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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 1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 지음, 안영옥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1월
평점 :
고전이 고전이 되는 이유는 당대의 가치를 뛰어넘는 가치, 시간이 흐르고, 문화와 사고와 기술 모든 것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보편적 인류의 가치를 담아내서다. '이후에 쓰인 소설은 돈키호테를 다시 쓰는 것이나, 그 일부를 쓰는 것'이라는 르네 지라지의 평가는 돈키호테가 수백년동안 전세계인에게 읽혀오는동안 많은 예술가들로부터 받은 수많은 찬사 중 하나다. 이런 수식어를 모른다 하더라도, 돈키호테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돈키호테를 아는 사람이란 돈키호테가 풍차에게 달려들어 싸우는 무모한 인간이라는 하나의 정형화된 인간상을 알고 있을 뿐, 돈키호테의 복잡한 캐릭터가 이루어내는 유쾌하고도 장대한 모험을 모두 읽고 이해한 독자는 크게 많지 않을 것으로 장담한다. 그 첫번째 이유는 원작의 두께가 워낙 두껍워서 일단 손에 잡아 시작하기도 어렵고 다 읽기도 어렵다. 다른 이유는 어린이용 축약버전이 워낙 많아, 누구나 돈키호테의 이야기를 다 알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되고 또한 그 축약된 내용이 마치 단순한 동화 이상의 것이 아니어서 크게 흥미를 못느끼게 하는 면도 있을 것이리라. 또다른 이유로 그토록 유명한 돈키호테의 완역본이 2권 모두 국내에 소개된 지가 비교적 최근의 일이어서기 때문이기도 하다.
완역본 이야기를 먼저 하지 않을 수 없다. 역자 안영옥 교수가 2014년 번역 직후 인터뷰 기사에 의하면(조선일보 인터뷰) 당시 국내에 원문을 직접 번역한 책은 시공사(박철 번역), 창비(민용태) 번역 두 권이고, 두 권 모두 문제를 지적했는데, 시공사본은 당시 1권만 번역되어 있었으며 1권도 뒷부분은 ‘허술’했다는 평가, 창비본은 의역이 많다는 점을 들었다. 그렇다면 이 책은 ‘당대 스페인 문화를 충분히 이해하고 충실하게 반영하는 번역본이 되도록 애썼다’는 것이 작가의 설명인데, 독자로서는 주석이 많아 몰입에 방해되는 요소도 있지만, 시대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니까, 식문화에서 객주집 풍경, 당대 유행하던 속담(산초의 인용력 막강), 사회적 통념과 문화 제도 전반에까지 엄청나게 많은 민속사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이것은 현대에 쓰여진 역사 소설을 읽을 때 드는 졸렬한 의심들, 과연 그 때 이런 저런 게 있었을까 그 때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했을까 하는,을 없애주고 당대의 문화를 직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그 점에서 이 번역서의 충실한 원문 번역과 엄청나게 많이 제공되는 열린책들 방식의 주석처리를 높이 평가한다.
돈키호테의 모험담 속에는 돈키호테가 만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책속의 책이다. 서재를 떠나 편력 기사가 되어 모험을 찾는 일에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과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누구나 길을 떠나게 된 자신만의 사연이 있다. 많은 재산을 가져 모든 남성들에게 구애를 받고 있지만 산양치기가 되어 자유롭게 살고 있는 여자 목동 마르셀라와, 그녀에게 구애하다 상사병에 죽은 남자목동 그리소스토모 장례일에 벌어진 소동이 대표적이다. 이 이야기는 돈키호테가 모험중 만나 신세를 진 목동들과 그리소스토모의 친구 양쪽에서 서로 다른 두 시점으로 전달된다. 같은 사건을 상반된 서로 다른 시선으로 전달되는 형식의 문학적 장치가 다름 아닌 모험담 속의 아주 지극히 일부로 나타나는 것이다.
장례일이 되자 구애를 뿌리쳐 그리소스토모를 죽게 했다는 온 마을 사람들의 비난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마르셀라가 직접 나타나 당차고 똑똑하게 자신의 입장을 표현한다. 목동 마르셀라는 순결과 미적 아름다움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시대적 지표에 여성의 가치가 결정되던 암흑기와 같던 중세 말기에서 크게 나아가지 못한 대상화된 여성에서 스스로 벗어나 자유를 찾은 여성을 대변한다. 버지니아 울프가 작가가 되기 위한 조건으로 혼자만의 방과 생활할 수 있는 돈을 꼽았는데, 이미 세르반테스는 마르셀라 이야기에서 시대가 옭아맨 그 조건으로부터 해방된 조건과 진정한 자유를 추구하는 여성상을 제시했다. 비록 그녀의 자유를 지켜줄 부와, 그녀의 존엄을 지켜줄 ‘시대적 미’가 본인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얻어진 것이 아닌 태어날 때 이미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이 이러한 여성의 자유라는 조건에 스스로 한계를 긋는 일일 수도 있겠으나, 여성이 재물을 가지고 결혼을 하면 남성이 접수하던 시대적 상황을 생각할 때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홀로 자연을 즐기며 산야에서 산양치기가 됨으로써 스스로를 당대의 여성상에서 해방시킨 마르셀라는 돈키호테의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소설의 위대함을 돈키호테의 전조적 인간상을 통해 보여준다고도 볼 수 있다. 돈키호테만큼이나 상식을 깨는 마르셀라지만 두 사람의 본질은 상반된다. 이미 유행이 지난 기사소설과 편력 기사 쪽으로 퇴보적이고 비논리적이고 행동과 감정이 먼저 앞서는 원조 의리의 사나이 돈키호테와는 달리 진보적이고 논리적인 마르셀라의 행동은 이성적이고 차갑다.
“순결을 지키려 하는데, 남자들에게서 순결을 지키기를 요구하면서, 또 그것을 잃도록 하는 건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아시다시피 전 재산이 있으며 남의 것을 욕심내지 않습니다. 저는 자유로워 남에게 속박되는 것이 싫습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며 아무도 증오하지 않습니다. 이자를 속이고 저자에게 구애하지도 않습니다. (...) <나는 비록 못생겼지만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법입니다. 만일 양쪽이 똑같이 아름답다고 하더라도 마음까지 같아야 되는 법은 없습니다. 아름답다고 다 사랑하게 되는 것도 아니니까요. 어떤 아름다움은 눈을 기쁘게 하지만 마음까지 움직이지는 않습니다. 만일 아름답다고 다 사랑하게 된다면 어느 쪽에 마음을 둘지 몰라 헤매고 다닐 것입니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수없이 많으니 사랑하고 싶은 마음도 수없이 많을 수밖에 없을 테니 말입니다. 제가 들은 바로는 진정한 사랑은 결코 나누어지지 않고, 본인의 의사에 따라 결정되며, 강요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나무들과 물에게 제 생각과 아름다움을 이야기합니다. 저는 혼자 떨어져 있는 불이며 멀리 놓아둔 칼입니다. 저를 보고 사랑을 느낀 사람들에게 저는 말로써 정신을 차리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희망으로 지탱된다면, 저는 그리소스토모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에게도 희망을 준 적이 없으므로 …”
돈키호테는 대개 괴짜이거나 미쳤거나 의협심과 정의심에 불타는 등의 말로 설명되고 있다. 그런 제한적 단어들은 그의 캐릭터가 그만큼 눈에 잡히게 단순하고 다음 행동을 예상할 수 있을만큼 확실하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하지만 때로 캐릭터가 복잡 미묘한 그의 모습을 만날 때도 있다. 초반에는 계속 비슷비슷한 바보짓이 끝까지 계속되나 싶어 미리 지루해지기도 하고 단순하고 용감무쌍하고 실패에도 꿋꿋한 정신승리를 보여주는 맛이 간, 인간의 면만 드러나 평면적으로 느껴져 축약본에서 본 것 이상을 느낄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는데, 읽으면 읽을 수록 돈키호테와 산초, 그리고 심지어 그들의 말과 당나귀까지 합세해 이 네 개체가 세트를 이루며 만들어내는 코믹하고도 눈물겨운 이야기에 점점 빨려 들어가다가 후반에는 더욱 다양한 인간들의 이야기와 함께 깊이 있게 그의 내면을 탐색해볼 수 있었다.
세르반테스 스스로도 밝힌 바 있듯이 훌륭한 이 책은 기사소설의 패러디 정도로 그것들을 비판하기 위해 쓰여졌지만, 읽다보면 기사소설을 비판하는 자들에 대한 비판까지도 담겨 있다. 돈키호테의 기이한 행동들은 그가 즐겨 읽은 기사소설의 영향으로 일축된다. 기사 소설이 터무니없는 모험담을 담고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주인공의 비상한 능력과 앞뒤 안맞는 엉터리 이야기들을 싣고 있는데 거기에 푹 빠진 돈키호테가 현실 감각 능력을 잃어버려 소설과 현실 사이의 분별력을 잃어버렸다는 설정이다. 신부와 이발사, 가정부와 조카 등 주변의 모든 인물들이 돈키호테의 미친짓의 원인을 기사소설로 지목, 책들을 주인 허락도 없이 다 태워버리는 지경에 이를 정도다. 그의 환상은 모두 기사소설에서 읽은 내용들이고, 그가 만든 기사도의 규칙도 모두 책에서 가져온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모든 잘못된 행동 마저도 기사 소설의 내용을 가져다가 합리화시키곤 하는데, 예를 들어 객주집을 성으로 알고 들어가서 신세를 져 놓고도 세상에 어떤 기사가 객주집에서 돈을 지불하느냐는 황당한 궤변으로 숙박과 식사비를 지불하지 않는다. 이렇게 그는 길에서 만난 신부들이며, 이발사며, 상인, 공무원(?), 목동 등을 닥치는 대로 소설 속에서 본 시나리오에 대응시켜 자신이 정의를 실현하고 무훈을 얻기 위해 상대해야 할 적으로 돌변시켜 공격을 하다가 반대로 얻어터지곤 한다. 돈키호테에서 풍차 이야기는 지극히 일부이고 그 이야기 자체가 1800 페이지 전체에서 1~2 페이지 분량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비슷한 종류의 모험은 내내 계속된다. 풍차가 거인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의 눈에는 모든 것들이 온통 기사 소설에 등장하는 씬으로 돌변한다. 초라한 객주집이 성으로 보이고, 객줏집 창녀들이 귀부인으로 보이고, 양떼들은 창과 칼을 들고 달려오는 군사떼들로 보이며, 이발사의 대야는 투구로 보이고, 뿐만 아니라 그는 싸움을 걸 때면 분별력도 없다. 그 때문에 돈키호테는 돌아다니는 동안 하도 두들겨 맞고 칼에 베이고 해서 온몸은 성한데가 없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돈키호테는 기죽지 않고 포기하지 않으며, 기사 소설의 일부들을 읊으며 합리화를 시키는 것이다. 정 설명이 안되는 것은 마법에 걸려서라고 설명한다.
이렇게 돈키호테의 기행의 원인으로 기사 소설이 지목되어 비난의 대상이 되는 동안, 그런 기사소설들에 대한 논쟁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계기가 있는데, 교단 회원과 신부와의 논쟁, 그리고 돈키호테와 교단의 한 회원과의 대화에서다. 특히 신부와 교단 회원과의 대화는 지금 이 세기에 벌어지고 있는 문학의 순수성과 상업성에 대한 논쟁에 대입해도 될만큼 동일한 사회 현상들을 담고 있다.
극이 이렇게 된 것은 극을 쓴 시인들의 잘못이 아니오. 왜냐하면 시인들 중에서는 자기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아주 잘 알며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를 철저히 파악하고 있는 자도 있으니 말이오. 그런데 극이 팔 수 있는 상품으로 변해 버린 탓에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면 극단 측에서 작품을 사지 않을 거라고들 하더군. 사실이 그렇기도 하고 말이오. 그러니 시인은 자기 작품에 돈을 지불할 극단의 요구에 맞추려 하는 거요. 우리 나라의 그지없는 행운아인 천재가 쓴 수없이 많고도 많은 작품들을 보면 이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게 될 거요.
이 대화에서도 그렇지만 때로 돈키호테는 대화중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논리적이면서도 깊은 사고를 펼친다. 따라서 그를 전적으로 미친 사람 취급할 수도 없다. 달리 보면, 기사도 정신이라는 그가 몰입한 세계에 대해서만 미친 것이다. 때로 우리는 어떤 일에 지나치게 온 몸과 정신을 쏟으며 열정을 다하는 사람을 ~에 미쳤다라고 얘기하는데, 그런 것이 심할 때에는 정신적으로 지나친 집착으로 평가하며 실제로 살짝 미친 사람 취급하기도 한다. 엄청나게 많은 다양성이 존재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은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특정한 세계에 빠져 그것에 열정을 다하고 있는지를 생각한다면, 정도와 종류가 다를 뿐이지 넓은 의미에서의 돈키호테적인 인간상이란 흔하디 흔한 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우리가 알고 있는 키호테는 대략 이상주의자가 현실의 벽에 부딪혀 좌절하는 내용으로 일축된다. 돈키호테가 어떤 사람이냐에 대해 말하는 것은 하나의 소설에서 한줄로 요약된 주제를 맞추는 정답을 맞추는 게임이 아니라, 돈키호테가 보여준 여러 그토록 다채로운 행동들 속에서 알지 못했던 인간의 모습을 만나는 일이고, 그가 한 말에서 공감을 찾아내는 일이다. 물론 현실과 이상은 다르다. 사회를 구원하겠다는 그의 바람은 현실에서는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미친 행위이다. 글이 쓰여진 때는 기사도 정신이 찬양 받던 시대 는 저물고 기사 소설의 인기도 급하락하던 시기였다고 한다. 기사가 되기에도 불충분한 하급계급 출신의 이달고인 그가 스스로를 돈 키호테 데 라만차라고 거창한 이름을 부여한 후, 스스로 만든 투구와 갑옷을 입고 말라빠진 로시난테(말)과 조금 모자란 종자 산초를 데리고 모험을 나가는 일 자체가 기사도 정신과 당대에 한물 가긴 했지만 유행했던 기사 소설에 대한 조롱을 보여준다.