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기쁨 1 - 음악의 요소들 음악의 기쁨 1
롤랑 마뉘엘 지음, 이세진 옮김 / 북노마드 / 201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최근 <음악의 기쁨>이란 책을 조금씩 틈나는 대로 읽고 있다. 1권을 거의 다 읽은 이 시점에서, 내가 느끼고 파악한 몇 가지 점을 정리해두면 좋을 것 같아 적어놓는다. (어디까지나 아마추어 리스너의 입장에서의 정리라는 점을 감안해서 읽어주시기를.)

 

<음악의 기쁨>을 죽 읽다가 발견한 사실은 음악의 핵심 요소가 다음의 세 가지라는 것이다.

 

1) 목소리, 2) 춤, 3) 악기.

(교과서에서 배운 멜로디, 리듬, 화성과 얼추 들어맞는다)

 

일단 이 세 핵심 요소를 시간축을 따라 나란히 세워보면 대강의 음악사를 그려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중세의 그레고리안 성가는 오직 '목소리'로만 이루어져 있다. '춤'과 '악기'는 배제되었다. 예를 들어 그레고리안 성가를 부르며 춤을 춘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혹시 몰래 리듬 타나?)

 

르네상스 시기를 거쳐 16-17세기에는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 발레와 각종 춤곡이 유행하기 시작한다. (춤곡의 명칭은 알르망드, 쿠랑트, 사라방드, 지그, 미뉴에트, 부레 등으로 다양한데, 이러한 다양한 명칭은 박자나 빠르기, 유래한 국가에 따른 것.) 그리고 또 오페라/오라토리오가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목소리'가 메인 요소다. 주지할 점은 춤곡에서는 음악이 '반주'의 역할을 맡는다는 것. 어디까지나 '춤-몸의 움직임' 또는 아리아를 부르는 '목소리'가 메인 요소이고, 음악은 '반주'로서 춤이나 목소리를 지원하고, 그 효과를 부각하거나 극대화하는 역할을 맡는다.

 

'목소리'와 '춤'이 메인이었던 시기를 거친 후에 비로소 '악기'의 시대가 찾아온다. 바흐부터 베토벤까지의 시기(그러니까 바로크에서 고전주의로 이어지는 18-19세기)는 소나타, 모음곡(조곡), 협주곡, 교향곡, 퀸텟, 콰르텟 등 여러 형태의 '기악곡'이 발전을 거듭하는 시기다. 이 시기에는 연주자가 '악기'를 다루는 능력, 마에스트로로서 작곡가-지휘자가 각 악기의 장점을 극대화시키고, 서로 조화시키는 능력이 중요해진다. 이 시기는 압도적인 실력을 자랑하는 비르투오소 연주자가 등장한 시기이자, 스트라디바리와 같은 악기 장인이 등장하여 (바이올린 등) 악기 자체의 가능성을 극대화한 시기이며, 새롭게 등장한 악기인 피아노가 (한계가 많았던) 하프시코드의 자리를 대체한 시기이기도 하다.

 

목소리, 춤, 악기라는 음악의 세 요소를 시간축을 따라 세워보았는데, 다음번에는 그 시간축 위에 또 하나의 평행선을 그려보고, 거기에 음악의 세 요소를 대입해볼 수 있겠다. 이 축에 '성과 속'(신과 인간)이름을 붙이면 적절할 듯 싶다. 

 

중세의 그레고리안 성가는 '목소리'로만 이루어져 있는데, 이때 목소리로만 이루어진 이 음악의 목적은 '신을 찬미하는 것'이다. 즉 이때의 음악은 인위적 조작이나 기교가 없는 것, 순수하고 금욕적인 것, 곧 (신=인간 동형설의 관점에서) '성스러운 것'이다.

 

그레고리안 성가에 비하면, 발레나 춤곡은 세속적 즐거움을 위한 것들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춤을 출 때의 쾌감, 신나게 몸을 흔들거나 이성 파트너를 팔에 안고(또는 손을 잡고) 유혹적인 눈빛과 숨결을 주고 받을 때의 야릇한 쾌감에서 신성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또한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임으로써 인간은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새롭게, 그리고 뭐랄까 한층 세련된 방식으로 인식하게 된다. 춤을 통한 자아의 발견이랄까.

 

그럼 기악곡은 어떨까. 모차르트 시기까지 기악곡은 대부분 왕족, 귀족들의 여흥을 위한 것, 기분전환용, 편히 즐길 수 있는 것, BGM에 가까운 감상용이었다고 한다. 물론 내적 형식의 측면에서는 복잡, 섬세한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겠지만, '궁정사회'에서 기악곡은 여전히 왕족과 귀족들의 여흥에 봉사하기 위한 것, 그리고 왕족 및 귀족들의 요구에 따라 만들어지고 소비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베토벤에 이르면 음악 자체와 음악을 둘러싼 상황 모두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베토벤은 다른 누군가의 여흥을 위해, 혹은 (신이든 왕족이든) 다른 누군가의 영광을 드러내고 찬양하기 위해 음악을 만들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그 자신의 내면에서 흘러넘치는 감정과 사상을 토로하기 위해 음악을 만들었다. 음악을 통해 우리들 청자에게 전해지는 베토벤의 감정과 사상은 일면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느껴진다(우리는 그의 음악을 들으며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개인사를, 말하자면 그의 퍼스낼리티를, 혹은 퍼스낼리티와 관련이 있다고 알려진 유명한 일화들을 떠올린다. 즉 그의 귀먹음을, 봉두난발과 형형한 눈빛을 떠올리고, '불멸의 여인'과의 관계를 떠올린다). 하지만 그의 음악에 담긴 감정과 사상은 개인적인 만큼 보편적이기도 하며, 그냥 그 자체로 충분히 숭고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들-청자는 문득 "아 내가 지금 숭고하고 신성한 어떤 것을 듣고 있구나"하는 사실을 깨닫는다.

 

어떻게 보면 베토벤은 스스로 신이 되는 불경을 저지른 셈이다.

 

위대한 단독자, 위대한 솔로 베토벤. 영원한 마에스트로.
아아 베토벤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사심 폭발)

 

이렇게 정리를 하고 나니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클래식을 듣는다는 건, 그 중에서도 베토벤을 애호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베토벤은 특히 나와 같은 '중2병 환자'들에게 어필하는 것일까?)

 

이런 질문도 던져보지 않을 수 없다. 대관절 음악은 누구를, 혹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우리는 음악을 어떤 태도로 들어야 하는가? 음악은 신성한 것인가? 아니면, 음악은 감각적 즐거움을 주기 위한 것인가? 신나는 음악, 듣기 편한 음악이면 그걸로 충분한 것인가? 아니면 음악은 우리에게 어떤 새로운 경지를 열어보여줌으로써 우리를 좀 더 나은 존재가 되도록 이끌 수 있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드레이 볼콘스키 :
자네가 하고 싶은 일이 있을 거야.

피에르 베주코프 :
나는 알고 싶어... 모든 것을!
왜 옳지 않은 일임을 알면서도 계속하는 건지...
행복이 무엇인지, 고통받는 게 무슨 가치가 있는지
왜 남자들이 전쟁에 나가는 건지
사람들이 기도할 때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고백할 때 느낌을 알고 싶어
그런 일로 난 충분히 바빠
나 같은 놈 이해하기 힘들겠지
자네는 모든 게 확실하니까
뭘 해야 하는지 알고 있어
그렇고 말고!
자네는 나와 달라
자네는 배우면 깨닫지만
나는 배우면 혼란을 느껴
자네는 사랑하고 결혼하고 믿고 행동하고 출전하지

안드레이 볼콘스키 :
내가 정말 그렇다면 좋겠군
내가 왜 출전하는지 알아?
나폴레옹이 괴물이라고 생각해서?
2천마일 떨어진 오스트리아를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해서?
전쟁이 끝나면 러시아가 더 강대국이 될 거라서?
모스크바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매력적인 여인과 결혼했는데
그걸 견딜 수 없어서야
절대 결혼하지마, 피에르
나이들어 쓸모 없는 사람이 되기 전까지는
안 그러면 고상함을 다 잃어버리고
인생을 사소한 일에 허비하게 돼
날 그렇게 보지 마
자네는 보나파르트가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만일 그가 젊어서 결혼했다면
제 값 못하고 마누라 가방이나 들고다니며
아내가 초대한 멍청이들이나 상대하고 있었을 거야.

- <전쟁과 평화> (킹 비더, 1956)
오드리 헵번, 헨리 폰다, 멜 페러 주연



* 펭귄클래식에서 <전쟁과 평화>를 조만간 출간할 계획이라고 재작년 가을 쯤에 들었는데 아직 감감무소식. 올해는 나올라나!



** 헨리 폰다는 참 멋진 배우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 <내 이름은 노바디> 등 스파게티 웨스턴 장르에서의 연기도 좋지만 <The Wrong Man> 같은 히치콕 감독의 영화에서의 연기도 좋고, 시드니 루멧의 <12 Angry Men>에서의 연기도 좋다.

 

헨리 폰다는 30-60년대를 주름잡은 (외향적) 배우들인 캐리 그랜트, 클라크 게이블하곤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연기한다. (앞서의 배우들보다 다소 내향적이랄 수 있는) 게리 쿠퍼, 제임스 스튜어트와는 닮은 구석도 꽤 있지만 내면 연기의 깊이나 진폭에서는 헨리 폰다가 압도적으로 우위를 점한다. 좀 더 알고 싶은 배우.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sscsa 2015-01-26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이부분을 가장 좋아하는데..^^
 

 

 

 

 

 

 

 

 

 

 

 

 

 

 

긴 문장. 그것을 나는 맨 처음 토마스 만의 <베니스의 죽음>에서 발견했다.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익숙하지 않았던 그 긴 문장을. 오직 선택된 문장과 언어에 의해서 만들어진 푸르고 인상적인 풍경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세계로부터 격리당하고, 그리고 동시에 어느 한 세계에서 다시 태어났다. 그 도시, 그 거리, 너무나 특별했던 어느 한 시기, 그리고 ......라 불리는 한 작가 ......에 대한 풍경. 두세 번을 반복해서 읽고서야 나는 그 문장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했다. '그는...... 멀고 먼 산책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윽고 나는 나 자신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 배수아, <독학자>

 

 

오랜만에 <독학자>를 다시 꺼내들었다. 첫 장을 펼치자마자 빨려 들어간다. 이렇게 될까 두려워 그렇게 오랫동안 <독학자>를 펼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독학자>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군복무 중이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군에서 생활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별 탈 없이, 죽지 않고 살아서 제대한 것에 대해 나는 정말로 신에게 감사한다.

 

 <에세이스트의 책상> <독학자> <당나귀들>과 같은 소설들을 나는 군복무지인 대구와 집인 광주(혹은 서울)를 오가는 차 안에서 읽었다. 돌이켜 보면 신기한 일이다. 몸이 약해 차를 조금만 오래 타면 멀미를 하는 체질임에도, 이 책들만큼은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쓴 적이 있지만, 나에게 책 읽기란 '도피'이다.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은 에드워드 사이드와의 대담(<평행과 역설>이란 책으로 출간되었다)에서 "음악은 아주 완벽한 도피 수단"이라고 말한다. 그의 말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음악을 공부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최상의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들 각자에겐 아마 '완벽한 도피 수단'이 될 수 있는 책들이 있을 것이다. 혹시 없다면,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찾아야 하지 않을까? ... 인간의 본성에 대해 배울 생각도 시간도 없다, 고 한다면 할 말 없지만.

 

군 생활은 내게 무척 힘들었고, 앞서 "죽지 않고 살아서 제대한 것에 대해 신에게 감사한다"고 썼지만, 실은 군복무 당시에는 오히려 자살할 생각 같은 건 거의 전혀 하지 않았다. 지금 시점에서 돌이켜 보자니 당시의 아슬아슬했던 순간들이 떠오르는 것이지, 정작 그때는 모르고 지나쳤던 것이다. 주변에서는 온통 난리가 났는데, 정작 나는 태연하게 굴었던(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던?), 내가 연루된 몇몇 사건들이 생각난다.

 

내가 연루된 사건, 이라고 썼지만 군에서는 때로 책임소재가 불분명한, 그러나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할 사건들이 자주 발생한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었던 일, 나로서는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해내지 못한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내 책임으로 보자면 내 책임인 것 같기도 하지만, 조금만 다르게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일들, 실은 모두가 비슷하게 잘못한 일들.

 

서로 정직하게 책임을 나눠 지는 것이 아니라 만만한 사람 하나에게 덮어씌우는 데 익숙하며 능수능란하기까지 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나는 태연자약했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 그 사건들을 지금 다시 겪는다면 그때처럼 태연하게 굴지는 못할 것 같다. 태연하게 굴기는커녕 단숨에 무너져내릴 것만 같다. 나는 퇴화해버린 것일까? 아니면 당시 앓고 있던 '중2병'을 벗어나는 데(혹은 숨기는 데) 성공하고 어느 정도 사회화가 된 것일까? 모르겠다.

 

'도피'는 그 자체로 부정적인 의미를 품은 단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우리 중 어느 누구도 도피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도피로/도주로'를 내야 한다. '도피'의 반대 태도로는 '당당히 맞선다'라는 표현이 자주 쓰인다. 하지만 둘은 결국 반대되는 태도라기보다 동전의 이면처럼 동일한 속성의 다른 면을 가리키는 게 아닐까. 도피할 곳--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돌아갈 곳--이 있다는 생각, 느낌은 '믿는 구석'이 된다.

 

자기만의 '믿는 구석-도피할 곳'을 가진 사람은 모두가 자신에게 비겁한 복종과 침묵을 요구하는 상황 속에서도 당당하고 태연할 수 있다고, 그것은 흔히 오해되는 것처럼 '비겁'이나 '방관자적 태도가 스민 이기주의'와는 전혀 다르다고 나는 생각한다. 반대로 자신이 모든 것에 대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부조리에 대해 당당히 맞서는 태도를 보인다고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고 있고, 그렇다는 사실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 훨씬 더 위험하며, 그런 종류의 당당함이야말로 언제든,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사소한 계기와 명분만 있다면) 비겁함으로 돌변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도피'와 관련하여 다니엘 바렌보임은 이렇게 말한다.

 

 "[...]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당신이 만일 어떤 곳에 귀속되어 있다고, 그러니까 시적으로 말해서 '돌아갈 집이 있다'고 느낀다고 가정해 봅시다. 또 당신이 그러한 감정을 작곡가로서 음악으로 표현하고, 연주자로서 실제로 구현할 수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 경우 당신은 언제든지 아무도 없는 황무지에 있는 것처럼, 어딘가에 잘못 놓여졌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언제든 찾아낼 수 있는 것처럼 느낄 것입니다. 한편으로 음악은 삶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분야보다도 훨씬 더 효과적으로 삶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음악은 이렇게 말하지요. "이봐요, 이것이 바로 인간의 삶입니다.""

 

- 다니엘 바렌보임, 에드워드 사이드 대담집, <평행과 역설>, 58-61.

 

 

 '(자기로의) 도피'에 대해, 그것의 긍정성에 대해 최근에 다시금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된 책은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과 소세키의 강연 모음인 <나의 개인주의>이다.

 

먼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아 있는 것으로는 들뢰즈+가타리의 <카프카 : 소수 문학을 위하여>가 있다(대학 시절에 이 책을 두고 세미나를 했지만 거의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밖에 만화책 <은수저>가 있다. 특히 만화책 <은수저>는 도피가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줄 수 있다는 점을 아주 쉽고 공감가는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 한편 대개 도피란 낭만화되기 쉬운 법인데, 바로 이 '낭만화의 함정'을 훌륭히 피해나갔다는 점도 이 만화책의 아주 큰 장점이다.

 

작년인 2013년에 나는 언급된 책들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열심히 읽었거나 읽으려고 노력했다(<카프카>는 결국 읽지 못했고, 대신 (예비작업 격으로) <성>과 <소송>을 읽었다. <은수저>는 아직 완간이 되지 않았다(현재 9권까지 발매)).

 

 

 

 

 

 

 

 

 

 

 

 

 

 

 

 

 

 

 

 

 

 

 

 

 

 

 

 

 

 

 

 

 

 

 

 

 

 

 

 

 

 

'보다 완벽한 도피'를 위한 계획과 실천은 올해에도 계속될 것 같다. <독학자>를 비롯한 배수아 작가의 소설들이 훌륭한 곡괭이가 되어주지 않을까 싶다.

 

 

 * <독학자>를 읽는데, 예전 읽을 때 연필과 펜으로 표시해둔 대목이 너무 많아 새책을 사서 읽으려고 검색해보니 '품절'이다. 재판이 나왔으면 좋겠다. 내일은 출판사에 전화라도 넣어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쓰메 소세키, 라고 하면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진 작가 중 한 명입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비전공자가 다양한 방법의 깊이 읽기를 시도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가이기도 하죠. 

 

널리 알려진 작가라고 해도 '깊이 읽기'는 불가능한 경우가 많습니다. 가령 제가 좋아하는 작가로 존 쿳시라는 작가가 있는데요, 2003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덕분에 거의 모든 작품이 번역 출간 되어 있긴 합니다만, 역자의 '작품 해설'을 읽는 것 이외의 깊이 읽기를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실은 쿳시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작가가 이렇죠. 번역된 작품의 본문을 읽고, 본문 뒤에 짤막하게 덧붙여진 역자 해설을 읽으면 '그것으로 끝'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물론 각별히 좋아하는 작가라면, 해당 언어를 배워서 해당 언어로 발표된 관련 논문이나 에세이 등을 직접 찾아 읽어봐도 될 것입니다. 하지만 비전공자가 이런 과정을 하나 하나 밟아나가기엔 무리가 따르는 것도 사실입니다. 

 

요즘 들어선 간혹, "중요한 작가론(또는 작가가 연루된 논쟁)으론 이러이러한 게 있고, 어디어디에 접속하면 볼 수 있다"라고 전문적 수준의 가이드를 해주는 역자 해설을 만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음... 참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고갤 끄덕 끄덕 하며 밑줄을 그어놓거나 따로 수첩에 메모를 해두기만 하지만, 직접 찾아보는 경우는... 솔직히 말해, 아주 드뭅니다. 이건 뭐 게을러서가 아니라, 책의 형태가 아닌 디지털 정보 형태라는 데 위화감이 들어... 그런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어찌 됐건, 나쓰메 소세키는 비교적 다양한 관련 책들이 국내 출간 되어 있기에 다양한 방법의 깊이 읽기가 가능합니다.

 

다양한 책들 가운데 가장 먼저 추천하고 싶은 책은 <[도련님]의 시대>(세미콜론, 2012)입니다.

 

 

 

 

 

 

 

 

 

 

 

 

 

 

 

 

만화이지만 웬만한 해설서나 평전 못지 않게 내용이 충실고 잘 만들어진, '빼어난' 책입니다. 다음과 같은 선전 문구가 전혀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될 정도.

 

문인, 사상가들을 중심으로 디테일하게 펼쳐지는 메이지 시대의 풍경은 수십 권의 인문서를 읽는 것보다 명징하게 이해된다. 편집자로서 다니구치 지로의 집요한 그림이 빛을 발하는 이 걸작을 소개하는 기쁨이 크다.

 

<[도련님]의 시대>는, 제목처럼 두 번째 소설인 <도련님>을 쓸 무렵의 소세키의 모습을 주로 그리고 있지만, 만화의 내용은 소세키 개인에게만 한정되지 않고 '메이지 말기'의 시대상까지를 아우릅니다. 해서, '메이지 말기'의 일본의 시대상과 분위기를 살펴볼 수 있기도 합니다.

 

<[도련님]의 시대>는 다섯 권이 시리즈인데, 현재로선 시리즈 1권인 <[도련님]의 시대>만 번역되어 있습니다. 지인을 통해 들은 소식에 따르면 지금 2권, 3권이 번역 작업 중이고, 조만간 출간된다고 하는데요, 기대가 큽니다.

 

시리즈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 입장에서 가장 기대가 되는 것은 역시, 모리 오가이 편인 2권입니다. 소세키는 시리즈 마지막 권에서 한 번 더 다뤄지고 있네요.

 

 

1권 『도련님』의 시대(나쓰메 소세키 편)
2권 가을의 무희(모리 오가이 편)
3권 저 푸른 하늘에(이시카와 타쿠보쿠 편)
4권 메이지 유성우(코우토쿠 슈스이 편)
5권 거북 소세키(나쓰메 소세키 편)

 

한편, <[도련님]의 시대>에는 주인공 격인 소세키 말고도 일본 메이지 말년의 여러 문인들이 등장합니다. 모리 오가이히구치 이치요, 시마자키 도손, 구니기타 돗포 등이 그들입니다. (그 외에도 후타바테이 시메이, 다야마 가타이, 나가이 가후, 이즈미 교카 등 많은 작가들이 언급됩니다.) 해서, 이 책을 가이드 삼아 메이지 시대 일본 문학 작품 리딩 리스트를 구성해 놓고 차근차근 읽어나가는 것도 좋을 듯.

 

 

모리 오가이는 소세키와 더불어 일본 근대문학의 '쌍벽'으로 일컬어지는 작가입니다. 국내에는 소개가 거의 안 됐지만 '아쿠타가와 상'으로 유명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선생님이라 불렀고, (5살 연하인) 소세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런데 이 모리 오가이란 사람은 일급 작가이기도 하지만, 일급 연구자이기도 하고 평론가이기도 했습니다. 거기서 끝이 아니라 세속적 관점으로도 성공한 인물이었습니다. 도쿄제국대학 출신이고 독일 유학을 다녀와 군의관이 되었는데, 군의관으로서는 최고의 자리인 군의총감의 지위까지 올랐습니다. 뭐 소세키도 모리 오가이와 마찬가지로 도쿄대 출신이고 영국 유학을 다녀와 도쿄대 교수로 임명되는 '초엘리트 코스'를 밟았습니다만, 신경쇠약으로 인해 교수를 그만두고 만 것은 대조가 됩니다(영문학을 싫어하는 영문학자 소세키, 강의를 잘 못하는 교수 소세키의 모습은 <[도련님]의 시대>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모리 오가이의 작품은 <아베 일족>(문학동네), <기러기>(문예출판사) 등이 출간되어 있습니다(두 책이 제목은 다르지만 중단편 몇편이 수록된 '소설집'이어서 겹치는 작품도 있습니다). 소설을 읽어보면 '군의관'이 쓴 소설이라고는 상상이 잘 안 됩니다.

 

 

 

 

 

 

 

 

 

 

 

 

 

 

 

 

히구치 이치요는 일본 화폐 5000엔의 모델로 유명합니다. 여류작가입니다. 불과 스물넷의 나이로 요절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요절했고 남긴 작품 전체가 책 한 권 분량으로 갈무리되는--전집이 한 권인--작가에게는 대개 신비스러움이 덧씌워지거나 아련한 동경 같은 걸 품게 되는 게 일반적입니다(그런 한국 작가로는 이상-김수영-기형도가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한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과 같은 존재가 되었죠). 사후 얼마 안 되어 큰 인기를 얻고, 화폐 모델까지 등극한(?) 이치요도 그런 경우에 해당하는 한 전형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치요의 작품은 <키 재기 外>(을유문화사)가 번역 출간되어 있습니다. 저는 예전에 이치요의 작품을 (다른 판본으로) 읽어본 적이 있는데, 솔직히 그리 큰 감흥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두 번째, 세 번째 읽었을 때 비로소 그 진가를 새삼 깨닫게 되는 작가가 드물지 않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도 있겠습니다...

 

 

 

 

 

 

 

 

 

 

 

 

 

 

 

 

 

<[도련님]의 시대>에는 나쓰메 소세키와 모리 오가이가 어느 눈 오는 날 히구치 이치요가 생전에 살던 허름한 집 앞에서 우연히 조우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시마자키 도손은 천재 시인으로 각광받았고 일본 자연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활약했으나 현실에서는 굉장히 가난하고 불행한 삶을 산 작가입니다. <[도련님]의 시대>에는 시마자키 도손이 신작 소설을 발표했다는 신문 광고를 보고 소세키가 탄식을 내뱉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어 어느 문학인 모임에서 도손이 '가족 하나 건사하지 못한' 남자로 면박을 당하는 장면이 묘사됩니다. 시마자키 도손의 대표작은 <파계>(문학동네)인데, 야한 소설은 전혀 아니고 신분 차별의 문제를 다뤘습니다. 나쓰메 소세키는 이 소설을 두고 '후세에 남길 명작'이라고 평했다고 합니다.

 

 

 

 

 

 

 

 

 

 

 

 

 

 

 

 

 

구니기타 돗포는 시마자키 도손과 마찬가지로 자연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꼽힙니다. 역시 우리나라엔 잘 알려지지 않았죠. 요즘엔 그렇지만, 옛날, 그러니까 식민지 조선에서는 나쓰메 소세키와 더불어 돗포의 애독자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특히 이광수가 어떤 대담에서 자기는 소세키와 돗포를 애독한다고 하면서, 소세키보다 돗포를 더 높이 평가했다고 합니다. '간결한 작품'을 쓰는 작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국내에는 돗포의 대표 단편들을 모은 선집인 <무사시노 外>(을유문화사)가 출간되어 있습니다.

 

 

 

 

 

 

 

 

 

 

 

 

 

 

 

 

 

- 나쓰메 소세키 소개서/에세이를 읽어보고 싶다면

 

소설 읽기는 지겹다! 하지만 소세키에 대해서는 좀 더 알고 싶다! 라는 분들은 다음의 책들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먼저 비교적 편하게 술술 읽히는 소개서로는 재일한국인 강상중 교수의 <고민하는 힘>(사계절)이 있습니다. 강상중 교수는 국내에 많은 독자를 거느리고 있고, <고민하는 힘>은 꽤 많이 팔린 책이기도 합니다. 이 책에서 강상중은 소세키의 소설 세계와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학문 세계를 함께 다루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본격적인 소개서라기보다 에세이에 가깝지만, 소세키 작품을 좀 더 재밌게, '와닿게' 읽을 수 있는 키워드(돈, 청춘, 직업(노동) 등)들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나는 소세키로소이다>(이매진)은 고모리 요이치라는 저명한 학자가 쓴 평전입니다. 믿을 만한 저자가 쓴 것이라 저도 꼭 읽어보고 싶은 책인데, 안타깝게도 절판 상태입니다.

 

최근 출간된 것으로는 <무라카미 하루키 & 나쓰메 소세키 다시 읽기>(늘봄)라는 책이 있습니다. 각각 근대와 현대의 일본 '국민 작가'인 소세키와 하루키를 함께 다루고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끕니다. 하루키 책은 제가 읽어본 게 별로 없고, 또 하루키에 대해 깊이 알고 싶은 마음도 없는 탓에 개인적으로는 그닥 끌리는 책은 아니지만, <도련님>에 대한 논의가 짧게 나마 있어서 그 부분은 일별을 해보려 마음 먹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닥 끌리지가 않아 굳이 구해서 읽어봐야 하나... 싶기도 하고, 솔직히 좀 귀찮다는 생각도 들지만, 일단 마음만은 그렇게 먹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소세키의 산문, 강연록 모음집으로 <나의 개인주의>(책세상, 2004)가 있습니다. 제목은 다소 딱딱하지만, 학술적 논문이 아니라 에세이이고, 실제로 읽어보면 소세키의 소설 만큼이나 재밌습니다. 소세키 특유의 솔직 담백한 어법을 느낄 수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킹의 몸값 87분서 시리즈
에드 맥베인 지음, 홍지로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국에서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가 속하는 장르인) ‘경찰 소설’은 꽤 낯설다. 일단 소설로는 그렇다. 뭐 영화나 드라마 쪽으로 눈을 돌리면 ‘경찰 장르’가 꽤 인기를 끌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CSI>류의) 미드나 일드--일본이야 뭐 추리물/수사물의 천국이다--가 많고 한국에서 경찰물은 <수사반장>이나 <투캅스> 정도가 거의 전부다. 이쯤에서 하나 고백해야 할 사실은 이 글을 쓰는 이는 영화든 드라마든, 미국 것이든 일본 것이든 경찰물에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해서, 이제부터 쓸 내용은 홈스, 크리스티로 대표되는 고전 탐정 소설들, 4-50년대 할리우드에서 유행한 하드보일드/느와르 영화 몇 편, 그리고 현대의 경찰 장르 몇 편에 대한 (지극히 제한된) 독서 및 영화관람 경험을 토대로 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런 고로 태클 환영.

 


1. 짧고 간단하고 쉽고 간편한 얘기 : 우린 모두 사-람

 

우선 ‘경찰 소설’이라는 장르 명칭에 주의를 돌려보자. 전문가는 아니더라도 장르 명칭만 가지고도 여러 가지 생각의 줄기를 끌어낼 수는 있을 테니. ‘경찰 소설’(혹은 영화, 드라마를 포함해서 ‘경찰 장르’라고 통칭할 수도 있겠다)은 일단 ‘탐정 소설detective story’과는 구분된다. ‘탐정 소설’은 ‘추리 소설mystery’이라 불리기도 한다. ‘탐정 소설’과 친연성을 갖는 장르로는 ‘범죄 소설crime noble’이 있다. 또한 40-50년대 미국에서 영화와 소설로 인기를 끈 ‘하드보일드/느와르’도 언급할 수 있겠다.

 

장르라는 게 원래 그렇듯, ‘탐정 소설’ ‘추리 소설’ ‘하드보일드’ ‘경찰 소설’ ‘범죄 소설’는 서로 명확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영화에서 ‘액션’ ‘모험’ ‘판타지’ ‘스릴러’ ‘범죄’를 서로 엄격히 구분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비교적 대비가 명확한 범주를 추려내어 양자가 갖는 어떤 지배적인 특징을 간추려볼 수는 있다. 예컨대 ‘탐정 소설’과 ‘경찰 소설’은 이렇게 구별될 수 있다. 단순하게 구분하면 이렇다. 탐정이 주인공인 소설이 ‘탐정 소설’이고 경찰(들)이 주인공인 소설이 ‘경찰 소설’이다.

 

좀 더 자세히 얘기하면 이렇다. 아마추어이고 성격이 괴팍하지만 고도의(비현실적인) 지적 능력을 지니고 있고 사실상 전지전능한 탐정이 1인 영웅으로 등장하여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탐정 소설’이라면, 직업 경찰들이 등장하여 (고도의 지적 능력과는 상관없는) 현실적인 수사를 통해 사건을 해결(못)하는 것이 ‘경찰 소설’이다. 즉 ‘탐정 소설’과 ‘경찰 소설’은 주인공이 한 명인가 여러 명(집단)인가, 초인(超人)인가 범인(凡人)인가, (범죄해결이) 취미인가 직업인가를 기준으로 구분될 수 있다.

 

이러한 기준에서 파생되는 (다소 주관적인) 특징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언급할 수 있다. 독자의 입장에서 ‘탐정 소설’은 비교적 마음 놓고 읽을 수 있지만 ‘경찰 소설’(=하드보일드, 범죄 소설)은 마음이 덜 놓인다. 이유는 간단하다. 탐정 소설은 다른 무엇보다도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의 활약상’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탐정 소설에서 범죄는 어디까지나 탐정의 활약상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살인, 절도, 납치 등의 끔찍한 범죄는 하나의 ‘풀기 힘든 퀴즈’로서 독자 앞에 제시된다. 독자는 탐정과 하나가 되어 일련의 흥미진진한 과정으로서 범죄-퀴즈를 풀어 나간다. 시체가 어떻게 살해되었는지, 어디가 어떻게 베어졌는지 혹은 난도질당했는지 등등은 퀴즈를 풀기 위한 단서일 뿐이다. 탐정은 매의 눈으로 단서를 포착하고 지적 능력을 통해 단서들이 의미하는 것을 알아냄으로써 사건을 깔끔하고도 명확하게 해결한다. 탐정 소설에서 혼란은 없다. 일시적으로 혼란이 발생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탐정이 해결해줄 것이다. 탐정=믿는 구석이다.

 

‘혼란’이라고 했는데, 바로 이것을 기준으로 경찰 소설(=하드보일드, 범죄 소설)은 탐정 소설과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혼란’은 소설의 분위기에서, 문체에서, 인물 묘사 방식에서 감지된다. 가령 1940-50년대에 유행한 미국의 하드보일드 장르는, 그 독특한 문체에서 장르 명칭이 유래하는 바, 인물의 감정 표현 및 내적인 생각을 완전히 배제한 채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묘사하는 문체를 특징으로 한다. 그렇기에 독자는 등장인물 중 누구를 믿어야할지, 누구의 판단에 의존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된다. 주인공의 의도를 쉽게 알 수 없고 심지어 주인공의 정직성, 도덕성마저 의심스럽다. 탐정 소설에서는 주인공-탐정이 정직성과 도덕성의 잣대로서 ‘믿는 구석’이 되어준다면, 하드보일드 소설이나 경찰 소설에는 그런 ‘믿는 구석’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법을 수호해야 할 경찰들이 부패하고 타락한 경찰인 경우도 많다.

 

경찰도 사람인 다음에야……, 라는 관점에서 경찰들을 이해해볼 수도 있겠다. 범인들에게 범죄 동기가 있듯이 경찰들에게도 나름의 부패 동기가 있다. 그것은 권력욕일 수도 있고, 개인적 원한일 수도 있으며, 치정문제일 수도 있고, 심리적 외상(트라우마)일 수도 있다. 경찰들은 겉으로는 냉정하고 침착하고 공정한 ‘법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각자 내면의 얼굴 표정은 다양하게 일그러져 있다.

 

탐정은 그렇지 않다. 탐정은, 겉으로는 변덕스럽고 짓궂은 표정을 하고 있을지라도 내면의 가치관만은 확고하다. 범죄에 얽힌 사연을 감안해서 처벌의 정도를 결정하기도 하고, 법의 안과 밖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도―범죄 해결 과정에서 불법을 저지르는 경우가 있다―, 탐정은 결코 사리사욕으로 인해 불법을 저지르지는 않으며(권력욕에 불타거나 치정 문제에 얽힌 셜록 홈스는 상상하기 어렵다) 최종적으로는 독자가 납득할 수 있는(안심할 수 있는) 결과를 가져다준다.

 

말하자면 경찰 소설에서의 경찰들은 사람이지만 탐정 소설에서의 탐정은 사람이 아니다, 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경찰도 사람인 이상 혼란에 빠지고, 또 유혹에 흔들리는 건 어쩔 수 없다. 가령 <킹의 몸값>에서는, 감식반 샘 그로스먼 경위의 ‘흔한 일상’을 묘사한 다음의 대목에서 ‘사람’인 경찰이 매일같이 겪는 심리적 혼란을 감지할 수 있다.

 

 

느닷없이 찾아온 죽음을 현장에서 몸소 맞닥뜨리는 것과 과학 공식에 맞게 재단하여 토막 난 팔다리며 흘린 정액이며 머리카락이 달라붙은 둔기며 뼈에 부딪혀 납작해진 총알을 통해 다루는 것은 한참 다른 문제였다. 살인에 딸려 오기 마련인 섬뜩하고 뭐라 말하기 힘든 흔적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상상력이 샘솟았다. 날카로운 도끼날에 엉켜 붙은 긴 금빛 머리카락은 영안실 안치대에 누운 여인의 시신보다 더 요란하게 비명을 질러댔다. 감식반원들은 문학이 탄생한 이래로 소설가들의 절기가 된 기법을 숫돌 삼아 매일같이 감정을 무디게 갈아내었다. (<킹의 몸값>, 179(이하, 괄호 안에 쪽수만 표기))

 

감식반원 그로스먼 경위의 태도는, 시체를 흥미로운 퀴즈의 단서 대하듯 하는 탐정 홈스의 태도와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 그로스먼에게 시체의 흔적은 단순한 단서, 분석 대상일 뿐만 아니라, 요란하게 비명을 질러대는 것이기도 하다. 법(법의학)의 표정으로 무장한 경찰 감식반원은 시체의 흔적을 분석하고 거기에서 단서를 찾아내지만, 그러기 위해선 매일같이 감정(=사람의 얼굴)을 무디게 갈아내야 한다.

 

경찰 소설 <킹의 몸값>에는 사람인 경찰, 사람인 범죄자, 사람인 사업가가 등장한다. 그들 각각은 자신이 현재 수행하고 있는 역할에 맞는 얼굴을 하고 있다. 경찰은 경찰의 얼굴을, 범죄자는 범죄자의 얼굴을, 사업가는 사업가의 얼굴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경찰이고 범죄자(악당)이고 사업가(거물)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다음 인용이 암시하는 맥락에서의 사람이기도 하다.

 

짧고 간단하고 쉽고 간편하지 않은가. 사람. 사-람(M-a-n). 캐시는 사람인 그를 알았고 사람인 그를 사랑했으며 그를 도둑질로 생계를 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악당이 되지는 않는다. 물론 캐시도 옳고 그름, 법과 무법, 선과 악의 차이쯤은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남편을 악당이라 여기지는 않았다. 악당이란 정육점에서 양고기를 달 때 저울에 슬쩍 엄지를 올려놓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캐시가 필라델피아에 갔을 때 거스름돈을 속였던 택시 운전사가 악당이었다. 노동조합을 지휘하는 사람들이 악당이었다. 살인청부업자가 악당이었다. 거대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들이 악당이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유괴를 계획해서 실행해 옮기는 사람도 악당이었다.
아마도 이 때문에 이 일에 그토록 심란했는지도 모른다. 하루 아침에, 몇 시간 차이로, 에디 폴섬은 도둑질로 생계를 꾸리는 사람이기를 그만두고 악당(crook)이 되고 말았다. 이것이 결과물이라면, 에디처럼 상냥하고 다정하고 사랑으로 가득했던 사람이 악당이 되었다면, 아내에게 책임이 있지 않을까? 그럼 그녀에게 책임이 있다고 한다면 그녀는 대체 어느 시점에서 이상을 양보하고 말았던 것일까? 어디서부터 착한 놈/나쁜 놈이라는 개념이 그 참뜻을 잃고 말았던 것일까? 언제부터 도둑질은 범죄가 아니라고 판단했던 것일까? 정말이지 내 남자가 그런 삶을 살아가길 바란 적은 없었는데 (220)

 

짧고 간단하고 쉽고 간편한 얘기다. 경찰이 있고 범죄자가 있고 거물 사업가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경찰인 사람’이 있고 ‘범죄자인 사람(=도둑질로 생계를 꾸리는 사람)’이 있고 ‘거물 사업가’인 사람이 있다. 물론 사람은 하루 아침에 악당이 될 수가 있다. 또는 썩어빠진 놈이 되거나 개자식, 똥 같은 놈이 될 수도 있다. 누가? 어떻게? 왜?

 


2. 좋은 놈, 나쁜 놈, 썩어빠진 놈

 

“자기가 똥 같은 놈이라는 생각이 듭니까, 킹 선생?”
“닥쳐!”
“들어야지. 당신은 똥 같은 놈이거든.” (231)

 

“예를 들어 난 자기 서방님께서 속속들이 썩어빠졌다는 걸 알지. 이제 와서 네가 놈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없어. 이미 늦었다고.”
“너무 늦은 건 아니에요. 이번 일만 끝나면…….”
“이번 일만 끝나면 다른 일거리가 올 테고, 그 다음엔 또 다른 게 올 테고, 그 다음, 또 다음, 또 또 다음이 이어지지! 누구한테 헛소리야? 자신한테 들려주는 소린가? 에디 같은 건달은 전국의 감옥에서 신물 나게 봤어. 녀석은 썩었어! 악취가 난다고! 젠장맞을, 녀석도 나랑 같다고!(He’s me, for pete’s sake!) 내가 그렇게 훌륭해 보이나?” (243)

 

“당신도 내가 상당히 썩어빠진 놈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노벨상감은 아니죠.”
“그렇겠죠. 하지만 난 노벨상은 원하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건 그레인저 제화뿐입니다.” (259)

 

‘사-람’은 어떻게 하루 아침에 악당이 되고 썩어빠진 놈이 되는가? 캐시는 ‘도둑질로 생계를 꾸리는 사람’과 ‘악당’을 구분한다. 캐시의 구분법을 킹에게 적용하자면 이렇게 될 것이다. ‘사업으로 생계를 꾸리는 사람’이었던 킹이 하루 아침에 ‘썩어빠진 놈’이 되어 버렸다고.

 

다음으로 캐시는 책임의 문제를 거론한다. 사랑하는 남편 에디가 ‘악당’이 되어버린 것에 대해 아내로서 자신의 책임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면 킹이 ‘썩어빠진 놈’이 되어버린 것은 무엇 때문이며 누구의 책임인가?

 

 

지금, 바들거리는 여덟 살짜리 소년을 가슴에 끌어안고 있던 캐시 폴섬의 마음에 전에는 한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무언가가 찾아들었다. 자신의 아이가 아닌 아이를 안은 채 방 건너편에서 사내들이 계획을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노라니 안전한 삶 이상의 것을 바라는 마음이 찾아들었다. 선을 되찾고 악을 극복하고 싶었다. 아이의 떨리는 몸이 그녀의 깊은 곳에 있는 무언가를, 태초부터 존재해온 샘 같은 것을 건드렸다. 바로 그 순간, 그녀는 착한 놈/나쁜 놈이라는 신화는 사람을 놀려먹자고 있는 게 아니라 영감을 주고자 있는 것임을 깨달았다(She knew in that instant that the good-guy—bad-guy fiction was a legend designed not to fool but to inspire). 그리고 에디가 지금의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 것이 어째서 자기 책임인지도 깨달았다. 그녀의 남자는 선을 가득 품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이따금 악을 용인함으로써 선에게 해를 가해 왔던 것이다. (221-2)

 

 

감식반 샘 그로스먼 경위가 시체의 흔적에서 단서를 찾는 자신의 책임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감정을 무디게 갈아내야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에디가 범죄자로서, 또 킹이 사업가로서 자신의 일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서는 감정을 갈아내야 한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책임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즉 (사회적) 역할에 수반되는 책임이 있고, 그런 역할과는 상관없이 단지 사람이기 때문에 느끼는 책임이 있다. 전자가 후자를 압도할 때, (납치와 같은) 어떤 사건이 갑자기 발생하고 그걸 이유와 핑계로 전자가 후자를 압도하도록 용인할 때, 사람은 악당이 되고 썩어빠진 놈이 된다.

 

하지만 어째서 악당, 썩어빠진 놈이 되어서는 안 된단 말인가? 킹은 말한다. “우린 닮았잖아, 안 그래? 같은 패거리 아니야? 형제나 다름없잖아? 둘 다 개새끼잖아?”(214)

 


3. 다 개새끼잖아? 나한테 그런 걸 요구하면 안 되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악당이고 개새끼인 사회에서 악당이 되고 개새끼가 되는 건 선택이 아닌,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개새끼가 되어야 한다. (<짐승의 길>에서 마쓰모토 세이초가 쓰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자신과 관련이 없는 일에는 지극히 공평한 입장에 선다.” 공평무사한 태도를 취하다가도 일단 자신의 일이 되면, 아주 간단히 입장을 바꾸기도 하는 게 사람이다. 인간으로서의 도리니 기본적인 책임이니 운운하는 것은, 사실 알고 보면 더러운 음모의 일부거나 애초에 개싸움에서 이길 자신이 없는 약한 개새끼, 운이 좋아 곱게만 자라온 투쟁심 없는 개새끼의 핑계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나는 ‘(잠재적) 개새끼’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 누구인가?

 

개새끼들의 사회, 속속들이 썩어빠진 사회. 이것은 하드보일드와 경찰 소설의 세계인식이기도 하다.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 또는 세계를 대하는 인물의 태도를 기준으로 탐정 소설과 경찰 소설을 구분할 수도 있다(세계인식은 자기인식과도 연결된다. 다시 말해, 어떤 인물이 세계를 대하는 태도는 자기 자신을 대하는 태도와 연결된다. 세계인식과 자기인식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뒤에서 계속 쓰도록 하겠다).

 

탐정 소설에서 살인 사건 등의 범죄는 어디까지나 ‘예외적 사건’이다. (그럴리는 없겠지만) 적어도 소설 속에서 사건은, 그것만 해결되면 사회가 정상 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 것으로서 제시되고 다뤄진다. 주요 인물(=탐정)이 사건을 대하는 태도는 더욱 의미심장하다. 가령 홈스는 어디에선가 ‘흥미진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면 지루해서 죽을 지경이 된다며 불평을 늘어놓는다. 탐정에게 범죄는 ‘지루한 세계(그래서 평온하고 안심할 수 있는 세계)’에서 벌어지는 유희이고 오락이다. 이것이 탐정 소설의 인물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 세계를 대하는 태도다.

 

이와는 달리 하드보일드, 경찰 소설의 세계는 썩어빠진 세계다. 경찰=민중의 지팡이=정의 사회 구현의 선봉인 사회가 아닌 것이다. 이 세계에서 범죄는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일상’이다. 평온한 일상을 살다가도 어떤 상황이 벌어지면 범죄에 말려들 수 있다. 누구나 한 순간에 사람의 얼굴 표정을 갖다버리고 개새끼, 악당, 썩어빠진 놈이 될 수 있다. 한 순간에. 그런데 누구도 그러한 행동을 막을 수도, 비난할 수 없다. 모두가 악당과 개새끼로 한 순간에 돌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들려줄 수 있는 대답은 이런 것뿐이다. “사람을 잘못 찾아왔네, 레이놀즈! 난 자넬 도울 수 없네. 제프를 도와줄 수 없어.”(229) “그 돈을 낼 순 없어. 나한테 그런 걸 요구하면 안 되지.”(195)

 

탐정 소설의 세계에는 나름의 확립된 질서가 존재한다. 간혹 균열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탐정은 고도의 지적 능력과 도덕적 능력을 발휘하여 그 균열을 메꾼다. 탐정은 법의 안팎을 넘나들며 때론 법 위에 서기도 한다. 궁극적으로는 법의 허점을 보완하고 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불법과 무법이 용인되는 식이다(탐정이 법을 넘나들며 법을 수호하는 일련의 과정, 그 역설적이고도 비현실적인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독자에게 쾌감과 해방감을 가져다준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한 것은 탐정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며, ‘사람’이 아니기에 개새끼, 썩어빠진 놈으로 돌변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탐정은 아마추어이고 그의 범죄 수사는 어디까지나 취미 활동이자 (퀴즈 풀이나 게임에 상응하는) 오락이다. 요컨대 탐정에겐 초인적 지력과 도덕적 판단력이 있는 대신, 사회적 역할이 없고 역할에 따르는 책임이 없다. 당연히 어떻게든 주어진 책임을 주어진 시간 안에 수행하기 위해 사람의 감정을 갈아낼 일도 없다. 탐정에게는 무거운 책임감보다 유희에의 열정이 먼저다. 흥미가 있어 보이는 일만 맡는다―이게 셜록 홈스가 사건을 맡는 원칙이다.

 

 

“(…) 난 돈을 내놓으란 소리를 들을 이유가 없는 사람이고, 그래서 안 내는 것뿐이야. 내가 보기엔 이미 끝난 문제야.”
“하지만 아직 애잖아! 애라고!”
(…)
“그래, 애지. 그게 무슨 상관인데? 그렇다고 내가 그 애를 책임져야 하나? 애든 어른이든 땅 속에서 나온 괴물이든 왜 내가 그 애를 책임져야 하지? 도대체 그게 왜 내 책임이냐고?” (185)

 

“아이잖습니까. 어떻게 가만히 서서 어리고 연약한……,”
“한번만 더 그 어리고 연약한 어린애 어쩌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간 토할 지경이야! (…)” (209)

 

 

확립된 질서가 존재하는 세계라면, 그 질서에 비추어 서로가 서로에게 ‘(사람으로서 책임을 지라고) 요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리고 연약한 아이의 목숨’은 소중한 것이니까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지켜야한다”는 명제는 ‘확립된 질서’에 해당하는가?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우리들 대다수가 확립된 질서로 여길 이 명제는 <킹의 몸값>에서 몇 가지 요소로 분해되고 분해된 각각의 요소들이 재검토 대상이 된다. 가령 ‘아이의 목숨’ 부분은 “그 아이가 내 아이인가, 남의 아이인가?” 라는 반문에 의해,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부분은 킹이 자신의 사업은 곧 자신의 목숨이나 다름없다고 (나름 설득력 있게) 항변하는 대목에 의해 재검토 대상이 된다.

 

그게 왜 내 책임이냐는 킹의 항변이 설득력 있게 들리는 것은 <킹의 몸값>의 세계 인식, 곧 이 사회는 ‘개새끼들의 사회’라는 세계 인식 때문이다. 또 우리가 그러한 세계 인식에 어느 정도 깊이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킹은 자신이 ‘어리고 연약한 아이’를 이유로 조금의 빈틈만 보이면 개새끼로 돌변하여 자신을 물어뜯고 짓밟을 이들에 둘러 싸여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것은 킹 자신이 한 마리의 개로서 숱한 (개)싸움을 통해 ‘재계의 거물’이라는 ‘인간과는 다른 종’(201)으로, 곧 ‘크고 아름답고 강한 개새끼’로 성장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다 개새끼잖아.’ 이것이 이 세계의 대전제―나름의 ‘확립된 질서’다. 바로 이것에 비추어 킹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나한테 그런 걸 요구하면 안 되지.” 개새끼들의 사회에서 크고 강한 개새끼를 그만두는 순간 그는 죽는다. 이건 캐시의 ‘사-람’ 얘기만큼이나 짧고 간단한 얘기가 아닌가―“다 개새끼잖아?” 

 

하지만 이게 소설 <킹의 몸값>의 결론인 건 아니다. 에드 맥베인은 이 세계가 썩어빠진 세계라고, 개새끼들로 가득 찬 사회라고 단정짓지 않는다.

 

소설의 마지막 대목. 킹은 몸값 지불은 거절했지만 아이를 구하러 직접 나선다. 이때 그가 하는 말은, 모르겠다는 것이다. 솔직한 고백.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그래요, 모르겠습니다. 놈들이 원하는 돈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죽을 테니까 안 됩니다. 그것 때문에 내가 썩어빠졌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좋습니다. 난 썩어빠진 놈입니다. 하지만 나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카렐라 씨. 그건 동화에나 나오는 얘기죠. 사악한 마녀가 사랑스러운 공주로 변하고, 두꺼비가 왕자로 변하고, 썩어빠진 기생충 같던 놈이 문득 자기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남은 평생을 선을 위해 헌신하는 그런 동화는 미국 텔레비전 시청자나 보라고 만든 헛소립니다. 나는 절대 바뀌지 않을 겁니다. 나도 알고 다이앤도 압니다. 그리고 다이앤은 내게 돌아올 겁니다. 날 사랑하니까요. 나는 절대 바뀌지 않을 겁니다. 내가 썩어빠진 놈이라면 썩어빠진 놈 하겠습니다. 하지만 난 평생을 싸워 왔으니까 놈들이 원하는 돈을 줄 수는 없을지언정 이런 식으로 따라가면서, 뭔가 하기라도 하면서, 놈들과 싸울 수는 있습니다.” (263-4)

 

 

그러고 보니 “다 개새끼잖아?”에는 물음표가 붙어 있었다. 아직은 ‘확립된 질서’가 아닌 것이다. 이렇듯 두 개의 미확립 질서--아이는 보호해야 한다 vs. 다 개새끼다--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충돌하는 가운데, 어떤 확고한 결론을 내지 못한 상태에서, 킹은 자신의 방식, 평생 해왔기에 익숙한 '싸움의 방식'으로 난관을 돌파하려 한다. '썩어빠진 인간'으로서 킹이 할 수 있는 최대치.

 

여기서 문득, “어리고 연약한 아이는 무조건 보호해야 한다”는 명제가 ‘확립된 질서’로서 통용되고, 거기에 대한 반문과 항변이 전혀 없었던 사회나 시기가 과연 실제로 존재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이=어리고 연약한 존재=무조건적 보호의 대상’라는 관념 자체가 18-19세기 부르주아 가족 이데올로기와 깊숙이 연관된 일종의 발명품이다. ‘가족=사랑과 행복이 넘치는 사적 공간’이라는 관념도, 속악한(썩어빠진) 사회와 분리된 어떤 순백의 공간으로서 가족을 상상하는 것, 그 중심에 ‘어리고 연약한 아이’와 ‘무한한 사랑으로 아이를 보살피는 어머니’를 위치시키는 것도 가부장주의, 민족주의, 국가주의, 자본주의 사회의 이데올로기와 깊숙이 연관된 것이지 절대적 도덕은 아니다. ‘사업보다도 아이의 생명이 우선이다’라는 명제를 가리켜 ‘인간적’이다, 라거나 ‘휴머니즘’이다, 라고 단언할 수 없는 이유다. ‘인간’이라는 관념 자체가 역사적으로 변해온 관념이 아닌가.

 


4. 모두들 필요한 거라곤 약간의 시간뿐인지도

 

“착한 놈/나쁜 놈이라는 신화가 사람을 놀려먹으려고 만든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자 있는 것”이라고 캐시는 깨닫는다. 하지만 더글러스 킹은 그것을 ‘동화에나 나오는 얘기’로 치부한다. 이점에 착안해서 소설의 대립 구도를 ‘캐시의 신화’ vs. ‘킹의 동화’로 짜볼 수도 있겠다.

 

캐시와 킹, 이 두 인물이 보이는 인식의 차이, 태도의 차이는 각자가 처한 상황과 입장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자 그렇다면, 우리의 입장은 어떤가? 당신은 캐시와 킹 중 어느 편에 더 공감하는가?

 

어른이 되었다 해도 동화에서 영감(감동)을 얻는 게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어느 정도 알았다는 이들은 대개 동화속 세계관을 단순‧순진한 이분법이라며 조롱한다. 착하게 살아도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나쁜 놈일수록 잘 잔다’는 사실을 우리는 각자의 경험을 통해, 정치계나 재계 쪽 ‘거물들’에 관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이야기들을 통해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잘 알고 있는 것일까? 오늘날 ‘개새끼들이 창궐한 썩어빠진 사회’에서 착하게 사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든 어떻게라도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과연 미친 짓일까? 아니 혹시, 우리의 일천한 사회 경험과 여기저기서 바람에 실려 오는 얘기들만을 근거로 이 사회를 곧바로 ‘썩어빠진 사회’로 단정지어 버리고, 자포자기적 냉소와 함께 자기 자신을, 나아가 우리의 친구와 동료와 이웃을 모두 싸잡아 ‘(잠재적) 개새끼들’로 규정해버리고, 그러한 자기인식에 함몰되어 정말로 개새끼처럼 살아가는 게 실은 더 미친 짓인 건 아닐까?

 

 

지금 그녀가 입 밖에 꺼내고 싶은 말은 이류 멜로드라마에 나오는 도둑이라면 늘 한 번씩 토해 내곤 하는 말이었다. 지금 그녀가 외치고 싶은 말은 피 흘리며 시궁창에 처박한 갱스터의 입에서 흘러나옴직한 말이었다. 지금 그녀가 흐느끼며 내뱉고 싶은 말은 책 웹의 통렬한 마무리 대사를 이끌어 내기 위해 조연인 범죄자 캐릭터가 함직한 말이었다.
한 번만 봐 주면 안 될까?(Give me a break, will you?)”
(…)
“넌 봐 준 적 있나?”
현실에는 마무리 대사 같은 건 없다.
캐시 폴섬은 한 번만, 비굴해도 좋으니까, 한 번만 더 기회가 있기를 바랐다. (221-2)

 

 

<킹의 몸값>은 숨 돌릴 틈 없이 전개되는, 호흡이 빠르고 몰입도가 높은 소설이다. 그 빠른 전개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사건을 둘러싸고 당사자들이 벌이는 논쟁들이다. 킹과 다이앤, 에디와 캐시, 킹과 피트, 경찰과 킹은 쉴 새 없이 논쟁을 벌인다. 하지만 이들 간에 벌어지는 논쟁은 어떤 정해진 결론이나, 당사자들 간의 합의 또는 화해에는 이르지 못한다. 상황은 빠른 결단을 요구하지만 결정은 다소 미뤄진다. 소설의 끝에 이르러서까지도 인물들은 여전히 윤리적 딜레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다만, 소설은 윤리적 딜레마에 대한 명확한 해결책을 던져주는 대신, 그러한 딜레마를 안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넌지시 암시한다.

 

 

“녀석들에게 필요한 게 그 시간인지도 모르지.” 사이가 말했다. 목소리에 문득 슬픔이 깃들었다. “모두들 필요할 거라곤 약간의 시간뿐인지도(Maybe a little time is all anybody ever needs).” (282)

 

“왜 기생충 같은 놈들은 항상 보상을 받는 걸까?”
착한 사람은 일찍 죽고 말이지.” 카렐라가 마무리해 주었다.
난 아직 안 죽었어.
“킹도 안 죽었지. 이 망할 사건에서 몸값을 낸 사람은 아무도 없을지 모르지만, 어쩌면 모두가 낸 건지도 몰라.”
“설명이 필요하겠는데?”
“시간을 좀 줘보란 얘기야. 그 사람도 칼날 앞에서 목숨을 걸 필요는 없었잖아.”
“칼을 상대할 배짱이 있다고 해서 자기 자신을 상대할 배짱까지 있다는 얘기는 아니지.”
“진주는 인고의 산물이나니. 시간을 줘 보라니까(Give him time). 그는 자기가 바뀔 수 없다고 말했어. 하지만 난 그가 바뀌어야만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죽을 거라고 봐. 그 사람 아내가 왜 돌아갔다고 생각해? 할머니 길 건너시는 걸 도와 드려서?” (285-6)

 

 

이렇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소설 <킹의 몸값>에서 제기된 딜레마는 소설의 말미에서도 결국 해소되지 못하지만, 애초에 딜레마에서 자유로웠거나 별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도 그에 대한 ‘각자의 몫’을 나눠 가진 셈이 되었다고. 유괴 사건에 관여한 경찰들도, 심지어 유괴를 주도한 범인인 사이도.

 

오늘날 이 ‘썩어빠진 사회’에서 ‘망할 사건’들은 매일같이 발생한다. 망할 사건은 예외적인 것이 아닌 일상이 되어버렸다. 사회 전체가 싸움터(전쟁터)가 된 마당이라 (생존)싸움에서도 평생 동안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네 삶은 싸움의 연속이 되었고 모두들 싸움꾼의 ‘절기(subtle weapon)’와 ‘멘탈’을 수련하려 애쓴다. ‘착한 사람은 일찍 죽는다’는 말이 진리처럼 통용되는 게 현실인데도, 그러한 현실에 대해 아무도 책임감도 반발심도,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위기감도 느끼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만 적응하려, 크고 강한 개새끼가 되려 애쓸 뿐이다. 어째서 사회는 전쟁터를 방불하는 생존 경쟁의 장이 되었고, 어째서 우리는 썩어빠진 놈들로 변해버렸나? 만화 <「도련님」의 시대>의 한 대목을 빌리자면, 다음과 같은 식의 체념 어린 대답이 가능하리라. “그것이 시대의 흐름이라는 것이겠지요.” 우리는 다만 술 한 잔 걸치고, 불콰해진 얼굴로 ‘시대의 흐름’ 탓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정녕 개인의 힘으로 시대의 흐름을 어떻게 할 수는 없다. 우리들 각자를 썩어빠진 놈으로, 크고 강한 개새끼로 만들고야 마는 이 시대의 흐름 앞에서 개인은 무력하다.

 

시대의 흐름에 대해 사람들은 저마다 다양한 태도를 취한다. 잽싸게 시대의 흐름을 타는 사람이 있고, 격류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겨우겨우 헤엄쳐나가는 사람도 있다. 시대의 흐름에 맞서다가 튕겨져 나와 만신창이가 된 사람도 있고, 시대의 흐름으로부터 도망쳐 자기만의 은신처(=돌아갈 곳)를 만드는 사람도 있다. 시대의 흐름을 잘 이용해 남들을 짓밟고 올라가려는 사람이 있고, 짓밟힌 자들에게 자신의 은신처를 제공하여 돌보려는 사람도 있다. 누가 좋은 놈이고 누가 나쁜 놈이며 누가 썩어빠진 놈일까? 아니면 그냥 다 개새끼들인 걸까? 이에 대한 킹의 솔직한 고백―“모르겠습니다. 아니면, 그래요, 모르겠습니다.” 정말이지 모를 일이다. 분명한 건 이렇다. 누구도 ‘나는 개새끼’라는 자기인식을 갖고는(아무리 싸움에서 승리한 개새끼라 한들) 살 수 없다는 것. 이 점, 카렐라의 말대로다. “난 그가 바뀌어야만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죽을 거라고 봐.

 

앞서 썼듯이 자기인식은 세계인식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 킹이 스스로를 개새끼라고 부르고 카렐라 앞에서 썩어빠진 놈임을 인정하는 것은, 이 사회가 개새끼들의 사회, 썩어빠진 놈들의 사회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고, 그러한 생각대로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킹은 ‘모르겠다’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분명한 또 하나의 사실은 이런 것이다. 이 사회가 썩어빠진 사회라고, 무자비한 전쟁터라고, 너나 나나 모두 싸움에 이골이 난 썩어빠진 개새끼―투견들이라고는 누구도 섣불리 단정할 수 없다는 것. 이 시대는 우리에게 ‘경쟁력을 갖출 것’ ‘남들보다 빠를 것’ ‘믿을 건 돈 밖에 없다는 생각’ 등을 삶의 필수조건으로 요구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경험을 쌓으면, 조금만 관점을 달리 하면 그게 섣부른 단정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기도 한다는 것. 그러니, 사이의 말대로 “모두들 필요한 건 약간의 시간뿐인지도.” 바라건대 스스로를 ‘악당’으로, ‘개새끼’로 여기게 되어버린 이들에겐 “비굴해도 좋으니까 한 번만 더 기회가 있기를.” 이 경쟁 일변도의 사회에서 일찍 죽어 없어져버렸으리라 여겼던 착한 사람들이 순진한 어조로 ‘난 아직 안 죽었어’라고 대꾸하는 걸 좀 더 자주 들을 수 있기를.



20140112


막독10기 돌+I / 세 번째 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