔 곶감이나 밤 따위가 다 절절히 그리워지곤 했다. 그건 먹고 싶다는 것하고는 달랐다. 핏빛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건들대는 수수이삭을 보고 싶은 것과 같은 감미롭고도 쓸쓸한 정서였다. - P127
그러나 남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돌보지 않는 행위는 얼핏 보기에는 정의감 같으면서 실은 도피였다. 오빠는 국방복 입고 각반 치고 징 박은 군화 신고 군수공장에 다니는 일을 못 견디어 했다. - P167
관념적으로 모호하게 미화됐던 은방울꽃의 실체를 발견한 날은 온종일 이상하게 우울하고 마음이 아팠다. 장차 이 세상은 어찌 될 것이며 나는 어찌될 것인가, 내가 지금의 이 상태에 완벽한 기쁨을 느끼는 것은 이 상태가 영속되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막연하게지만 자연과 행복하게 일치된 것 같은 자신을 믿을 수 없는 마음이 생겼고, 나의 중요한 일부를 서울에 남겨놓고 온 것처럼 느꼈다. - P174
언니의 화법은 특이했다. 옆에서 듣는 사람 속까지 시원하게 해주면서도 오빠의 자존심을 긁는 신랄함이 없이 다만 구수했다. 오빠가 언니를 보고 첫 눈에 마음에 들어 한 것도 아마 이성 간의 직감으로 그런 소질을 감지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때가 마침 오빠에게 얼마나 충고와 위안이 필요한 시기였던가도 알 것 같았다. - P225
그럴 때 엄마는 나한테 말하는 게 아니라 오빠의 전향을 지켜보고있는 어떤 음산한 시선을 향해 변명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게 열성스럽고도 조금은 비굴하게 굴었다. - P229
그 엄청난 자유를 어떻게 쓸 것인가. 악용, 선용, 남용, 절제 아무거나 다 매혹적이었다. 앞으로는 모든 것을 그것과 더불어 공모하리라. 그 꿈이야말로 장미와 라일락과 모란을 피게 하는 5월의 햇빛보다 더 찬란했다. - P236
그건 앞으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이었다. 그 예감이 공포를 몰아냈다. 조금밖에 없는 식량도 걱정이 안 됐다. 다닥다닥 붙은 빈집들이 식량으로 보였다. 집집마다 설마 밀가루 몇 줌, 보리쌀 한두 됫박쯤 없을라구. 나는 벌써 빈집을 털 계획까지 세워놓고 있었기 때문에 목구멍이 포도청도 겁나지 않았다. -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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