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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초언니
서명숙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5월
평점 :
그 시절엔 그랬다. 나 혼자 행복하면 안될 것 같은 느낌, 불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정의를 외면하고 받은 대가는 처절한 고독과 소외와 엄청난 죄책감이다. 오래전에 방영된 TV 드라마 모래시계 중 중 고현정이 쌀을 사면서 우는 장면이 있다. 현 시대의 가치관으로서는 그 울음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시대를 지나쳐 오면서 똑같이 쌀을 사며 눈물 흘렸던 기억을 가진 나는 고현정의 울음을 함께 삼켰고, 그 장면을 쓴 작가와 한마음이 되어 있었다. 내가 편히 밥을 먹으며 내 한 몸의 배를 채우는 동안 뜻을 같이 했던 동료는 지독한 고문 속에서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를 위해 싸우고 있다는 생각. 그것은 밥을 먹고 실존해야 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행위마저 죄책감에 시달리게 했다.
그 땐 그랬다. 모두가 힘들었다. 싸우는 사람도, 지켜보는 사람도. 싸우다가 포기한 사람도. 모두가. 옳고 그름을 가리는 선이 선명하고 뚜렷하게 그어져 있었고, 싸우지 않음은 그 선명한 선의 반대쪽으로 선회함을 의미했다.사회 참여라는 행위는, 단순히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가 추위와 싸우는 것과는 다른 양상의 희생을 요구했다. 그것은 인생의 시작 지점에서, 남은 인생 전체를 막 담보로 해야 하는 종류였다. 이러한 양상의 행위가 목숨을 내놓고 전쟁터로 끌려가는 징집병들과 또 다른 점은, 그러한 선택이 자발적이었다는 점이다. 그 누구도 그들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족과 학교와 제도권의 모든 힘은 그들의 행동을 만류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선택의 순간은 어느 한 두 시점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매일매일 순간 순간 두려움이 거대한 파도처럼 수시로 밀려오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공포가 남은 용기마저 갉아먹는다. 그들을 붙든 것은 아마도 시대가 요구한 민주화의 열망이었다. 끝없는 갈등 속에서 투사와 소시민의 삶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고충은 청춘을 민주화 투쟁에 바친 사람들이 겪은 고충 중에서도 알려지지 않은 이중삼중의 고초 중 하나다.
영초언니와 같은 언니들을 몇 알고 지냈었다. 나는 내가 싫어 미칠 지경이었는데, 쌀을 사서 꾸역꾸역 밥을 먹고, 도서관에서 영어 공부를 하고, 취업 준비를 하는 내가 싫어 하늘만 처다보면 눈물이 나는 데도, 수배중인 선배가 내가 혼자 살고 있던 집에 피신해왔다. 나는 내가 싫어 심술밖에 남은 것이 없는데, 나의 영초언니는 내가 학교간 동안 에너지가 남아돌아간다며 빨래도 해주고 밥도 해주면서 고문을 앞둔 나날들을 '즐겁게' 지냈다. 즐거운 척 하는 것이 비겁한 마음을 더 아프게 찔렀다. 당시엔 앞뒤 생각없이 자신을 투신하는 단순성을 비하하는 마음가짐이 시대적 본질을 되새기는 것보다 편리한 심리적 선택이었다. 언니가 떠난 후 얼마나 지났을까, 법정에 선 언니가, 무어라무어라 외치던 소리를 기억한다. 민주화 투사들의 그 찬란하던 연설과 비교하면 허접하기 짝이 없었던 짧고 성의없던 (관영) 변호사의 변론도 기억한다.
유시민은 첫사랑이라고 표현하였다. 첫사랑이 무방비의 심장에 충격스럽게 들이닥쳐 삶을 독점하는 이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갑자기 나타났기 때문이다. 고3까지 권력이 선도하는 제도권의 교육 현장에서 세뇌되었던 그 모든 것이 모두 다 거짓이었음을 확인하던 순간 무섭게 빠졌던 첫사랑에 발동이 걸리는 이유 하나는 공포이고 또하나는 미래다. 겁쟁이는 가장 먼저 21세에 만난 첫사랑과 결별하고, 세속적 욕망이 강한 사람은 서서히 첫사랑과 결별하고, 두려움을 떨칠 수 있는자들, 정의를 위해서라면 온몸을 바칠수 있는 자들이 끝까지 남았다.
나의 영초언니는 모르는 채로 사는 것이 낫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